00283 2017 =========================================================================
#283
“너, 너...”
“Hi.”
너무나도 태연한 녀석의 행동에 말을 잊고 말았다. 아니, 당황했다. 마치 제집인 마냥 내가 항상 누워있던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행동과 더불어 옆에서 정자세로 앉아있는 포이보스 식구들까지 전부 평범한 광경은 아니었으니까.
[테일러 전격 내한! 갑작스러운 내한에...... 테일러 노우웰의 에이전트에서 이렇다 할 공식 보도가 없는 가운데 이러한 갑작스러운 내한이 단순 사적인...... 절친인 강지혁과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미국의 팝스타 테일러 노우웰! 휴가차 한국으로 왔다? 갑작스러운 내한에......]
물론 이곳으로 오면서 핸드폰으로 인터넷 기사들을 살펴보긴 봤었다.
프로젝트 데뷔 시즌 2 스케줄과 아레나 공사 부지를 찾은 일.
고작해야 그 반나절 남짓한 사이에 어떤 기사들이 게재되었고 녀석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어째서 일어난 일인지를 살펴봐야만 했으니까.
[뭐야, 나 여기 온지 한참 됐는데! 나 배고파. 맛있는 거 사줘. 응?]
어휴. 머리 아픈 건 나뿐이지?
그런 내 심정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배고프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녀석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일단 물어볼 말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었지만 당장 배고프다는 녀석을 굶길 정도로 우리 둘의 사이가 가볍지는 않았으니까.
그나저나 민재 삼촌도 그렇고 왜 저렇게 다들 얼어 있는 거야? 뭐 잘 못 먹었나?
*
[우와 진짜 맛있어!]
누가 보면 한국사람 인 것처럼 능숙한 젓가락질로 동파육을 집어먹으며 연신 ‘맛있다’를 연발하는 녀석을 보니 기가 찼다. 그럼 방금 전까지 한국에 왔는데 왜 중국음식점을 가냐면서 다른 데로 가자고 한 여자는 누군데? 나 원 참.
“감사해요. 갑자기 전화 드려서 많이 곤란하셨을 텐데.”
뭐, 그래도 녀석이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흐뭇해졌다. 그래서 더욱 이영수 요리사님한테 감사했고 말이다.
“언제든 뭐 먹고 싶을 때 찾아오라한 사람은 나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나저나 어때요? 맛은 있어요?”
“네, 진짜 맛있어요. 테일러도 맛있다고 계속 말하고 있네요. 뭐, 저 젓가락질 하는 것만 보셔도...”
갑작스럽게 한국으로 그것도 포이보스 휴게실로 나를 찾아온 녀석의 배고프다는 말에 딱히 데려갈 만한 곳을 떠올리지 못했다. 물론 그때 당시 마음 같아서는 사고 아닌 사고를 친 녀석에게 김밥헤븐으로 가서 라면 한 개 사주는 것으로 그 벌을 대신하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넓었으니까.
뭐, 그러다보니 내가 아는 식당 중에서 가장 맛있는 곳을 자연스럽게 찾게 되었다.
“새우 완자랑 탕수육 아직 안 나왔으니까 너무 배 채우지 말라고 해요. 그것도 다 먹고 면 요리랑 후식까지 먹어야 우리 집 요리 제대로 먹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네, 그렇게 말할게요. 그리고 항상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안 그래도 사람들 많아서 자리 마련해주기 어려우셨을 텐데.”
그 덕에 따로 자리를 따로 빼주고 맛있는 음식까지 손수 만들어주신 요리사님에게 매번 폐만 끼친 것 같아 괜히 이곳으로 테일러를 데려왔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말이다.
“지혁 씨가 자주 와서 홍보해준 덕에 손님들이 많이 늘었어요. 하하! 그러니까 그런 걱정 하지 말고 좋은 시간 보내다 가요. 오늘 코스 요리 손님들이 많아서 나는 이만 가봐야겠네요.”
