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8 2013 =========================================================================
#
[바, 반칙이야.]
[치... 키스도 잘하네. 손은 완전 응큼하구.]
[우리들 아직 연애 할 때가 아니라는 거. 그 우리들에 나도 들어가니까. 네가 연애를 하든 뭘 하든 상관 안 해. 그냥, 표현하고 싶었어. 나도 널 그냥 선배 가수로만 보지 않는다는 걸. 나도 널 좋아하게 된 것만 같다는 걸.]
[열심히 해서 때가 되면... 그때도 내 마음이 변함없고 네 곁에 아무도 없다면... 그때는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갈래. 뺐기고 싶지 않으니까.]
그날 새벽에 있었던 일은 꿈이 돼버렸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그저 휴가를 즐기기에 바쁜 녀석의 모습에 얼떨결에 입술을 뺏겨버린 나 또한 이를 내색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뭔가, 혼란스럽다.
이 여자, 저 여자 사이에서 간 보고 우유부단함을 드러내는 것은 확실히 예전 내 모습과는 다른 모습인지라, 적응이 안 된다. 이런 내 모습이 말이다.
3집 앨범 수록곡으로 생각 중인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를 만들었을 때도 꼭 이런 마음이었다. 너무나도 깊고 짙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겪게 된 이별의 고통이 사랑에 주저하지 않았던 내 자신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비겁한 이가 되게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노래 제목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로 정했다. 제목 말마따나,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내가 지금껏 해봤던 뜨겁고 열정적인, 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사랑을 의미했으니까.
차라리 나쁜 남자가 돼버렸으면 이런 고민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르는 척 내게 호감을 드러나는 이들의 마음을 거부하지 않고 나는 나대로 설렘을 느끼며 욕구를 채우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막지 않는 그런 손쉬운 길을 갔다면 말이다.
스스로가 성욕이 강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연인과 잠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게 지난 3년간의 솔로 생활은 기적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욕구의 배출만을 위해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과거의 잔재 탓이 컸다. 성욕이 강하고 섹스를 강하게 원하지만, 그 모든 행위에는 전제조건인 연인을 향한 사랑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는, 지극히 원론적이고 당연한 얘기지만 어떻게 보면 고리타분하게 여겨질 만한 생각들이 아직까지 내 머릿속에 깊게 박혀있었으니 말이다.
잘 모르겠다. 솔직히 생각은 이렇게 해도 만약 상황이 달라졌다면 어땠을까. 연지가 만약 그때 위험한 날이 아니었다면? 그때도 내가 지금 생각대로 관계를 거부했을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좀 전 생각과는 달리, 그때 당시의 욕구에 충실했을 것이라는 결론이 흘러나왔는지라 도저히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어머! 제가 조금 늦었네요! 죄송해요!”
“아, 아! 아니에요. 제가 일찍 왔는걸요.”
때마침 들려오는 이 자리의 또 다른 주인공이 아니었다면 좀처럼 풀 수 없는 난제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좀 전까지의 나는 주변과는 격리된 사고 속에서 존재했으니까.
“제, 제가 식사를 대접하려고 했는데...”
“아니에요. 이렇게 따로 시간까지 내주셨는데 당연히 제가 대접해야죠. 게다가 여긴 제가 관리하는 곳인걸요?”
이번 휴가 때 여러모로 우리들에게 신경써준 총지배인이라는 사람이 여자라는 것도 놀랍지만 생각보다 젊어서 더 놀랐다. 이런 거대 호텔의 총지배인이라는 직함하면 배 좀 나온 중년 이상 연배의 아저씨를 상상하는 게 내게는 상식이었으니 말이다.
“그, 여러모로 신경써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덕분에 엄청 편히 쉴 수 있었어요. 동행들도 그렇구요.”
“다행이네요. 정말로요.”
어쨌든 총지배인이 여자든, 남자든, 생각보다 젊든 내 팬이라는 이유로 여러 편의를 봐준 것은 사실이기에 감사인사를 건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뭐, 그런 내 행동이 마음에 들었는지, 상대 쪽도 기분 좋은 듯했다.
30분가량의 짧은 식사 시간이었지만, 간간히 대화를 나누며 웃음을 자주 내보였으니까.
[이거 제 명함이에요. 앞으로도 저희 제주 호텔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머무르실 일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최선을 다해,...]
