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8 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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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좀처럼 수저를 들지 못했다.
아까 음식을 만들 때도 이런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그때만 느껴지는 감정이라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가보다. 가슴 한 켠에서 올라오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정에 당황하고 있으니 말이다.
“후...”
숨을 깊게 내쉬어봐도 좀처럼 감정의 홍수가 가라앉질 않았다.
만두를 참 좋아했다. 설날 때만 되면 손수 빗어 떡국에 만두를 넣어먹는 게 우리 집의 풍경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삼촌이 나를 키워주기 전까지는.
그 후부터 이상하게도 떡국을 먹지도 만두를 먹지도 않게 되었다. 일찍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대신 누나인 엄마를 친 엄마처럼 따랐던 재성 삼촌도 말이다.
10년도 더된 옛날이 돼버린 기억에 주책스럽게도 눈물이 흘렀다. 수저를 들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는 내 모습에 주변의 모든 이들이 당황한 듯 했다. 다급히 휴지를 구해와 건네는 김성준 씨를 비롯해 모두 어쩔 줄을 몰라 했으니 말이다.
간신히 감정을 다스린 내가 정신을 차리고 만둣국을 입에 담았을 때, 물밀 듯이 기억과 감정이 내게로 흘러들어왔다.
“부모님이랑 같이 설날 때 많이 만들어먹었어요. 돌아가신 뒤로는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데요. 삼촌이랑 같이,”
삼촌과 나, 서로가 그리워하지만, 그리워하기에 떠올리기를 애써 꺼려왔던 기억들이 말이다.
애써 다스렸던 감정이 조절되지 않은 채 다시금 밖으로 흘러나왔다. 꺼냈던 말을 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런 내게 다가와 말없이 어깨와 품을 빌려준 누군가의 배려 덕에 겨우 마음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저는 오늘 지혁 씨 처음 봤는데요. 저도 부모님을 어렸을 때 여읜 입장에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갔습니다. 제 요리가 그동안 지혁씨가 느꼈던 모든 슬픔들을 치유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싶어 만든 요리인데 맛있게 드셔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리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슬프게, 감동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 이게 저희 셰프들이 믿고 있는 요리의 힘이거든요. 그런데 오늘 같은 셰프로서, 지혁 씨의 입 맛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보듬어준 이영복 셰프님을 보면서 정말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오늘은 전적으로 저의 완패입니다.”
결과는 뻔했다. 너무 맛있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던 최한석 셰프님의 요리였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내게만큼은 그런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음식이 아닌 소박한 만둣국이 더 깊게 다가왔으니까.
“이렇게 곧고 바르게 자라줘서 부모님도 자랑스럽게 여기실거에요. 오늘 먹었던 거나,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삼촌이랑 언제든지 와요. 자리 비워둘 테니까.”
별 배지를 가슴에 달아드릴 때 들려오는 이영복 셰프님의 말에 나는 그저 어린애처럼 이영복 셰프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키 차이가 꽤 나기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스꽝스럽겠지만, 정작 나는 이영복 셰프님의 품에서 좀처럼 벗어나질 못했다.
외견상 좁은 그 어깨와 품에서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아빠의 품안에 안긴 것 같은 포근함을 느꼈으니까.
“제가 오늘 주책을 부린 것 같은데요. 녹화가 잘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김흥극 선배님의 음식대결을 끝으로 기나긴 녹화가 마무리되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예기치 않은 내 행동에 녹화가 잘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오늘 정말 맛있는 음식 만들어주셔서 감사하고요. 이번 설에는 꼭 집에서 만두를 만들어서 삼촌이랑 같이 먹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른 방송에서도 자주 인사드릴 테니까, 예쁘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그리고 방송이 될 때쯤엔 막 컴백했을 Amiga도 많이 사랑해주세요!”
그래도 나오길 잘했다. 맛있는 음식을 배가 부른 것을 떠나서, 마음까지 따뜻해졌으니까.
*
[채권이나 수익 형 펀드가 아닌 주식 쪽이요?]
[배당기준일 직전임에도 지금 전체적으로 코스피를 비롯해서 코스닥 전체가 저평가 구간입니다. 기존 채권, 수익 형 펀드에 투자된 것을 건드리지 않고 추가된 금액에 한 해서 주주명부가 폐쇄되기 전에 주식에 지금부터 일정부분 투자하는 것도 나쁘지,......]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결과표는 따로 보내주시고요.]
자산관리사 분의 통화를 끝으로 다시금 발길을 옮겼다. 내 본디 용건은 이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민아를 토크 콘서트에?”
웬일로 삼촌은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일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거나 녹음실에서 작업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덕분에 용건을 꺼내기가 훨씬 수월했다.
“민아 한국어가 안 될 텐데? 아직?”
내가 만든 곡을 다른 사람에게 준 것 자체가 드물었기에 이번 토크 콘서트 게스트를 생각할 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민아를 떠올렸다. 목소리도 고왔고 노래도 곧 잘 불렀는 데다가 얼굴도 예뻤으니까. 몸매도.