더욱이 내가 이곳을 위해 따로 뭐를 한 게 없는데, 내가 이곳을 처음 와보기 전부터 이곳은 언제나 손님들로 붐볐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진데, 저렇게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요리사님의 말까지 이어졌으니 오죽할까.
그저 감사함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잊지 않는 수밖에.
*
한사코 돈을 받지 않으려는 이영수 요리사님에 의해 결국 입구에서 계산을 하지 못하고 식당을 떠나는 수밖에 없게 됐다. 물론 죄송한 마음에 잽싸게 테일러 녀석과 함께 사모님을 사이에 두고 같이 사진도 찍고 사인도 해드렸지만.
어쨌든 배도 든든하게 채웠겠다, 슬슬 본 용건을 꺼내려했다. 녀석이 갑작스레 드라이브를 가자느니, 이 추운 날에 같이 한강 공원을 거닐고 싶다느니 하면서 나를 조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뭔데?]
결국 무슨 말만 꺼낼라치면 교묘하게 이를 피해버리는 녀석 덕에, 본론은 저녁이 다되어서야 꺼낼 수가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갑작스럽게 한국으로 온 것일까. 아니 이 별것 아닌 듯한 질문을 녀석은 왜 피하는 것일까. 수많은 의문들이 하루 종일 나를 휘감아 돌았는지라 샤워를 하고나온 녀석의 두 어깨를 내게로 끌어당겼다. 더 이상 이 의문들로부터 녀석이 도망치지 못하게.
[그냥 놀러온 거면 나한테 말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어. 그러면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입은 좀처럼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라 점점 마음이 답답해져갔다. 단지 녀석이 ‘그냥 놀러왔어’ 또는 ‘그냥’과 같은 간단한 대답만 했더라도 녀석 다운 그런 행동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지언정 이다지도 답답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지, 아는지. 녀석은 나의 물음에도 그저 내 품속으로 파고 들어와 고개를 묻을 뿐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덕분에 나로서는 밥을 먹을 때도, 간단히 드라이브를 할 때도 시종일관 떠들썩했던 녀석의 그러한 행동의 원인이 이 화제를 피하기 위함이라는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상황이 이렇다보니 무엇인가 내가 모르는 복잡한 사정이라는 게 녀석에게 생긴 것 같아 단순 답답했던 마음이 걱정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녀석을 알게 된지 이제 고작 수년이지만 나 나름대로 녀석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생각했었는데 이런 녀석의 행동은 말 그래도 ‘녀석 답지’ 않은 행동이었으니까.
[내일은 뭐하고 싶은지 생각해둬. 알겠지? 같이 가줄테니까.]
그래서 도리어 더 캐묻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녀석이 내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을지라도 결국엔 말해줄 것이라는, 심중에 품고 있는 걱정거리들을 내게 털어놓고 싶었기에 나를 찾아왔다고 생각했으니까.
[푹 자. 네 곁에 있을 테니까.]
[응...]
[한국에 잘 왔어. 네 집처럼 편히 쉬다가 가. 알겠지?]
[응...]
내가 힘들 때 녀석이 큰 힘을 주었듯 나 또한 녀석을 위한 안락처가 되어주고 싶었기에 녀석이 드디어 입을 열었음에도 그저 꼬옥 껴안아주었다. 녀석 말마따나, 내 품안에서는 푹 잘 수 있다던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런 사소한 행동들마저도 지금의 녀석에게는 큰 힘이 되어줄 수 있다 생각했으니까.
*
“아녕! 아녕! 나 사랑! 사랑이!”
“옵빠!”
“옵빠! 아녕!”
“사랑이, 소망이, 희망이 오빠 보고 싶었어?”
하고 싶은 것들을 생각해두라는, 같이 해주겠다는 내 말에 녀석이 택한 첫 번째 행선지는 다른 어디도 아닌 우리 집이었다. 잠실 타워가 아닌 본가 집말이다.