끝나고 명함을 건네는 상대방의 행동에 조금 긴장을 하긴 했다. 혹시나, 번호를 요구하면 어쩌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자신의 명함만 건넬 뿐 내 번호를 따로 요구하지는 않아 서로 식사가 마무리 될 때 기분 좋게 헤어질 수 있었다.
그나저나, 여기뿐만 아니라 서울 쪽도 맡고 있나보다. 그런데 여자 이름이 이배진이 뭐야? 이배진이.
생긴 거랑 옷 입는 것, 말투, 행동은 완전 귀품 있어 보였는데 이름이 확 깼다. 아버지가 딸보다 아들을 낳고 싶어 했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하네. 참.
*
[4만 2천명을 전율시킨 강지혁 단독 콘서트! 성황리에 막을 내려! 아이돌이면 아이돌! 감성 발라드면 발라드! 댄스면 댄스! 미친 콘텐츠로 콘서트 후기 평점 고공행진!]
[박재성 미친 댄스 파티! 유민재와 성지경의 눈물 젖은 발라드! Amiga의 삼촌 팬 저격! 포이보스 뮤지션들의 재기발랄한 무대! 웃고 울고 미치고 환장하는 강지혁 콘서트! 다가올 서울 콘서트에 대한 기대감 폭등!]
[하루세끼 강지혁 출연 편 자체 최고 시청률 9.2% 기록! PD도 넋을 놓아버리는 강지혁의 ‘누나’ 나영식 PD를 침몰 시키는 강지혁의 ‘삼촌’ 덕분에 소고기 파티하게 된 이시진, 김관규, 촬영 스태프들만 함박웃음? 하루세끼 제작진 측 曰 “첫 편에서 이시진, 김관규, 강지혁의 훈훈 케미를 볼 수 있었다면 다음 주 방영될 방송에서는 초보 농부들의 좌충우돌 모습들을 보실 수 있을 것.”]
짧아서인지 더욱 즐거웠던 제주도 일정이 끝을 맺었다. 걱정했던 것에 비해 콘서트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는 점과 간만에 제대로 쉴 수 있었다는 점 등 이번 제주도 일정은 내게 있어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뭐냐? 너 하루세끼 가서 고생한거 맞어? 엄청 투덜거리더만, 가서 꿀 빨았네?”
“저건 누가 봐도...”
“캠핑 간 거잖아?”
다만, 내 양 옆에서 어제 본 하루세끼 방송에 대해서 말을 건네는 삼촌들의 수다도 얻게 됐지만 말이다.
아니, 이 사람들이! 내가 거기 가서 옥수수를 얼마나 심었는데! 허리 부서지는 줄 알았는데!
솔직히 억울했다. 물론, 첫날 저녁은 엄청나게 푸짐하게 먹었다. 다만, 그게 끝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촬영이 끝난 그 순간까지 ‘밥 먹고 옥수수 심고, 밥 먹고 옥수수 심고, 밥 먹고 설거지 하고 자고 일어나고’가 내가 한 일의 전부였을 정도로 나는 노예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하, 영식 삼촌 진짜.
첫날 내 계획에 당했다고 아주 칼을 갈았다. 조금이라도 쉴만하면 카메라를 들이댔으니까.
진짜 다시는 섭외 안 받아들인다. 진심.
[잠시 뒤 김포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오니, 승객여러분께서는 좌석벨트를,......]
뭐, 처음에는 자초지종과 이러한 나의 억울함을 열심히 토로해봤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부터는 아예 대꾸하는 것을 포기했다. 작정하고 나를 놀리려는 듯한 이들에게는 팩트조차도 변명이 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으니까.
그렇게 첫 콘서트와 휴가의 끝을 알리는 기내방송에 좌석벨트를 매며 생각했다.
하, 놀림 받기 좋은 날씨다.
*
“내일쯤이면 주요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홍보자료가 슬슬 뿌려질 겁니다. 이미 영진이를 비롯한 애들 전체가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지라, 일이 훨씬 수월하게 진행될 것 같습니다.”
새로운 아이돌 그룹의 데뷔로 인해 회사 전체의 핵심 역량이 집중되고 있기에, 보고를 하고 있는 이도 받고 있는 이도 그 태도가 가볍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일 잘못되면 알지?”
“계획대로 철저히 준비시키겠습니다.”
이번에 SD에서 내놓을 신인그룹은 김석현 이사의 첫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이번 건 맡으려고 떠맡은 부담이 가볍지 않아. 잡음 안 생기게 철저하게 준비해.”
