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9 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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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에서 술판을 벌이는 공지연을 애써 무시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를 건드리는 건 벌집을 건드리는 것과 같았으니까.
[진짜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말 꺼냈던 거고. 그런데... 생각보다 재연이가 그쪽에 대한 마음 아직 정리를 못했나 봐요.. 이제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나를 그렇게 원망하듯이 쳐다보는 거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그랬나 봐요.]
그런데 공지연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빨개진 얼굴과 더불어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전혀 아무렇지 않게 놀랄만한 얘기를 털어놓았으니까.
[그래요. 당신 말마따나 이제 재연이와 당신 둘 다 아무런 사이 아니죠. 그쪽이 재연일 용서해줬으니까, 나랑도 전혀 껄끄러울 필요 없는... 걱정 말아요. 촬영에 지장 있게 안 할 테니까.]
유재연이 나에 대한 마음을 아직 정리하지 못했다는 말마따나, 결국 나 또한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스로 가는 비행 중 내내.
*
이곳 그리스에서 찍을 내용 자체는 많지 않았다. 어차피 대부분의 촬영은 삼척에 한참 공사 중인 세트장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니까.
다만 그래서 문제였다. 삼척에서 찍을 내용들 자체가 사실 이곳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가상의 분쟁국가에서 일어난 일들인지라, 촬영 신 자체가 뒤죽박죽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더욱이 첫 촬영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의 꽤나 아름다운 섬에서 공지연과 키스신, 베드신을 비롯한 달달한 신들을 찍는 다는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당장 극의 후반부에 나올,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내가 살아 돌아온 신 그리고 재회의 기쁨을 맞이하는 신 등을 찍는 다는 점에서 감정의 연결고리를 찾기가 매우 어려웠으니 오죽할까.
“여기 풍경 너무 좋죠? 이곳 풍경 때문에 이번 로케 장소를 그리스로 했어요.”
어쨌든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공지연이 기내에서 술에 취해 한 얘기 따위로 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 않았고 이제는 온전히 촬영에 집중할 생각이었으니까.
“첫 촬영부터 베드신이라서 어쩌죠? 감정 몰입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런데 막상 감독님, 작가님의 인도 하에 이번 그리스 로케 촬영의 핵심지역인 이곳 외딴 섬을 둘러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바다 한가운데 절벽들로 둘러싸여있어 마치 개인 비치인 듯 보이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더불어, 베드신을 언급하는 작가님의 표정이 매우 기대에 찬 상태였으니까.
“그래도 첫 촬영부터 센 장면을 찍으면 나머지 촬영 부담감이라든가 호흡 면에서 꽤나 편해질거에요.”
물론 말이 베드신이지 실제로 공지연 그녀가 화면상으로 보여줄 노출은 그저 어깨선뿐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촬영하는 당사자들에게 긴장감을 안겨다주지 않는 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면에 드러나지 않는 다고해서 그 신을 촬영함에 있어 상의를 벗은 채 위 아래 속옷만 입고 있는 그녀를 가슴으로 품는 행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일단 여기서는 베드씬이랑 음... 그러니까, 씬 넘버 81에 해당하는 차안에 있는 상태에서 절벽에 떨어진 뒤, 이곳에서 지연 씨한테 인공호흡이랑 간단한 구급법하는 장면도 있고......”
그래서 간략하게나마 신의 구성에 대해서 다시금 언급하는 작가님의 말에 나도 공지연 그녀도 어색함을 느끼게 되었다. 뭐, 이곳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눴던 대화 또한 한 몫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내일부터 촬영 들어갈 테니까, 오늘은 편히 쉬도록 해요.”
어쨌든 대충이나마 한 번씩 촬영이 있을 곳들을 둘러보다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고 말았다.
“내일 촬영이라 술 마시기는 조금 그래도 간단히 저녁이라도 같이 하는 거 어때?”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다.
“그러자.”
“그래요.”
어차피 이곳 그리스까지 온 연기자는 나와 공지연을 포함해 진우 형 그리고 지현이까지 총 4명밖에 되질 않았으니까.