덕분에 갑작스런 손님을 맞이하게 된 작은 엄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삼촌은 거기서 눈치 없게 실실거리고 있었지만.
“응!”
“보고빠!”
“응응! 누구? 누구?”
어쨌든 어느새 말도 잘하고 걷기까지 하는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그 순간만큼은 테일러 녀석을 향한 걱정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뭐, 녀석 또한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나와 마찬가지인 듯 했지만.
[환영해요. 우리 집에 온 것을.]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해요. 제가 지혁에게 졸라서...]
[지혁이가 집에 친구 데려온 건데요. 뭘.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있어요. 밥은 먹었어요?]
그런데 뭔가 조금 이상하긴 했다. 평소라면 당당하고 털털해야할 녀석이 삼촌과 작은 엄마 앞에서 묘하게 부끄러워하는 듯한, 전혀 녀석 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아.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러는 것일까.
갑작스런 녀석의 한국 방문 그리고 평소 모습과는 묘하게 괴리감이 느껴지는 녀석의 행동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다시금 내 머리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우리 아직 밥 안 먹었어. 삼촌. 작은 엄마 죄송해요. 너무 갑작스럽게 왔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기가 지혁 씨 집인데 갑작스럽게는 뭐고 죄송해요는 뭐에요. 일단 밥 맛있는 걸로 준비했으니까, 친구 데려와서 얼른 먹어요. 어서.”
이내 작은 엄마의 따뜻한 말과 더불어 식탁으로 나와 테일러의 등을 떠미는 삼촌의 손길로 인해 그런 상념을 계속하지는 못했지만.
아니, 저 녀석 혹시 나한테 뭐 잘못한 게 있는 것 아냐? 흠.
*
[이건 뭐야?]
[그건...]
상다리 부러질 듯한 상차림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누가 봐도 한국인이라 할 정도로 쇠 젓가락을 잘 다루는 녀석의 질문 하나, 하나에 꽤나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신선로니 떡갈비니 그런 것들을 도대체 어떻게 일일이 설명한단 말인가. 그것도 한국말도 아니고 영어로.
[그건 한국의 전통음식 중 하나에요. 천년도 더 된 음식인데 지금 먹고 있는 건 조선왕국의 왕들이 먹던 방식이에요. 이름은 신선로고.]
[아! 그렇군요! 정말 맛있어요. 재밌고요. 그럼 이거는요?]
[그건 떡갈비라고 음... 소갈비 살을 곱게 다져서 만든 구이요리에요. 한국 전통음식인 떡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름이 떡갈비에요. 아! 물론 떡갈비도 한국 전통음식이고요.]
다행히 삼촌이 작은 엄마의 말들을 즉석에서 통역해 테일러 녀석에게 알려줘 한시름 덜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진땀 꽤나 흘렸다. 잠시나마 녀석을 걱정했던 내 마음이 조금 과했나싶을 정도로 녀석은 평소 모습 그대로 지금 이곳의 분위기를 주도해나갔으니까.
[정말 너무 감사해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들을 많이 준비해주셔서요. 사실 지혁에게 졸라서 여기 오긴 왔지만 실례 일까봐 조금 걱정하긴 했거든요.]
[지혁이 친구니까, 한국에 올 때면 언제든 와도 좋아요. 뭐, 친구 아니어도 딱히 상관은, 저기 혹시 우리 지혁이랑은 무슨 사이인지 알,]
“삼촌!”
다만 그 평소 모습 그대로라는 게 삼촌에게도 해당됐다는 게 문제였지만.
하아. 웬일로 가만있나했다. 이 조카바보가 말이다.
“이게! 삼촌이 말하는데!”
“뭔 소리야. 그 얘기가 도대체 왜 나와? 테일러랑 나랑은 친구라니까?”
