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4 2012 =========================================================================
“오빠... 혹시 지금 사귀는 사람, 아니 재연이랑 알던 사이였어요?”
그런데, 문제는 지수가 아니라 민아에게서 터져나왔다. 다 같이 짠이라도 할 참에 들려오는 민아의 질문에 나는 물론이고 수나 양과 지수도 순간 얼어버렸으니 말이다.
어째서 지금 갑자기 민아의 입에서 재연이 튀어나온 것인지, 당혹스러운 감정을 애써 감춘 채 지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수 또한 지금의 순간을 예상하지 못한 듯 했다. 그저 그 큰 두 눈으로 민아를 바라볼 뿐이었으니까.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냥 어제 재연이가 이상해서...”
이상하다라. 무엇이 이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공연 도중, 울음소리도 내지 못한 채 숨을 죽이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 그리고 회식 때 말 한마디 없이 술을 들이키던 모습 등 어제의 그 모습들은 평소 그녀가 주위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외면과는 거리가 멀었을 테니까.
“그냥, 연습생 오래했으니까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지. 나정이도 마찬가지고.”
“아하!”
재연과의 관계를 아는 것은 나정, 지수, 다희로 족했다. 민아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많이 알면 알수록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민아는 이렇다 할 의문 없이 내 말을 믿는 듯 했다. 본인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는 환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며 더 이상의 질문을 던지지 않았으니까.
그나저나 아까부터 느낀 건데, 오늘 민아를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다. 지금까지와는 조금, 아니 많이 다른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청바지에 스웨터를 입고 왔던 어제와는 달리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온 오늘의 민아는 우아한 백조 그 자체였다. 어둠속에서도 빛나는 백조.
“히히. 고마워요. 오빠. 좋은 노래도 주시고 콘서트도 초대해주셔서요. 그리고,”
“그리고?”
“아, 아니에요. 그럼 짠!”
뭔가 말이 끊긴 것 같지만, 나로서는 민아의 건배제의를 거부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원치 않은 얘기가 나올까 걱정이 되었으니까.
“나도 민아한테 너무 고맙다. 앞으로도 Trendy 활동 열심히 잘 하길 바랄게! 짠!”
“치! 나도 짠 할 거야!”
“그래 그럼 다 같이 짠!”
“저, 저도요!”
내 곁에서 심상치 않은 눈초리로 민아를 바라보던 지수도, 그 옆에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부지런히 굴리고 있던 수나 양도 이내 샴페인 병을 눈 위로 치켜세웠다. 아무래도 지수와 따로 만나야봐야겠다. 아무렇지 않게 샴페인 병을 입에 가져다대는 것 같지만, 녀석의 눈 꼬리는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
“녹화 시작하겠습니다.”
명실상부 아이돌 관련 방송 가운데 최고라 칭할 수 있는 주간아이돌 녹화가 언제나처럼 스태프의 건조한 목소리로 시작되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주간 아이돌!”
비록 정영돈이라는, 주간아이돌을 현재의 위치까지 끌어올린 개국공신의 잠정하차라는 상황에 처했지만 주간아이돌은 그 명성에 걸 맞는 위기대처 능력으로 다시금 시청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자! 저번 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스페셜MC이자 돈사돌의 주역 중 한분인 성규 씨가 수고해주시겠습니다!”
일명 돈사돌, 정영돈을 사랑하는 아이돌의 준말로서, 어떻게든 정영돈이 복귀할 때까지 임시직으로 그 구멍을 메꿔보겠다는 제작진의 의도에 의해 디피니트의 김선규는 오늘도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애초에 말주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어리숙한 모습이 하나의 컨텐츠로 자리 잡음에 따라 지속적으로 원치 않은 진행의 미숙함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선규의 불편한 속내를 모르지 않은 대프콘이 서둘러 진행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무려 데뷔 수십일 만에 주간아이돌에 입성한 아주 어마어마한 그룹입니다. 바로 Trendy입니다!”
[우아하게]
......
내가 꼼짝 못하게
날 우아하게 만들어봐
솔직 담백 진심 없는 내숭
Bye Bye Hah
우아하게
내가 더 이상 아무말 못하게
날 우아하게 만들어봐
말 뿐인 가식 말고
진심이 느껴지게 Hah
우아하게
“One in a million! 안녕하세요. Trendy 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 들려오는 배경음악에 그의 얼굴에는 그 커다란 크기만큼이나 밝은 미소가 맺혔다.
“인사멘트가 참 독특해요. 무슨 뜻인가요?”
“백만 중에 하나라는 뜻...”
아직 최정상급 여자 아이돌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자리를 넘볼만한 신인으로 꼽히는 Trendy가 오늘의 주간아이돌 출연진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선규의 의도적인 어리숙함에 힘입어 대프콘은 나름 익숙하게 진행을 해나갔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그의 센스는 초창기에 비해 몰라볼 정도로 늘었으니 말이다.
“저는 Trendy의 리더이자 메인보컬을 맡고 있는 갓지수입니다!”
“저는 Trendy의 맏내를 맡고 있는 나정입니다!”
“저는 Trendy의...”
“저는...”
그렇게 Trendy 멤버들의 자기소개가 끝이 나고 주간아이돌의 메인 컨텐츠인 랜덤플레이댄스가 시작되려 할 때였다.
