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3 2015 =========================================================================
*
“언제부터야.”
8월 말에 컴백한다는 소식에 숙소에 있던 멤버들 모두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할 때, 지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지혁으로부터 들었던 얘기에는 컴백 소식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김다희 진즉 알고 있었어. 몇 년 전부터.]
[김다희 내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하는 건 너도 이제 그만하라는 뜻이야. 진즉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 그리고 그러면서 간보는 거.]
[나 가지고 유재연이라든지 지수, 나정이 자극하는 거 그만하라는 경고야.]
다희를 향한 지혁의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그리 간단치가 않았으니까.
“재연 언니랑 강지혁이 죽고 못 사는 사이였다는 거 아니면 지수 언니가 강지혁을 단순 오빠로만 보지 않는 거?”
“다희 너! 언니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치...”
다희는 같은 그룹의 멤버이지만 그녀에게는 조금 더 신경이 쓰이는 동생이기도 했다. 오랜 연습생 기간 동안 적지 않은 인연을 맺었고 또 그에 상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만큼 몇 년 동안의 세월을 함께하고 같은 그룹으로 데뷔할 수 있었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인연일 수가 없을 테니까.
어쨌든 그런 그녀가 그녀 자신에게 꽤나 소중한 사람을 신경 쓰이게 했다는 점 그리고 그와 재연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대놓고 그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기 이전부터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다니 오죽할까.
“저렇게 몇 년이 지났는데도 곡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와. 참 신기해. 겨우 이별 한번 했다고... 난 이런 걸 볼 때면 생각해. 강지혁이랑 재연 언니... 이 정도면 죽고 못 살 사이 아니었을까 하고. 게다가 재연언니는 지금도 강지혁 노래만 나오면 말도 안하고 심지어 혼자 있을 땐 운다고.”
하지만 그런 그녀의 놀람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진지해서인지, 방송 이미지와는 달리 평소 애교도 없고 무뚝뚝하기 그지없던 다희가 그녀를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털어놓기 시작했으니까.
“이상해. 어째서 헤어졌는지. 헤어질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헤어졌잖아? 게다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 재연 언니도, 차인 강지혁도 저러는 게 난 이해가 안가. 정작 헤어지자고 한 재연 언니는 차인 것처럼 굴고 강지혁은 이유도 모른 채 차였으면서 그 이유도 모르는 것 같아. 심지어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고.”
그렇게 이어진 다희의 말투에는 일말의 장난 끼조차 보이지 않았는지라 지수 그녀 또한 별 다른 제지를 할 수가 없었다.
“재연 언니는 강지혁이 잘 돼서 배 아파서 저러는 건 줄 알았어. 처음엔.”
더군다나, 다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녀 스스로에게도 꽤나 중요한 내용들이었으니까.
“근데 누가 봐도 재연 언니는 그냥 후회하는 거야. 후회, 절망, 좌절 뭐 이런 감정만 느껴지지 절대 시샘, 질투는 아니야. 배 아파서 그런 사람이 TV나 라디오, 인터넷에서 강지혁 얘기만 보면 잠잘 때 혼자서 베게 끌어안고 울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네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데? 도대체 뭘 했길래 지혁 오빠가 너한테 그러,”
“연습생 때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포기하려고 했고.”
그동안 문득 다희의 말 한마디, 한마디로 인해 분위기가 냉각된 적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 다희의 의도된 행동인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던 지수로서는 지금 이 얘기가 마치 꿈만 같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근데 재연 언니랑 지수 언니 덕에 버틸 수 있었어. 그래서 강지혁 얘기만 나오면 합죽이가 돼버리는 재연 언니가 더 눈에 들어왔던 거고. 뭐, 결정적으로 재연 언니가 혼자 울고 있는 걸 봐서 그렇게 된 거지만.”
그녀가 아는 다희는 방송 상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밝고 애교 있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이런 행동을 할 정도의 짓궂은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녀의 의아함과 놀람은 이내 풀리고야 말았다.