“자식이 친구면 친구인거지 큰 소리는! 삼촌이 말이야. 네가 집으로 처음 데려온 여자여서 궁금한 것 좀 묻겠다는,”
사랑이, 소망이, 희망이가 태어난 뒤 조카바보 기질이 확 가라앉은 줄 알았는데 이는 그저 나만의 바람일 뿐이었나 보다. 아주 기회만 보인다 치면 놓치지 않고 조카바보 기질을 내보이니까.
“오빠. 귀한 손님 앞에 계신데 왜 그래요. 창피하게.”
“어, 어?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 지혜야 오빠가 창피해? 나는 그냥 지혁이가 처음 여자,”
“오빠!”
“암 그렇고말고. 내가 조금 실수를 했네. MS. NOWEL. I made a mistake. Sorry......”
그래도 덕분에 테일러 녀석도 그렇고 나도, 본의 아니게 웃게 되어 기분은 좋았다. 작은 엄마 말에 꼼짝도 못하는 삼촌의 모습이 나로서는 꽤나 새롭게 또 통쾌하게 다가왔고 테일러 녀석 또한 눈치로 지금 상황을 대충 짐작한 듯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으니까.
“옵빠! 나 이거!”
“나도!”
“나능 이거!”
뭐, 귀여운 여동생들의 보챔 또한 크게 한몫했지만.
*
꽤나 고풍스러운 실내에 앉아있는 십여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의 시선은 오로지 단 두 명에게로 쏠려있었다.
“이미 결과는 확정적입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다들.”
누가 봐도 이 자리의 주인공인 듯 주변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는 이 그리고
“아닙니다. 주군, 아니 대통령 각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바짝 붙어 그 주인공의 시선을 오롯이 독점하고 있는 이에게로.
“경기도 쪽이 불안하긴 하지만 고양, 수원, 용인, 성남 등 주요 도시에서의 지지율이 반등하고 있는 만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각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 어느 누구하나 가볍다고 할 수 없는 이름들을 지니고 있었지만 주인공의 시선과 말은 오로지 바로 옆에 기립하고 있는 사내에게로 쏠려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러한 주인공의 편애 아닌 편애를 불편해하거나 시샘하지 않았다. 아니 이 같은 감정들을 감히 드러내지 못했다.
“...... 이상 열 곳 정도 그리고 평창, 한남동 쪽 일은 이미 차질 없이 일이 진행되고 있다 들었는데... 그럼 남은 게 흠... 뭐, 일단 다른 데는 제쳐두고 고양 쪽은 얘기가 잘되고 있나요?”
“그것이...”
“무슨 일이죠?”
“이미 사업주체가 언론을 통해서 너무나도 명확히 알려진 터라 생각보다 작업이 지지부진합니다. 백제 측도 그렇고 JJ 그룹 측도 난색을... 더군다나 고양 시장이란 사람이 무뢰배 같은,”
“이 사람이! 지금 각하 앞에서 변명을!”
“주, 주군 죄송합니다. 어, 어떻게든 일을 진척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심지어 그들만의 은밀한 계획의 진행에 있어 자신들이 모시는 주군인 주인공이 아닌, 사내의 호된 질책을 받았을 때조차도.
그렇게 그들만의 밤은 깊어져만 갔다.
질척거리는 야망과 욕망 그리고 복잡한 감정들을 가슴속 깊이 숨긴 채.
============================ 작품 후기 ============================
15일 00시 07분 예약 아이템 연재분입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신분들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집에 일이있어 당분간은 예약아이템을 사용하여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코멘트 퀴즈]
Q. 주인공이 지금껏 찍은 드라마의 제목들을 모두 열거하시오. (수정된 사항이 있어 해당 부분을 확인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코멘트 퀴즈 선착순 정답자]
1등 : 라이몬드님 3점
2등 : vcnpav님 2.5점
3등 : 사랑그사람님 2점
4등 : 칸르님 1.5점
5등 : 너의업을짊어져주마님 1점
6등 : Te4Rs님 0.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