“자! 그런데 말이죠. 오늘 Trendy 분들이 저희 주간아이돌에 나와 주신다는 소문을 듣고, 한 팬 분이 제작진들과 엠씨들에게 선물을 보내왔거든요? Trendy 분들 잘 부탁드린다고요.”
대프콘이 과장된 표정과 제스쳐로 일행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녹화 전 대기실에서 대본을 받아봤을 때부터 자신을 놀라게 했던 것들을 꼭 방송에서 언급하리라 다짐했던 그의 말에 사정을 모르는 선규와 Trendy 멤버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팬 분이 저희 제작진에게 커피와 쿠키 그리고 짧은 메시지가 담긴 쪽지를 전달해주셨는데요. 혹시 Trendy 멤버 분들은 예상가는 분이 계신가요?”
똑순이 리더 갓지수조차 대프콘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할 정도로 Trendy 멤버들은 저마다 당황한 듯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데뷔한 지 채 50일 밖에 되지 않은 그녀들에게는 대본에도 나와 있지 않은 지금 상황이 당황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선규야 대박이지?”
“와! 대박! 진짜 이분이 보내주셨다고요? 와, 그거 완전 유명한 수제제과점 쿠키잖아요? 하루에 딱 정해진 양만 판다는 데. 어떤지 진짜 이상했어. 제작진이 그렇게 비싼 걸 준비할 리가...”
그 사이, 대프콘으로부터 팬의 정체를 듣게 된 선규의 호들갑은 Trendy 멤버들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말이다.
“혹시, 박재성 PD님 인가요?”
“매니저 오빠...?”
잠시 뒤 Trendy 멤버들이 갖가지 추측을 내밀어 보았지만, 말하는 그들 자신도 정답에 대한 확신이 없었는지라, 이 사태를 주도한 대프콘과 제작진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환해져만 갔다.
“아... 사실 정답을 말하시면 저희가 받은 쿠키와 커피를 Trendy 분들에게도 드리려고 했는데, 아쉽네요.”
원하는 방송 분량과 화제성을 끌어 모은 뒤 자기 역할을 다했다는 듯 나서는 대프콘의 멘트에 제작진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대프콘이 준비한 것이 여기까지 였다면, 이제는 제작진의 차례였으니 말이다.
“자! 그럼 여기서 깜짝 이벤트! 제작진 측에서 지금 Trendy 분들을 위해 커피와 쿠키를 보내주신 팬 분과 전화연결을 성공시켰다고 합니다!”
반면 한 눈에 봐도 고급스럽고 맛있어 보이는 쿠키를 먹지 못한다는 사실에 Trendy 멤버들은 내심 시무룩해질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다이어트 때문에 제대로 된 간식하나 먹을 수 없던 상황에서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으니 말이다.
“Trendy 분들, 오늘 Trendy 분들을 위해 커피와 쿠키를 가져와주신 팬 분께 인사한번 드릴까요?”
“One in a million! 안녕하세요. Trendy 입니다!"
"대표로 누구한분이 팬 분과 인사한번 나눌까요?“
그런 상황에서 계속되는 돌발성 이벤트에 Trendy 멤버들은 무의식적으로 지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최고 연장자인 나정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멤버들의 무의식적인 시선을 받게 된 지수가 긴장감을 애써 감춘 채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그녀보다 먼저 수화기 너머에서 촬영장을 가득 메우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신인가수 강지혁입니다. 약소하지만, 커피와 쿠키를 준비했습니다. 제 12년 지기 여동생 지수와 토크 콘서트에 게스트로 참가해준 민아 그리고 나머지 Trendy 멤버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갑작스레 들려오는 지혁의 목소리에 지수는 물론이고 나머지 멤버들 또한 놀란 얼굴을 한 채 전방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만큼 지금 상황에서 지혁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뜻밖이었으니 말이다.
“지혁씨 반갑습니다! 저 대프콘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신인가수 강지혁입니다. 선배님.]
“지금 Trendy 멤버들이 너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 제가 대신 전화를 넘겨받았습니다!”
[그렇군요. 우리 동생 지수야 힘내!]
“지수 양이랑 사이가 돈독하시네요?”
한 눈에 봐도 지수와 친해 보이는 듯한 지혁의 말에 대프콘은 최대한 분량을 뽑기 위해 전화를 넘겨받았다. 제작진 측에서도 그런 그를 응원하듯 재빨리 질문거리들을 도화지에 써내려갔고 말이다.
“제가 아시다시피 JS에서 연습생 생활을 오래했는데요. 그래서 지수랑 어렸을 때부터 친남매처럼 지냈어요.”
“아! 그러시구나. 그럼 혹시 지금 어디 계시나요? 포이보스 회사에 계시나요?”
강지혁이라는 대어를 출연시키는 것은 대박 중에 대박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비록 그게 목소리만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대프콘은 제작진이 들고 있는 도화지 상의 내용들을 실시간으로 체크하며 어떻게든 통화를 이어가려 애썼다.
제작진 뿐만 아니라, 그 또한 지금 상황이 시청률을 결정지을 만한 순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뜨거워진 녹화현장의 열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 저는 지금 점심 식사를 위해,]
[오빠? 누구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혁이 아닌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능숙한 진행으로 분량을 뽑아내던 대프콘을 비롯해 촬영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순간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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