“어쨌든 난 재연 언니랑 강지혁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다면 풀어주고 싶었어. 그래서 몇 번 실험 아닌 실험을 하게 된 거고. 그런데 웬걸? 실험을 하다보니까, 정작 걸리라는 사람은 안 걸리고 다른 사람이 걸려버리더라고.”
비록 호기심이 꽤나 많아 추리 영화나 소설, 만화를 즐겨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누군가를 위한 의도와 만났을 때 이런 행동을 자아낼 수도 있다는 것을 다희의 이어진 말로 인해 알아버렸으니까.
“언니... 언니도 강지혁한테 마음 있다는 걸 알아버린 거지. 뭐, 민아 언니도 약간 수상하지만. 어쨌든 그래서 멈칫하긴 했어. 힘들 때 날 도와줬던 사람은 재연 언니만이 아니었으니까.”
“하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이 마냥 용서되는 것은 아니었는지라 지수 그녀 입장에서 그저 가만히 이를 수긍할 수만은 없었다.
“이유가 어쨌든 이건 옳지 않아. 다희야.”
“더 이상 실험이니 뭐니 안 할 거야. 그렇지만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본 결과로는...”
어찌됐건 그녀는 Trendy의 리더로서 멤버들을 챙겨야할 의무가 있을뿐더러, 지금까지 다희의 행동으로 지혁이 알게 모르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었으니까.
“강지혁이 자기 때문에 월평결과도 안 좋고 그래서 주변 수군거림 때문에 결국 헤어지게 됐다는 소리도 있지만. 난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해. 뭐, 지금까지 아파하는 걸로 봐서 옆에서 누군가가 부추기지 않고서는 그런 결정 내릴 정도로 재연 언니 마음이 가볍다고는 생각이 안 되니까.”
그런 그녀의 행동과 말이 와 닿아서일까. 다희의 태도가 한결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입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털어놓았다.
“김나정.”
“뭐?”
“강지혁이 조금만 더 늦게 제동을 걸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쨌든... 내 생각엔 나정 언니야. 나정 언니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연관되어 있어야 퍼즐 조각이 그나마 맞춰지니까. 뭐, 재연 언니 보는 눈빛도... 아니다. 이건 확실한 게 아니니까.”
“그게 무슨...”
“어쨌든 언니나 재연 언니한테는 너무 미안했어. 주저리주저리 늘어놨지만 결국 내 흥미대로 움직인 건 사실이니까.”
마치 아직 자신이 파악하지 못한 사실들이 남아있음을. 그리고 이를 끝까지 알아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음을 드러내듯이.
*
“잤어?”
“어.”
다짜고짜 만나자마자 건넨 첫 마디가 주는 한숨에 그저 단답형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그녀의 연락에 그녀를 집으로 들인 것부터가 이미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드러낸 것이지만 그래도 연지가 처음으로 내게 건넨 말이 주는 현실감은 상상 그 이상이었으니까.
“치... 나 이상하지?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 욕심나네.”
애당초 그녀에게 경고했듯 이런 관계는 항상 불안함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누구하나가 사랑을 느낀다면 또는 사랑을 느낀 순간 상대방을 소유하려 든다면 결국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나와 연지의 관계였으니까.
그래서 처음부터 그녀에게 경고를 했던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할 마음이 없으니, 네가 사랑을 느끼고 있더라도 그 마음을 숨겨야 할 것이라고, 그로인해 느낄 수밖에 없는 아픔을 네가 감내해야 될 것이라는 경고를 말이다.
“그래서 좋았어? 백마랑 자니까?”
내 표정이 어두워져서일까. 그녀가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내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한 그녀의 행동이 어떤 감정들을 숨기고 있는지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 또한 이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어. 좋았어.”
그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내게 속삭이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라고 생각했으니까.
“뭐야... 좋았다. 이거지?”
“응. 죽이더라. 모든 게.”
“하긴... 키도 크고 몸매도 장난 아니니까... 어디까지 했는데?”
“네가 상상하는 것 모두. 내가 아는 것 전부.”
“뭐? 이씨! 며칠 같이 있었다고!”
