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6 2013 =========================================================================
#
“쉽게 보일까봐... 남자들은 쉬운 여자는 싫어한다고...”
고개를 내 품안에 묻은 채 속삭이는 슬희의 말에 입을 열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을 뿐.
“같이 있으면 좋아. 그리고... 품 안에 안겨 있을 때도 이마에 뽀뽀해줬을 때도.”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던 모습과 지금 그녀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말없이 고개를 숙이거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던 전과 달리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고 있었을 뿐.
그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흘러가는 시간만이 아까웠을 뿐 모든 게 완벽했으니까
“이렇게?”
[쪽]
그래서일까,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 수줍어하면서도 할 말은 다하는 그녀의 모습에 참을 수가 없었다. 뭐, 내 품에 안겨있는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해준 것이니 만큼 난 당당했다. 무척이나.
그런데 묵혀놨던 문제가 또다시 발생해버렸다.
절대로, 절대로 그녀와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 물론, 한창때의 남자로서 그런 생각이 불쑥불쑥 찾아올 때도 있었지만, 사귀는 첫날부터 그러고 싶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처음과는 달리 이마에 뽀뽀를 받았음에도 여전히 내 눈동자를 마주보고 있는 슬희를 보니 남자로서의 본능이 튀어나와버렸다.
“슬희야 잠깐만 나 화장실 좀.”
나도 모르게 커져버린 녀석을 느끼며 티 안나게 그녀를 조심스럽게 품안에서 떼어 내려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전과 같이 슬희가 나를 놓아주지 않았으니까.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괘, 괜찮아... 건강한 거니까...”
슬희 또한 이를 알면서도 내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하, 맹세한다. 진짜 의도하지 않았다. 사귀는 첫날부터 그녀와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서 힘들다. 커져버린 녀석을 해결 할 길이 없으니까.
*
CNSKY
HIGH TOP
CAP
TWINKLE
IP
가장 마지막으로 잡혀있는 공연순서 덕에 다른 가수들의 무대를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무대들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이들은 다름 아닌 Twinkle과 IP였다.
자신들이 지닌 보컬, 댄스 실력과 이미지로 팬들을 열광시키는, 그렇기에 그들을 부르는 이름 자체가 우상 즉, 아이돌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는 무대 위에서 진정 빛났다.
여자 아이돌 댄스답게 동작 자체가 귀엽고 깜찍함을 품고 있었지만, 실제로 자세히 보면 굉장히 파워풀한, 보컬을 라이브로 함과 동시에 추기엔 숨이 막혀올 듯한 무대를 훌륭히 소화해내는 것 같았으니까.
[감사합니다!]
다만, 서로 떨어져있는 대기실과 세간이 이목 그리고 이어진 스케줄로 인해 그녀를 눈앞에 둔 채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는 게 너무나도 아쉬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도 이내 등장한 IP로 인해 희석되어버렸다.
이번 갓식스 활동의 가장 큰 방해물이었던 그들의 무대가 예상대로 매우 훌륭했으니 말이다.
물론 내가 안면이 있는 프로젝트 데뷔 5인조와는 조금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곡 자체가 댄스에 많은 비중을 둔 터라, 그들의 보컬을 살리기에는 너무나도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더욱이 멤버들 수가 너무나도 많아, 개개인의 보컬 파트가 길어봤자 20초를 넘길 것 같지 않았으니 말이다.
마치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쓴 것 같다 랄까?
뭐, 어찌됐든 지금 이 순간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있는 저들이 지금 가요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장본인이라는 점, 아쉽게도 그들에 의해 갓식스가 밀린 감이 없지 않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기에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나마 출국하기 전에 들었던 갓식스의 1위 소식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지만.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IP입니다!]
정말 냉혹한 세계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아이돌이 탄생하고 그에 비례한 수만큼 소멸해가고 있는 것이 아이돌 세계이니 말이다.
그런 세계에서 방송 4사 1위 등극 여부는 일종의 증명과도 같았다. 그 아이돌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 아이돌이 정상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이 되는지를 판가름하는 증명 말이다.
따라서, 이번 갓식스 활동은 이미 성공을 거뒀다고 봐도 무방했다. 정규 앨범으로 예정되어 있는 차기 활동에 앞서 최정상급 아이돌 그룹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이번 활동은 아쉬움이 한 가득이었다.
