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마음을 노래로-198화 (198/502)

00198  2015  =========================================================================

#

[부담가지지마. 나도 딱히 너랑 사귀거나 그러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그냥... 지금 이 정도로 만족해. 이게 안 되면 그냥... 술 한 잔 편하게 같이 할 수 있는 친구여도 괜찮고.]

그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이미 연지는 보이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내 걸려온 전화로 인해 심사는 더욱 복잡해져버렸다.

단지 욕구의 배출을 위해 너와 관계를 가졌다는, 말로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알아듣게 행동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내가 바라지 않던 것으로 돌아와 버렸으니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비록 어느 정도 소원해졌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내 울타리 안의 사람이었기에 내 욕구를 위해 그녀를 이용하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아. 더군다나, 누가 봐도 거짓인 것 같은 통화내용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으니 오죽할까.

생각을 계속해서 해봐도 답이 안 나왔는지라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보려 애 쓸 수밖에 없었다.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기적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내 삶을 살아가는 게 힘들다는 걸, 조금씩, 조금씩 깨달았고 또 그 변화에 물들어가고 있었으니까.

*

“쉰다더니? 이거 해도 괜찮겠어?”

“약속한 거라 어쩔 수가 없었어...”

"진짜?"

삼촌의 걱정 어린 눈빛에 그저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이 입을 놀린 대가로 이번 해는 그저 쉬고 싶다는 바람을 스스로 져버리게 됐으니까.

“아니야. 말이 쉬겠다는 거였지. 그냥... 투정 정도로 할게. 투정. 10월까지 쉬는 것만으로도 괜찮아. 후우... 관리사님이랑 해서 계약서 곧 써야 될거야, 신경 좀 써줘. 삼촌.”

“뭐, 나야 그게 내 일이니까 당연하다만...”

물론 걱정하는 삼촌 앞에서 이를 대놓고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근데 저번 상속인들처럼 아니, 거기서 출연료를 더 주겠데? 그렇게 세게 불렀는데? 거기다 인센티브까지?”

“몰라. 자세한 거는 삼촌이 관리사님이랑 알아서 해줘.”

어쨌든 이왕 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확실히 준비하고 싶었다. 상속인들처럼 일정에 쫓겨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주연으로서 내가 맡은 역에 충실하고 싶었으니까.

“너 그런데... 이 드라마 맡은 게 약속 때문인 것도 있지만... 혹시...”

“혹시 뭐?”

“상대 여배우가 예뻐서,”

“삼촌!”

“아, 알았다. 나 참, 아니면 아닌 거지. 큰 소리는.”

다만 옆에서 나잇값 못하는 삼촌을 보니 한숨부터 나왔지만. 아니, 어떻게 하면 저런 생각을 떠올릴 수 있는 지 신기할 정도다.

“그래서 누군데?”

“나빼고 주연이랑 비중 있는 조연들은 전부 캐스팅 완료된 상태라는 데 아직 몰라. 그땐 워낙 경황이 없어서.”

하아. 역시 부처 눈엔 부처가 돼지 눈엔 돼지가 보인다는 게 맞는 얘기인 걸까? 그래놓고 집에 들어가는 건 왜 그렇게 싫어하는 지. 나 원 참.

*

“너 뭐보냐? 소리 좀 끄지?”

“어? 형 있었네? 아! 이어폰으로 듣는 다는 거 깜빡했네. 쏘리.”

오랜만에 포이보스 휴게실 소파에 누워 있다 보니 쏠쏠한 익숙함과 편안함이 느껴졌다. 이내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의 주인공인 승현 녀석을 보기위해 고개를 들어야 했지만 말이다.

“뭔데? 뭔데 그렇게 시끄러워?”

“아! 이거? 오늘 ASL 준결승하잖아. 그래서 전에 꺼 경기 몰아보고 있었지.”

“뭐?”

“응?”

그런데 조용 좀 하라는 말을 내뱉은 뒤 눈이라도 잠깐 붙여볼까 싶었던 기존 계획이 시작도 전에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ASL이 내가 알고 있는 그 ASL?”

“그럼 그거 말고 더 있어? ASL이?”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상상 이상으로 나의 구미를 잡아끌었으니까.

“아앗! 아 왜 때려!”

뭐, 그렇다고 해서 녀석의 머리로 날라 간 꿀밤이 멈추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준결승이 누군데.”

“이재동이랑 택신.”

“뭐?”

“형이 6천만 원 지른 이재동이랑 택신이랑 한다고.”

어쨌든 소파에 누워있던 자세를 고쳐 잡게 됐다.

“결과가 너무 시시하게 나올 거라서 별로 긴장은 안 돼. 어차피 택신 앞에서 저그는 그냥 삼대 떡이잖아. 그래서 그냥 한 시간 컷 예상하고 김밥헤븐에서 김밥이나 몇 줄 사와서 볼라고. 치킨 시키면 오기도 전에 끝날 것 같아서.”