그렇게 숙소 호텔의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굳이 알지도 못하는 외딴 곳에서 식당을 찾으러 해매는 것보다는 내일 촬영을 생각해 최대한 편하게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곳이 낫다는 게 나와 일행의 생각이었으니까.
*
수블라키(Souvlaki, σουβλάκι). 그리스의 전통음식이라는 일종의 그리스식 꼬치구이를 주문한 뒤 자리에 앉자마자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는지라, 다시금 자리를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호텔이어서 다행이었다. 그것도 아니었으면 내게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불편한 마음을 안고 저녁식사를 해야만 했을 테니까.
그렇게 나를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하는 이들 때문에 덩달아 자리를 옮겨야 했던 일행들에게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아 계산서 밑에 살짝 카드를 올려놓았다. 어차피 얼마 되지도 않을 거 저번에 진우 형이 술을 한번 산만큼 이번에는 내가 내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았으니까.
“이야, 이번에 그리스 공항 난리 났다면서?”
어쨌든 진우 형과 지현이는 우리보다 일찍 이곳에 도착해서인지 여러모로 편해보였다. 이미 수블라키를 먹어본 탓인지 비교적 익숙하게 이를 잘라냈고 이내 나와 공지연의 접시에 이를 덜어주기까지 했으니까.
“응? 아, 뭐 그렇지.”
그런 진우 형의 이어진 말에 그저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형 말마따나, 어떻게 안 것인지 나의 그리스 방문을 안 그리스 팬들이 공항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하는 바람에 이곳까지 오는 데 꽤나 고된 과정을 겪어야만 했으니까.
“전용기까지 타고 왔다면서 좋았겠네? 지연이?”
그나저나 이미 공지연과 진우형은 말까지 놓은 상태인 것 같았다. 아니,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말을 놓은 것 같았다. 아직까지 단둘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그녀를 공지연 씨라고 부르는 나와는 달리 말이다.
뭐, ‘나도 모르는 새 언제 이렇게 됐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순간 들어왔지만 이내 털어 내버렸다. 그동안 혼자 바쁜 척하며 만나자고 하는 진우 형과 지현의 연락을 거절했던 것은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이제부터 몇 달 간은 계속해서 밥 먹듯이 볼 사이이니 그랬던 것도 있고 말이다.
“한국 갈 때는 다 같이 가. 그럼.”
“정말?”
“뭐, 어차피 가는 김에 같이 가는 건데 뭘.”
어쨌든 보름간의 그리스 로케 촬영이 끝난 뒤 어차피 한국에 가야했기에 진우 형과 지현을 같이 태우고 가는 게 어렵지는 않았는지라, 그렇게 하겠다고 말 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어차피 기름 값은 나 혼자 타나, 그들 모두가 타나 별반 차이가 없을 테니까.
“이야, 역시 월드 스타는 다르네.”
그렇게 한동안 수블라키와 곁들여 나온 야채샐러드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술을 먹지 않겠다는 말은 어디 갔는지, 어느새 저마다 맥주잔에 맥주를 가득 담아 마시면서 말이다.
“그런데 부담감이 장난 아니네.”
그래서였던 것 같다. 분위기 좋은 전망 그리고 맛있는 요리, 맥주까지. 더욱이 해외에 있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꽤나 진지한 얘기를 꺼내게 한 것은.
“난 내 연기 인생에서 영화도 아니고 드라마에서 100억이 넘는 대작을 하게 될 줄은 꿈에 도 몰랐어.”
아무래도 대놓고 말은 안 해서 그렇지, 모두가 다 부담감을 안고 있는 듯 했다. 아니, 솔직히 부담감을 안 가지는 게 말이 안 됐다. 말이 100억이지, 100억이면 한국에서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찍을 수도 있는 액수였으니까.
“게다가 경쟁작도 100억이 넘을 줄은.”
더군다나, 경쟁작 또한 제작비가 100억이 넘었으니 오죽할까.
물론 수많은 배우들이, 연기자들이 제작비와 상관없이 자신의 작품에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제작비 액수도 액수거니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주연과 주연급 조연 배우들에게 이는 특히나 중요했다.