회사 내 수많은 이사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가장 젊은데다가 이사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새로운 라인 구성이 절실한 그로서는 이번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이번 프로젝트를 맡기 위해 적지 않은 출혈을 감수한 김석현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또한 자신감에 차있었다.
“계획대로만 가면 최소 평타니까.”
그의 말마따나, 그가 이사로 재직 중인 소속사는 그럴만한 능력이 충분했으니까.
대한민국에서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기획사인 SD에서 데뷔만 하게 되면 무조건 최소 중박 이상의 아이돌 생활은 보장된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수많은 연습생들의 최고 선택지라 할 수 있는 SD이기에, 매년 수없이 많은 연습생들이 정기 오디션에 지원을 했고 심지어 이들 가운데에는 타 기획사 출신 연습생들도 적지 않았다. SD에 합격하기 위해 중소형 기획사에서 연습을 거친다고 할 정도로 SD는 독보적인 존재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가요면 가요, 드라마면 드라마, 예능이면 예능 등 방송과 관련된 거의 전 분야에서 선배 아이돌 가수들이 뿌리 깊게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아이돌이 된 후에도 타 기획사 아이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 아이돌이 지닌 고유한계라고 지적되는 짧은 수명이 SD에서는 통하지 않는 다고 봐도 무방한 점 등 SD는 대한민국 아이돌 기획사의 선두주자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애들은?”
“타이틀 곡과 후속 곡 연습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이번에 데뷔할 예정인 연습생들은 이미 대중들에게 상당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김석현은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있었다. 이번 신인그룹으로 자신 또한 더 이상 늙다리 이사들의 똥구멍을 핥지 않아도 될 것임을 말이다.
다만,
“다른 소속사들은?”
“일단 YH는 별다른 활동이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단, 빅밤이 일본 활동에 전력하고 있고 새로 런칭 될 예정인 걸 그룹도 빨라야 10월쯤에 데뷔할 것으로,......”
이번 프로젝트의 성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가 아예 없지 않다는 말은 또 아니었기에 김석현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나마 SD에 비벼볼만한 기획사들과 관련된 변수들만 피해간다면 그의 계획은 무조건 성공할 테니까.
“JS는?”
“4AM, 4PM은 일본 활동, 미스에스는 수진의 드라마 촬영으로 휴식기, 원더우먼은 연말 활동을 계획 중인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다만,”
“다만?”
“갓식스가 7월 초에서 중순 사이에 컴백할 것으로 예상되어 아무래도 저희 애들과 활동기간이 겹칠,...”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 가능하니까, 계획대로 밀어.”
아직도 아이돌 뮤지션으로서 그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는 빅밤을 비롯해 적어도 힙합 분야에서는 SD를 압도하고 있다 평가받는 YH의 동향이 긍정적으로 흘러가는 만큼 김석현은 염려를 잠시 접어두었다.
YH가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몇 년 전의 JS라면 모를까, 근래의 JS는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Cashcow로써 일본 및 아시아등지에서는 아직도 강력한 영향력을 뽐내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한물갔다고 평가받는 4AM과 4PM,
걸 그룹 천하의 시작을 알렸지만 미국진출 실패와 함께 JS 추락의 큰 원인이 돼버린 원더우먼,
수진이라는 걸출한 여배우를 배출해냈지만 그 외 멤버들은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는 미스에스까지.
1년 전 회사의 새로운 주력 아이돌로 삼을 그룹을 데뷔시켰지만 그 결과가 예전 같지 않았는지라, JS는 지금 그가 보기에 빛을 잃어가는 별일뿐이었다. 다만, 박재성이라는 뮤지션의 저력을 알기에 보고는 꾸준히 받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애들,”
“예.”
“헛짓거리 못하게 교육 단단히 시켜.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저번처럼 잡음 생기면 이번에는 1년이 아니라, 기약이 없을 거라고 주지시키고.”
“예, 이사님.”
얼굴이나 알리라는 가벼운 뜻에서 내보냈던 프로그램에서 별 같잖지도 않는 행동으로 이미지를 깎아먹었는지라, 자신의 행보가 1년이나 늦춰졌다는 점을 잊지 않았던 김석현의 말을 끝으로 그들만의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잠시 후, 그의 집무실에는 침묵과 담배연기만 자욱할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선추코는 미래다. 프로듀스 정주행.
선추코 해주시고 원고료 쿠폰 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성실연재 하겠습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