“뒤질래?”

복잡한 심사에 그저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찰나에 생겨버린 흥밋거리에 머릿속의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기 시작했으니까.

*

“형...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는데...? 우리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모자 눌러쓰고 마스크 써. 그럼 아무도 몰라.”

원래부터 이런 계획은 아니었다.

[솔직히 한 물 갔잖아. 폭군은 무슨. 폭삭 망해서 저번에 결승도 못 갔잖아. 택신은 그래도 저번에 결승까지 갔어. 테사기 때문에 아쉽게 졌지만.]

[솔까, 아무리 상성이라지만 저그가 어떻게 택신을 이겨? 택신은 프로토스가 아니라 그냥 택신이라고. 내 생각엔 5판 3선이든 뭐든 그냥 한 시간 컷이라니까.]

다만 녀석이 너무나도 건방진 발언들을 많이 했는지라, 내기를 하기로 했고 그게 커져버렸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뭐, 처음 이곳 코엑스에 도착했을 때는 걱정 따위는 없었다. 일찍 온 탓도 있지만 그래도 준결승이라고 하기엔 사람도 별로 없고 이대로만 시간이 흘러간다면 딱히 주목을 끌 거리가 없을 거라 자신했으니까.

그런데 경기 시작 삼사십 분 전부터 이 자신감이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끝도 없이 들어오기 시작한 사람들이 어느새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고 이내 복도와 연결된 공터까지 가득 메우기 시작했으니까.

“괜찮겠지? 형?”

“어차피 경기 시작하면 시끄러워서 우리 말 소리 절대 안 들려.”

“그래도 제일 앞자리인데...”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었다. 제일 앞자리에 앉은 우리가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파들을 헤집어야 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지금 상황과 비교했을 때 결코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하지 못할 것이 자명했으니까.

“마스크랑 모자 있으니까 상관없어. 뭣하면 푯말 들고... 근데 뭐냐 그건.”

그래서 주변의 수많은 인파들로 인해 걱정이 가득한 나머지 고개마저 숙여버린 녀석에게 괜찮다는 말을 해주려했었다. 그게 내 오해였다는 것을, 단지 이곳 스튜디오 입구로 들어올 때 받게 된 푯말에 무엇인가를 적기위해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는 점을 알게 되자마자 걱정 따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뭐가?”

“‘폭군은 무슨, 결과는 3:0 폭망, 폭망저그 이재동.'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니 유치하게 그런 걸 거기다 적냐? 그걸 보고 누가 호응이라도 하겠냐? 애당초 말이 안 되는데?”

이 녀석이 아까부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오죽하면 오랜만에 봐서 내가 잘 모르나 싶었다. 녀석이 안 본 사이에 머리라도 다친 것인지 의심까지 하게 됐으니까.

“뭔 소리야. 그러는 형은 뭐라 적었는데? 헐, 대박.”

“왜?”

“형, 그러다가 여기 있는 관중들한테 몰매 맞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상식적으로.”

“뒤질래?”

“‘택신은 얼어 죽을. 자존심이라도 지키자. 기권고고?’ 아니 솔직히 저그가 어떻게 택신을 이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물론 남자들끼리 게임 가지고 싸우는 게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라지만, 이런 일 가지고 이런 트러블이 생길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라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게임은 이것뿐이지만, 그래도 한 때 힘든 연습생 생활을 버티게 해준 이를 너무나도 쉽게 생각하는 녀석의 행동은 당돌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야, 나는 팩트고 너는 픽션이잖아. 너나 조심해. 너 몰매 맞는다. 여기 다 폭군 팬 밖에 없는 것 같은데.”

하아. 진짜 결과보고 울지나 마라. 형은 남자한테 휴지 챙겨줄 마음 전혀 없으니까.

*

“아! 역시 택신과 폭군입니다!”

손이 흠뻑 젖어버렸다. 정작 내 자신이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첫판, 두 번째 판에서 택신이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승리를 거뒀을 때, 솔직히 당황하긴 했거든요.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셨는데, 결국 택신이 3대 0승리를 거두나 했으니까요.”

하아. 5판 3선승제 대결에서 내가 응원하는 선수가 내리 두 판을 허무하게 져버렸을 때의 감정과 더불어 옆에서 촐싹대는 승현 녀석의 깐죽거림까지.

[형, 어떡해? 진짜 3대 떡이네?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한판 져주라고 부탁이라도 해볼 걸 그랬다. 형 어떡해? 지금이라도 휴지 줄까?]