“한국말 곧잘 하던데? 스케줄 같은 거 있으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야. 아! 그리고 이번에는 출연료도 있어. 많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민재 삼촌이 회사에서 내준다고 했거든.”
“흠...... 어차피 24일부터 26일까지 스케줄 없기는 한데, 민아한테 물어봐라. Trendy 전체가 간만에 받은 휴식기간이라 삼촌이 뭐라 하기 그러네.
하긴, 연말에 스케줄이 없다는 게 말이 안됐다. 일 년 대목 중에 손꼽히는 시즌이니 말이다. 그래도 꽤나 의외인 게 크리스마스 포함 삼일이 휴가인 점이다. 그 날에 행사 넘치는 게 정상아닌가?
“그럼 삼촌은 허락한다는 거지? 민아가 괜찮다고만 하면?”
아무튼 삼촌이 허락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민아가 허락할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렇지. 누군들 네 제안을 거절하겠니. 그나저나, 민아랑 언제 말 놨냐? 민아가 설마 너한테 오빠라고 부르냐?”
“어, 어? 뭐, 그렇지.”
“지혁아, 민아가 아직 연애금지기간이라서 약간 그런..."
"뭐? 뭐야 또."
"아니지, 뭐 민아 정도면 남편한테도 잘 할 거고 시댁한테도 잘 할 테니까, 그래, 하긴 연상 마누라한테 잡혀서 살 바에는 차라리 집안도 괜찮고 남편 내조도 잘할 민아처럼 조신하고 참한,......”
그런데 다 좋게 가다가 왜 꼭 마지막이 이런지 모르겠다.
삼촌의 실없는 소리에 대꾸할 가치를 못 느낀 나머지 그대로 사무실에서 나와 버렸다. 도대체가 무슨 말을 못하겠다. 뭔 말만 하면 자꾸 저러니 말이다.
이거, 김흥극 선배님 말이 맞는 건가?
나 때문에 연애를 제대로 못한다는 말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그때도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나름 일리 있다 생각했는데, 자꾸 저러는 삼촌을 보니 더 확신이 가기 시작했다. 그때 집에서 여성분과 분위기를 잡고 있을 때도 하마터면 나 때문에 파토가 날 뻔 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허락을 맡았으니 남은 것은 민아에게 물어보는 것 뿐 인지라, 연습실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디에 있으려나.
“오빠!”
운이 좋게도 꽤나 가까운 연습실에서 Trendy 멤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나를 가장 먼저 발견하고 달려오는 지수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 맛이지. 이 맛에 여동생을 두는 거지.
“우리 지수 밥은 먹고 다녀? 왜 이렇게 말랐어? 오빠가 밥 잘 챙겨 먹으랬더니.”
못 본 사이에 많이 힘들었는지, 얼굴이 반쪽이 돼버린 지수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어 준 뒤 시선을 안쪽으로 돌렸다.
“치, 오빠만 그렇게 생각해. 그나저나, 웬일이야? 설마, 나 보려고?”
“우리 지수 얼굴 보러왔지. 뭐, 민아한테 잠깐 볼일 있기도 하고.”
“정말? 그런데 민아는 왜?”
물론 전자보단 후자가 본론이었지만, 티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뒷감당이 안 되니까.
“아, 민아한테 물어볼게 있어서.”
“물어볼 거?”
한창 안무 연습 중이어서 그런지, 다들 땀을 흘리고 있었는지라 조심스럽게 창문을 연 뒤 민아를 바라보았다. 그런 내 시선을 느껴서 일까. 민아를 비롯한 몇 명이 나와 지수에게로 다가왔다. 그래봤자 뒤에 다른 멤버들도 뒤따라오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빠! 안녕!”
“오빠!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강지혁 선배님.”
족발 먹을 때 오빠라고 부른다며 일방적으로 통보를 한 뒤 그걸 지금까지 잊지 않은 듯 한 체이와 음악방송 끝난 뒤 같이 밥을 먹고 헤어질 때부터 오빠라고 부르기 시작한 민아의 인사까지는 좋았다.
굳이 재연의 손을 잡고 내게 다가온 다희 양의 인사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하하... 민아 안녕! 체이도 안녕! 다희 씨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하, 저 꼬맹이를 어떻게든 처리해야겠다.
알게 모르게 꼬맹이에게 한 방 먹었지만, 다시금 정신을 다잡고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되새겼다.
“민아야 혹시 크리스마스이브 때 저녁에 시간 있어? 아니면 크리스마스 때도 괜찮은데.”
용건 있을 때만 찾아와 이런 말 꺼내기도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딱 생각나는 게스트는 민아 뿐이었으니까. 하, Amiga애들 컴백준비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뻔뻔한 소리는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뭐라고?”
그런데 대답을 왜 지수 네가 하고 있냐? 민아 너는 얼굴이 왜 붉어지고?
“헐, 대박!”
얼씨구 꼬맹이 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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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코 정주행이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