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0 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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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여기서 안자?]
[뭐?]
[여기 네 집이라며? 근데 지금 왜 나한테 그렇게 인사해? 마치 너는 여기서 안 잘 것처럼.]
약선재에서 삼계탕을 먹고 난 뒤 간단히 산책을 했다. 남한산성까지야 사람들 이목 때문에 가기 꺼려진다지만, 그 주변만 하더라도 한국이 어째서 금수강산이라고 불렸는지 충분히 증명해줄 수 있었으니까.
뭐, 그래서인지 녀석의 표정이 상당부분 누그러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바쁜 스케줄 때문에 몸이 축난 듯 내게 무엇인가를 토로했을 때조차 힘이 없어 보였는데, 보양식도 먹고 산속에서 좋은 공기를 마시며 산책까지 하고나자 얼굴에 꽤나 생기가 돋는 듯 했으니까.
[집이 여기 하나 뿐인 건 아니니까. 나는 다른 데서 잘,]
[그럼 나도 거기로 갈래. 네가 자는 집으로.]
[뭐?]
그런데 밥 잘 먹고 좋은 공기도 마시고 아름다운 광경도 눈에 담았으면서 어째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너 보러 한국 왔는데, 왜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내가 싫어?]
지금 내가 놀라는 것이 이상한 것인 마냥, 내게 도리어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내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골이 아파왔으니까.
[무슨 소리야. 도대체.]
[너랑 있고 싶다는 말이잖아. 내 말 뜻을 모르는 건 아니겠고 설마 모르는 척 하는 거야? 내가 싫어? 그 정도로?]
이럴 줄 알았으면 애당초 녀석을 이곳으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광고 모델로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실라 호텔은 최고로 꼽는 호텔이기에 그곳을 잡아주려 했건만, 녀석이 어떻게 알았는지 집이었던 곳을 읊었을 때 거절했다면, 이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나 이집 안 쓴지 오래됐어. 지금은 삼촌 집에서 지내고 있어. 아! 물론 오해는 하지 마. 안 쓰고 있긴 해도 관리는 주기적으로 했으니까.]
[왜 이집을 안 쓰는데?]
[하아... 그냥 삼촌 집이 편해서. 여긴 넓은데 혼자잖아.]
1월 이후로 이곳에 발을 들인 적이 없건만 녀석 때문에 발을 들인 결과가 이 모양이라니, 내가 내 발등을 찍었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왔다.
하아.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삼촌 집이나 이곳이나 나 혼자 지내는 것은 매 한가지 이지만 사실대로 속사정까지 주저리주저리 풀어놓을 생각은 없었기에 대충 둘러대는 수밖에.
[그럼 이제 상관없겠네. 내가 여기에 있으면 넌 혼자가 아니니까. 그럼 됐지?]
그런데 그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고 말았다. 하아. 세상은 썩었어.
*
[여기 뷰가 꽤 좋은데? 저기가 무슨 다리라고 했지?]
[잠실대교야.]
[브루클린 대교보다 훨씬 좋은 것 같아. 이렇게 따뜻한 물에 몸 담그고 보니까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거의 몇 개월 만에 찾은 곳이지만 집 상태는 이미 작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내가 난장판을 쳤던 것들은 이미 삼촌들에 의해 원상태로 돌아온 지 오래되었을 테니까.
[한국 날씨는 3월인데도 원래 이렇게 쌀쌀한 편이야?]
[꼭 그런 건 아니고. 원래는 초봄 때만 그러는 건데 요즘은 워낙... 아니 이게 아니지. 하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냐, 지금.]
하아.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비록 눈은 호강을 하고 있었지만 선 베드 놓아주랴, 와인 준비하랴, 수영장에 뜨거운 물 받아놓으랴. 나를 무슨 비서마냥 부려먹는 녀석 때문에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넌 안 들어와?]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물속에서 내게 손짓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한숨만 흘러나왔다.
[물에 들어오지도 않을 거면서 수영복은 왜 입었어? 태닝을 할 것도 아닌데.]
내가 지금 물속까지 들어갈 기분이 아닌데, 그냥 눈으로 호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제발 알아서 즐겨줄래? 야경이든 와인이든?
[어때? 이거?]
[뭐가?]
더군다나 선 베드에 앉아 소주병을 냅다 목에 들이붓는 내게 와서는 한껏 몸매를 뽐내는 녀석 때문에 더욱 골이 아파왔다.
[너 진짜 게이야? 아니면... LGBT중에...]
[텀벙]
[됐냐?]
이게 진짜 놀리는 데 맛 들렸나. 어떻게 하면 날 다룰 수 있는지를 알게 된 것인지, 결국 날 물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녀석의 장난 끼 어린 얼굴에 그저 한숨만 나왔다. 그래, 좋냐? 하아.
*
[좀 떨어지지?]
[왜 그래야 하는데?]