흥행 여부 또는 작품의 예술성 등 자신들이 맡은 배역이 자신들의 브랜드가 되고 나아가 필모그래피, 커리어 등의 자산이 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상대편도 만만치 않다던데 자신은 있어? 그래도 나랑 지현이는 조연인데 너랑 지연이는 주연이잖아.”
어쨌든 진우 형의 말과 더불어 이에 동조하는 등 고개를 끄덕이는 지현을 보자니, 나 또한 속내를 저절로 드러내게 되었다.
“에이. 뭐가 조연이에요. 이은숙 작가님 조연은 주연급이잖아요. 나오는 분량부터 장난 아니더구만. 나 나오는 씬 거의 다 형이랑 같이 있는 거잖아요.”
“야, 그래도 주조연이랑 주연은 달라. 만약 이번 드라마... 실패하고 제작비 회수도 못하면 그 책임이 감독, 작가한테 1순위로 가긴 하겠지만 주연도 1순위인 건 마찬가지잖아.”
뭐가 됐든 지간에 앞으로 100억이 넘는 제작비가 투입될 이 드라마에서 내가 믿고 의지하며 호흡할 사람들이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으니까.
“부담은 되지. 많이.”
“흠... 그렇지? 아무래도 주연이니까. 더.”
“확실히 예전에 조연을 했던 것보다는. 그게 단순히 130억이라는 제작비뿐만이 아니라, 뭔가 드라마의 흥행을 책임져야 되고 극을 이끌어야 될 책임이 있는 거잖아. 주연이라는 게.”
그렇게 당초 간단하게 저녁을 함께하며 앞으로의 촬영에 힘내보자며 서로를 북돋아주려고 시작했던 이 자리가 꽤나 무거운 쪽으로 흘러가자, 바쁘게 움직이던 포크와 나이프들은 어느새 접시에 내려졌고 모두의 시선은 말하는 이의 눈과 입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번 드라마에서 가장 많은 신을 함께하는 사람들끼리 잘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인 것 같아. 형도 그렇고 지현이야 두말하면 입 아픈 거고. 지연 씨도 뭐, 마찬가지고.”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부담감들을 똑같이 느끼고 가장 잘 이해해줄 사람은 바로 자신들의 바로 곁에 있는 이들 뿐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는지라 이번 작품에 대한 서로의 속내를 꺼내는 게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나와 진우 형의 얘기를 듣기만 하고 있던 지현과 공지연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고 말이다.
“근데 왜 아직까지 지연 씨라고 불러? 오빠는?”
“뭐?”
그런데 그게 지현의 입장에서는 이상했나보다. 내가 공지연의 말에 수긍하면서 그녀를 ‘공지연씨’라고 지칭한 것이.
“아니, 당장 내일 베드씬 찍을 사인데 아직까지 씨, 씨 거리는 게 조금 그래서. 예전에 화보도 같이 찍었다면서?”
“15세인데 베드신까지 있을 줄은 몰랐네.”
꽤나 당황했지만 순간 지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베드신 덕분에 다행히 대화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바뀌어 이를 숨길 수는 있었다. 다만, 베드신에 꽤나 관심이 많아 보이는 진우 형의 눈빛에 다시금 입을 열어야 했지만.
“말이 베드신이지 그냥 껴안고 있는 거야. 절벽에서 차가 떨어져서 핸드폰이랑 무전기 배터리도 없고 몸도 젖은 상태여서 옷도 말리고 뭐 그런 콘셉트로.”
딱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사실 아까 베드신이 있을 외딴 섬에서 꽤나 긴장했다는 말을 하기엔 왠지 모르게 쑥스러운 마음이 가슴 속에 남아 있었고 또한 이것이 진우 형의 장난 끼를 자극시킬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으니까.
“화면상에는 그냥 어깨부분만 드러날 거야. 그래서 15세로 되는 거고.”
“부럽다.”
“아! 오빠!”
“장난이야. 장난!”
어쨌든 그렇게 그날의 저녁식사는 마무리되었다. 자신 또한 베드신을 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지현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진우 형이 지현에게 등짝 스매싱을 여러 대 맞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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