함께 만들고 싶었던 무대에 비록 나는 같이 서있지 못했지만, 그들로 하여금 항상 아쉬움과 후회로 남았던 과거가 용서받는 기분을 느꼈던 나로서는 말이다.
게다가 가면을 쓰고 참여하긴 했지만, 뮤직비디오에서 함께 한 무대에 서고 싶다는 꿈을 간접적으로나마 이뤘으니 오죽할까.
뭐, 그런 내 아쉬움과는 상관없이 이 정도만 하더라도 부사장 쪽에서 이렇다 할 시비를 걸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강지혁 씨 준비하셔야 됩니다!
그때였다. 문을 다급히 열며 나의 무대를 알리는 스태프의 말에 머뭇거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Twinkle과 IP의 무대를 보며 빠졌던 사색보다는 지금 관중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팬들을 만나러 가야했으니까.
*
[가지마 가지마]
너와 사랑했던 순간들 그 추억들을 기억해
너를 잊어야 나를 되찾을 수 있을까.
멀어 지지마 여기 그대로 있잖아.
나 혼자 남겨둔 채 제발 부디 제발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
[어디에도]
싸늘한 눈빛으로 이별을 통보하는 너.
거들떠보지 않던 노래가 슬프게 들려와요.
또다시 겨울이 다가와 내리는 눈들이 그대처럼 쌓여가요.
가지 말아달라고 말해보지도 못하고 무심히 떠나는 뒷모습만
그대 내게 오지 말아요.
두 번 다시 이와 같은 사랑하지 마요.
그댈 기억하기보단 마냥 기다리는 게
삭아버린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해.
......
[오늘 만은]
오늘 만은 안 돼 오늘 만은 안 돼.
오늘만은 내 곁에서 함께해줘.
내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는 너를 볼 때면
그럴 때면 잊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심해
나는 아직도 네 생각이 가득해.
오늘 만은 안 돼 오늘 만은 안 돼.
오늘만 내 곁에 있어주면 나도 잊을 수 있어
네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할 수 있어.
K-FESTIVAL에서 내게 허락된 곡은 단 세 곡뿐이었다. 솔직히 프랑스 파리까지 와서 고작 3곡만 부르고 무대에서 내려온다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팀들도 나와 다르지 않은, 이 짧은 순간을 위해 이곳까지 왔다는 것을 앞서 보았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무대 자체가 주는 기분만은 너무나도 좋았다. 순식간에 흘러가버린 공연의 허무함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내 노래에 열광해줬으니 말이다.
[감사합니다.]
[Thank you]
[Merci]
[Gracias]
[Danke Schön]
[Děkuji]
[Grazie]
머나먼 나라의 가수. 자신이 전혀 모르는 언어로 노래하는 가수.
이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공연 다음 날 친히 팬 사인회장까지 찾아준 팬들을 보며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옆에 대기하고 있던 통역사분들이 잠시도 쉬지 못할 정도로 여러 국가의 팬들이 나를 찾아와줬으니 오죽할까.
[Hi] [Thank you]
[bonjour] [Merci]
[¡Hola] [Gracias]
[Guten Tag] [Danke Schön]
[Dobrý den] [Děkuji]
[Ciao] [Grazie]
덕분에 간단한 인사말 정도를 셀 수 없이 하게 되었다. 미처 각국의 인사말을 몰랐다면 크게 낭패를 당했을 정도로 말이다. 뭐, 애당초 배낭여행으로 유럽을 온 내게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가뿐했지만.
“¡Hola”
“¡Hola”
벌써 두 시간 째 같은 자리에 앉아 찾아와준 팬들과 인사를 나누고 사인을 해줬다. 그래서일까, 손목과 어깨의 뻐근함이 느껴졌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K-FESTIVAL 진행 요원이 다가와 사인회 일정을 마무리해도 된다는 사인을 보냈음에도 말이다.
[팬 사인회 일정이 1시간 반 정도로 계획되었던 만큼 이제 그만하셔도...]
[아! 혹시, 자리 비켜줘야 되나요?]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벌써 2시간 째 계속,]
[그럼 상관없으니까. 계속할게요. 그래도 되죠?]
[아!]
간단한 인사와 사인 그리고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유럽 곳곳에서 찾아온, 내가 나눴던 인사말만 봐도 족히 6~8개국에서 온 팬들을 도저히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다.