비키니를 입은 채 내게 기대오는 녀석을 조심히 밀어냈다. 하지만 그건 실수일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조차도 순간 ‘아차’했을 정도로 이는 더한 반발로 내게 다가왔으니까.
하아. 이 녀석은 무슨 비키니를 이런 걸 챙겨 와서는.
코디도 없이 그냥 경호원 너 댓 명만 대동한 채 나타난 녀석이 이 계절에 비키니를 챙겨왔다는 게 어처구니없었지만 하필 녀석이 챙겨온 비키니가 홀터넥이라는 게 더 미칠 지경이었다.
[난 너한테 이렇게 하고 싶은데. 넌 싫어?]
나의 밀침에 대한 반발로 더욱더 내게 안기다시피 기대어오는 녀석의 행동에 고스란히 녀석의 몸 굴곡을 느껴야만 했으니까.
그래서 더욱 강경하게 녀석을 밀쳐냈다.
[나 너와 친구로 지내고 싶어. 미국 생활 처음 시작했을 때 따뜻하게 대해줬던 친구, 음악 얘기에 밤이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떠들 수 있는 친구 테일러로.]
꽤나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이다. 솔직히 이렇게 하면 녀석도 이런 행동을 그만 둘 줄 알았다. 그만큼 내 눈빛과 표정에 진심을 담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녀석을 너무 과소평가 하고 있었나보다. 아니, 녀석을 잘 모르고 있었나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뭐?]
[네가 말한 거랑 내가 이러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고? 내가 이러면 너랑 그런 친구가 못 되는 거야? 밤새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음악 얘기하고 뭐 그런 친구가?]
오히려 이제는 완전히 내게 안겨와 손가락 한마디가 채 안 되는 거리까지 얼굴을 들이밀었으니까.
[너와 이 이상 무엇인가를 하면 그러지 못할 거잖아. 그리고 너. 종교적으로나 신념으로나 혼전 순결,]
[그거 개소리야. 네가 그 앞에 말한 얘기는 아직도 이해 못하겠지만, 혼전순결이니 종교니 뭐니 하는 건 내가 그냥 둘러댄 거니까.]
[뭐?]
내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녀석이 이상한 건지, 그도 아니면 지금 상황이 이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이제는 대놓고 내게 안겨오는 녀석의 체온이 느껴졌지만 우리는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으니까.
[다들 내 몸이나 돈에 미쳤는데 그런 놈들이랑 하긴 뭘 해. 더러워.]
[그럼 그게...]
[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해본 적이 없어서 안 했던 거야. 혼전순결이니 뭐니 했던 건 귀찮은 파리들이나 기자들이 그렇게라도 하면 덜 달라붙으니까 그랬던 거고.]
모든 미국 사람들이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미국인이라고 해봤자 한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그래도 이는 내가 그동안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꽤나 큰 차이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너랑 하면 사겨야 하는 거야? 꼭 결혼해야 되는 거고? 무슨 소리야 대체? 너 좀 이상해.]
물론 이성간에 연애를 목적으로 섹스를 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 정도는 아니었다.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이성과 섹스를 할 수는 있는 거니까.
[나는 지금 너한테 이렇게 기대있는 게 좋을 뿐이고]
[쪽]
[이렇게 키스 하고 싶고 그런 것뿐인데 복잡하게 그런 건 왜 생각해? 이거 하면 친구는 못 된다? 그건 또 무슨 말이고.]
하지만 며칠 전 연지와의 관계를 통해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친구를 잃었다는 생각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가졌던 나로서는 녀석의 말이 와 닿지가 않았다. 아니 이상하게도 점점 이해는 돼갔다. 다만, 어색하고 낯설었을 뿐.
[이게 아시안들의 생각인건가...? 진짜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학교 다닐 때 중국인이랑 사겼던 내 친구는 다른 남자들이랑 그냥 다를 바 없다고 했는데...]
도리어 그런 내 태도를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녀석의 말에 힘이 빠져버렸다. 그런 나와는 달리 녀석은 방금 전 허락도 받지 않고 입을 마주했던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내렸지만.
[항상 궁금했었어. 어떤 운 좋은 자식이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있을지.]
[쪽]
[뭐, 그런데 만족이야. 이 정도면.]
*
[최고였어. 너무 따뜻했고 이렇게 깊게 잠든 건 처음인 것 같아.]
결국 녀석과 섹스를 하고 말았다. 이렇다 할 연인이 없는 상태이지만 불과 몇 개월 전 과거로인해 마음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도대체 나란 인간이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어째서 감정과 행동, 생각들이 주관을 잃은 채 그저 온통 복잡한 안개 같은 마음속에서 헤매야 하는지, 그 해답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도무지 감이 안 왔으니까.