그런데 테일러도 그렇고 연지도 그렇고 어째서 대화를 하다보면 이런 쪽으로 흐르는지 모르겠다. 정작 지금 내게 테일러에 대해서 묻는 연지조차도 173cm라는 여자 치고는 매우 큰 키를 지녔음에도 말이다.
“너가 할 소리는 아니잖아. 너도 키 크잖아.”
“그치만! 그 년, 아니 걔는...”
“하긴 크더라. 너보다 훨, 읍.”
물론 다른 쪽은 차이가 심했지만. 무심코 내뱉은 말에 하마터면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다. 갑작스런 그녀의 키스가 꽤나 질척하게 이어졌으니까.
“내가 더 잘하고 더 기쁘게 해줄 수 있으니까, 다른 여자 얘기 하지 마.”
내가 꺼냈냐? 본인이 테일러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런 얘기 시작도 안했을 테지만 차마 속내를 그대로 꺼낼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지금 그녀의 손에 쥐여있는 나의 소중한 무엇인가가 꽤나 고달파질 테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이미 늦은 듯 했다.
“조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이런 관계... 너한테 절대 좋지 않아.”
“알아.”
“그래, 그러니까... 뭐?”
다시금 이런 관계가 그녀 자신에게 좋을 게 없다는 것을 되새겨 주려하는 순간,
“다 알아. 그러니까. 지금은 나한테 집중해.”
그녀의 고개가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으니까.
*
“여자친구 생기면... 나랑 이렇게 있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지...?”
한순간의 폭풍이 지나간 후, 녹초가 돼버렸는지 내 가슴팍에 기대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녀석의 입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 손으로는 여전히 아래쪽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녀석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올려다보는 연지의 눈빛이 꽤나 짙은 감정을 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그런 말에 내가 머뭇거렸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모르겠어.”
정작 내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후를 생각하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가 우선적으로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응?”
그런 나의 대답이 너무나도 뜬구름 잡기여서일까. 순간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반문을 한 듯한 그녀의 눈을 마주보았다.
“새로운 사람이랑 사랑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이제... 더는 사랑이라는 거 할 수 있을지 모르겠거든.”
“그게 무슨...”
지금 이 순간 이를 털어놓는 것이 자칫 잘못하면 그녀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도리어 지금이라도 이렇게 털어놓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사랑이라는 게 너무 이상적이라는 걸. 그건 단지 그걸 꿈꾸는 것만 허락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떠나지 않는 이상 힘들 것 같아.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나에게는 그저 이렇게 단지 누군가를 통해 욕구를 풀고 위안을 얻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인 것 같아서... 그게 뜬구름 잡는 사랑보다는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크니까...”
“너...”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네가 이런다고 널 사랑하지 않아. 나는... 나는 이미 글러먹은 놈이니까. 마음 속 어딘가가 망가져버린 놈이니까... 나 말고 좋은 사람 만나서 사랑 받으면서 살아. 넌 그럴 가치 있는 여자니까.”
그래서 그녀가 나 같은 쓰레기보다는 보다 좋은 사람을 만나, 내가 줄수 없는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기를 진심으로 바랐으니까.
*
“너 이 새끼...”
“악! 아 쫌! 진짜 나이 들었으면 사람이 변할 줄도 알아야, 악!”
“이게 지금 덜 맞았지?”
하아. 진짜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데 나는 왜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안무가 한 달 안에 좀 해달라고 하면 뚝딱 나오냐? 무슨 우리가 도깨비 방망이야? 금 나오라고 하면 뚝딱 나오고 은 나오라고 하면 뚝딱 나오는 것처럼 안무가 제 알아서 나오게?”
하아. 애초에 이곳에 일을 맡기지 않았다면, 내 일처리 방식을 가장 잘 아는 곳이 이곳이 아니었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가 다급한 이 상황에서 가장 빠르게 믿음직한 결과물을 뽑아낼 곳으로 딱 떠오르는 곳이 이곳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하아. 세상은 썩었어.
============================ 작품 후기 ============================
승찬이아빠님 5 장 감사합니다.
비비vivi님 1 장 감사합니다.
침묵속의수행자님 10 장 감사합니다.
태운님 3 장 감사합니다.
하안숨님 3 장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