다양한 요인들로 인해 속은 이미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보는 눈이 많아 겉으로 내색은 못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역시 폭군입니다. 첫판, 두 번째 판은 그냥 연습게임이라고 여기는 것 같아요! 세 번째 판, 네 번째 판 내리 따내면서 다시 승부를 원점으로 바꿔놓았습니다!”

하지만 승현 녀석의 바람과는 달리 승부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분함이 가라앉은 대신 미친 듯이 솟구치는 긴장감으로 여전히 두 손은 땀으로 흥건했지만 내가 응원하는 이가 결국 마지막 게임까지 승부를 이끌고 왔으니 말이다.

“많은 팬들이 와주셨는데, 저희가 또 가만히 있을 순 없죠.”

“저희 중계 진들에게 팬 분들의 푯말을 보고 즉석에서 선물을 드릴 수 있는 재량권이 있거든요?”

그렇게 마지막 게임을 앞두고 혈전을 벌인 두 선수가 휴식을 취한 사이, 그 공백을 메워보려는 듯 중계 진들의 멘트가 스튜디오 곳곳에 분주히 울려 퍼졌지만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이 뭐라 떠들든 방금 전 경기들이 주는 여운과 더불어 승현 녀석과 다음 경기 예측을 하며 신경전을 벌이기에도 바빴으니까.

“아! 저기 뭔가요. 제일 앞자리에 있으신 분!”

“이야! 도발이 꽤나 강력한데요?”

“폭군은 무슨. 결과는 3대0 폭망. 폭망 저그 이재동? 이야! 이분 택신의 팬인 것 같거든요? 도발이 아주 강력합니다. 거기다 제일 앞자리인데다가 이재동 선수 바로 앞이라, 이재동 선수가 이 푯말 봤을 확률이 많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정체를 들키면 우리 자신들도 피곤해질 뿐만 아니라, 이 자리의 주인공이 되어야할 이들에게 실례를 끼치게 될 것임을 모르지 않았는지라 정체를 숨기는 데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로 푯말로 얼굴을 가린 채 미친 듯이 다음 경기를 가지고 신경전을 펼쳤던 것이고 말이다.

“환호성이 엄청납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택신 팬이다. 옳은 말 한다! 뭐 이런 반응이거든요!”

“이미 2:2 스코어까지 온 상태에서 3대0 스코어는 물 건너갔지만 정말 강력한 도발입니다! 안되겠습니다! 저는 저분한테 준비한 마우스 쏘겠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긴 했다. 그렇게 정체를 숨기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했음에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더 따갑게 느껴졌으니까.

“그렇다면 제가 가만히 있을 순 없죠. 저는 해설자이기 이전에 개인적으로 이재동 선수 팬 인만큼 가만있자... 아! 발견했습니다! 방금 전 이상훈 캐스터 께서 지목하셨던 분 바로 옆자리 분!”

“이야! 이거 공교롭게도 방금 전 제가 마우스 상품 드리겠다고 한 분 옆에 앉아계시는 분! 막상 저도 딱 보니까, 바로 옆자리 푯말만 눈에 확 들어오네요!”

“아아! 이거, 두분 친구사이인 것 같은데, 원수지간인가요? 한분은 택신, 한분은 폭군! 이거 도발이 너무 강력합니다!”

“택신은 얼어 죽을. 자존심이라도 지키자. 기권 고고. 이야! 이것도 만만치 않거든요?”

승현 녀석 또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껴서인지, 우리들의 신경전은 종료될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웅성거림과는 조금 다른 뭔가 불안한 기운이 주변을 휘감았는지라 서둘러 스튜디오 분위기를 파악할 필요성이 절실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아! 마지막 한 경기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이런 분들한테 저희가 상품을 드릴 수 있다는 게 행운이네요! 자 그럼 저희가 관중석으로 살짝 나가서 저분들에게 직접! 상품을 전달하겠습니다!”

그런데 정작 푯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나와 승현은 얼어버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순간적으로 우리들의 시선에는 중계 석에 있어야할 해설 진들과 더불어 카메라 서너 대만이 가득했으니까.

그리고 순간 목이 말라 내려버렸던 마스크로 인해 나의 얼굴이 훤히 드러나고 말았다는 사실을 그제 서야 깨닫고 말았으니까.

“강지혁?”

인간은 어리석다. 언제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니까.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지. 순간적으로 내게 몰리는 시선에 과거 ‘아운대’, ‘마이무 팬 사인회’에서 느꼈던 당혹감과 낭패감이 다시금 나를 찾아왔다.

하아. 세상은 썩었어.

============================ 작품 후기 ============================

C P님 후원쿠폰 5 장 감사합니다.

einmond님 후원쿠폰 3 장 감사합니다.

후원쿠폰이 좋지만 덩달아 무거워지는 어깨에 책임감을 느낍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놔해님 추천해주실만한 작품이라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