물론 그렇게 망설이고 뭔가 내 자신이 아닌 것 같은 마음에도 테일러와의 관계는 기뻤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쾌락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할 거라는 내 스스로의 판단이 그 순간 다시금 힘을 얻었는지 내 품에서 지쳐 잠든 테일러를 볼 때면 사랑보다는 친구로서의 감정만 느껴졌으니까.
[너무 잘해서 기분 좋은데? 다들 이 정도는 하는 건가? 아니면 네가 잘하는 건가? 뭐, 어쨌든 만족. 이 요술봉도 마음에 들었고.]
하아. 관계를 맺고도 예전처럼 테일러를 대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 지금까지는 내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녀석과 나의 관계는 섹스에 관련된 화제만 추가되었을 뿐 그다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대화를 나누는 등 딱히 변화랄 게 없었으니까.
[오늘은 집에만 있으면 안 돼? 나 걷기가 조금 그런데... 뭐, 드라이브 정도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꼭 나가야 해?]
하아. 넌 참 편한 것 같아 좋겠다. 누구는 머리가 깨지겠는데.
*
[여기 펜트하우스 얼마야? 꽤 서비스가 괜찮은데? 룸서비스에 컨시어지랑 하우스 키핑까지 되는 거 보니까 나도 하나 사고 싶네? 보니까, 야경도 꽤 괜찮고. 잠실 대교라고 했던가? 너무 멋있는 것 같아.]
그날은 하루 종일 나가지 않았다. 그녀를 놔두고 나서볼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테일러가 나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으니까.
[뭐, 네가 여기 살고 있으니까. 안사도 되려나? 자주 놀러 와도 되지? 한국 올 때마다 밤은 이곳에서 보내고 싶어.]
하지만 생각 외로 그 결과가 나쁘진 않았다. 그녀 말마따나, 차기 앨범과 관련된 얘기와 그저 평범한 음악 이야기 그리고 이번에 드라마를 하게 됐다는 나의 얘기와 더불어 그녀 또한 이번 앨범 활동에 관한 얘기를 입에 담으며 꽤나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니까.
[나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은데, 넌 안 좋아?]
[어?]
[나 너한테 사귀자는 말도 안했고 결혼하자는 말도 안했어. 그런 걸 요구할 생각도 없고, 그런 걸 바라지도 않으니까.]
그런데 지금 또다시 고민에 빠져버린 내 상태가 테일러는 영 마음에 들지 않나보다.
[책임지느니, 버진을 가져갔으니 무조건 결혼해야 된다느니 그거 엄청 고리타분한거 알아? 너 완전 멋있는데, 어제랑 지금은 우리 아빠의 할아버지 같아. 그것도 완전!]
심지어 본인의 증조할아버지까지 언급하며 내게 불평을 토로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가 너랑 하고 싶어서 한거야. 너도 그때 그 순간만큼은 나를 원한 것 같았고.]
뭔가 녀석의 말은 이해가 됐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 앞에선 나한테만 집중해줘. 안 그래도 얼마 못 있는데, 너무 아쉽잖아. 그렇게 시간 보내면.]
하아.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어휴.
[그래서 내일은 어딜 데려가 줄 건데요. 신사님?]
어쨌든 녀석의 표정과 행동, 목소리들로 인해 잠시나마 굳었던 얼굴을 풀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식사 시간인데 녀석에게 이런 얼굴을 마주하며 무엇인가를 섭취하게끔 만드는 것은 꽤나 실례라고 생각했으니까. 다만,
[뭐, 그전에 어제처럼 네 옆에서 속삭이고 싶은데. 저기 거실에 있는 월 풀에서 와인이나 한 잘 할까요?]
녀석은 이미 저녁 식사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지만.
하아.
============================ 작품 후기 ============================
하안숨님 3 장 감사합니다.
라이몬드 I need you 그거 나오는군요!! 치어업도 나오나여!! (2017.01.25 00:10)
-라이몬드님 꽤나 오래전에 언급되었던 건데 기억하시고 계셨네요. 역시 열혈팬이시네요! 감사합니다.
100화 되었을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200회라니... 199화에서 독자분들이 댓글 안남겨주셨으면 몰랐을 정도로 깜짝 놀랐어요. 벌써 200회라는 것이요.
전작들에서 연중을 많이 해서 그런지, 많은 분들이 이 글도 얼마 못가 연중 될거다고 하셨고 중간에 텍본유출 때문에 3일정도 연재못했을 때 그럼 그렇지 하며 저를 비난 하셨어요.
그런데 200화를 달성하니, 감회가 정말 새롭네요.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회수이니까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2시쯤에 연달아 2편을 올리면 아무래도 앞 연재분의 추천수가 적어서요. 되도록이면 이렇게 올리지 않으려 했어요. 아무래도 추천수도 많이 줄었는지라 추천 하나, 하나가 너무 소중해서요. 오늘 한번 이렇게 올려보고 큰 차이없으면 이렇게 올려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물론 차이가 꽤 있으면 예전처럼 올릴 수밖에 없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