뭐, 힘들어도 어차피 곧 있으면 휴가인 나로서는 이정도 쯤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도 하거니와, 앉아있는 내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아직도 길게 늘어선 줄과,
“아, 아녕하새요.”
어색한 한국말이나마 내게 들려주겠다고 연습해온 듯한 팬들을 보며 나 또한 힘을 얻었으니 말이다.
“Gracias”
“Soy un gran admirador tuyo.”
“뭐라고 한거에요?”
“‘지혁 씨의 정말 팬’이랍니다.
“아!”
지금 눈앞에서 감지혁이라 적힌 플랜카드를 든 채, 환한 웃음을 내보이는 소녀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는지라 몸은 힘들지언정 마음만큼은 기쁠 수밖에 없었다.
“Gracias.”
“me gustas tu”
“‘당신을 좋아합니다.’ 랍니다.”
“me gustas tu 정말 좋은 단어네요. 하나 배웠네요. 이건 몰랐는데.”
언젠가는 나도 이곳에서 공연할 수 있기를, 그때도 지금 눈앞 소녀와 마주치기를 바랐다. 진심으로.
*
[점심은 어떻게 할래?]
오전 내내, 거의 네 다섯 시간을 꼼짝없이 앉아있었는지라 온 몸에 힘이 없었다. 일단 배고픔도 배고픔이지만, 어깨와 손이 너무 뻐근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좀처럼 뭘 해볼 의욕이 생기질 않았다. 당초 계획대로 사인회를 1시간 반 정도 행사시간에 맞춰 마무리했다면 지금쯤 맛있는 점심을 먹고 신나게 파리 시가지를 둘러보고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형, 나 너무 피곤해서 그런데 오후에는 방에서 좀 쉴게. 8시쯤에 호텔 로비에서 보자. 저녁 맛있는데서 먹을 테니까 지금 나가서 많이 먹진 말고.”
원래 같이 파리 시가지를 구경하기로 했던지라, 석현 형에게 전화를 걸어 쉬겠다는 말을 전했다. 안 그래도 내 예상 밖 행동으로 인해 오후 3시가 다되도록 점심도 못 먹었을 그들이었기에 미안한 감이 없진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감수하고서라도 지금은 쉬고 싶었다.
[털썩]
그렇게 나를 걱정하며 내 방에 당장이라도 오려하는 석현 형을 애써 달랜 뒤,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Hi] [Thank you]
[bonjour] [Merci]
[¡Hola] [Gracias]
[Guten Tag] [Danke Schön]
[Dobrý den] [Děkuji]
[Ciao] [Grazie]
간단한 인사말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나 같은 단어를 많이, 단시간에 해본 사람이 나 말고 누가 있을까. 문득 떠오른 영양가 없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실 이틀 전 파리에 도착해 다음날 바로 공연을 가지고 오늘 오전에 팬 사인회까지 했는지라, 시차 피로에 스케줄 피로까지 겹쳐 몸은 겉으로 표현한 것 이상으로 힘든 상태였다. 하지만, 정작 기분은 마냥 나쁘지가 않았다.
비록 오랜 팬 사인회 일정으로 인해 몸은 피곤했을지 언정,
[Soy un gran admirador tuyo.]
[‘지혁 씨의 정말 팬’이랍니다.]
[Me gustas tu]
[‘당신을 좋아합니다.’랍니다.]
마음만은 따뜻하고 포근했으니까.
[우린 오늘 오후에 팬 사인회 있고 화보촬영 있어서... 힝.]
여기에 슬희까지 옆에 있었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이는 욕심이었다. 오늘 팬 사인회와 화보촬영을 한 뒤 바로 내일 새벽 비행기로 귀국할 그녀 얼굴을 보는 것은 말이다.
첫날 안 봤으면 엄청 후회할 뻔했다. 파리까지 와서 마주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오늘 힘들었다며? 푹 쉬고! 한국에서 기다릴게!]
[수고해.]
어쨌든 비행기 표만큼 훌륭한 숙소 덕에 푹 쉴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약속 시간까지 쉬다보면 컨디션도 회복이 되겠지.
고풍스러운 피아노와 파리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발코니 그리고 푹신한 침대.
그렇게 모든 것이 완벽한 듯 했다. 지금 눈을 감으면 맛있는 저녁 식사와 아름다운 파리의 야경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감사합니다.
선추코가 미래다. 프로듀스 정주행.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자정에서 2분 지난 뒤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