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마음을 노래로-36화 (36/502)

00036  2012  =========================================================================

“한국 가면 바로 시상식 가야된다고 했지?”

공항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이 유난히도 짧고 어둡게 느껴졌다. 스위스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초저녁 치고는 너무 어두워진 사위에 자동차 전조등만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내 속내를 눈치 채서일까. 시상식 일정으로 일행보다 먼저 한국으로 가야하는 나를 배웅해준다며 나온 미애 누나가 슬쩍 말을 걸어왔다. 희연 누나는 운전 중이니 말이다.

“네, 시상식 6시간 정도 전에 도착한다고 알고 있어요. 저 시상식 처음인데 너무 떨릴 것 같아요. 그래도 누나들은 시상식 많이 가보셨죠?”

“뭐, 내가 한때는 장난 아니었지.”

“어머! 나는 요즘도 장난 아닌데, 넌?”

“뭐야, 언니!”

한 시대를 풍미하였고 지금까지도 대여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누나들답게 가지고 있는 시상식 경력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청용이니, 백산이니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시상식 이름에 옆에 있던 나마저 머리가 아팠으니 말이다.

"청용 영화제.....“

“나도 청용은......”

곁에서 동거동락하다보니 실감이 안 났지만 저런 모습을 보니, 다시금 깨달았다. 누나들이 정말 대단한 이들이라는 걸 말이다.

겉으로는 대장부에 털털 그자체이지만 속은 그 누구보다 여린 미애 누나 그리고 반대로 겉은 부드럽고 유하지만, 속은 단단한 희연 누나.

연정 선생님과 자욱 선생님께서는 나이 문제도 있고 건강상 문제도 있어 아직까지 거리감이 조금 있지만, 희연 누나와 미애 누나는 정말 누나 같았다. 나이로 따지면 엄마, 이모 뻘이지만 말이다.

“사비로 많이 쓴 것 같은데! 누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으구 우리 지혁이.”

“많이 쓴 것도 아니고요. 저도 재밌어서요. 정 그러시면 한국에서 진짜 맛있는 밥 사주시면 되잖아요.”

“그래그래, 한국 가면 꼭 연락해야 된다? 맛있는 것 사줄게. 누나들이.”

“그래, 그래 배고플 때마다 연락해도 되니까. 알겠지?”

이제는 희미해진 엄마와의 기억이 다시금 새록새록 떠오를 정도로 여행기간 동안 희연 누나와 미애 누나가 잘해줬는지라, 나로서도 연락을 끊고 싶진 않았다.

[궁금하면 물어봐야지. 잊는다, 잊는다 해도 결국 못 잊는 건 미련 때문이야. 이별을 했다 해도 말이지. 그러니까, 만약 연락이 끊기지 않았다면 물어봐.]

[10분만 눈 딱 용기를 내봐. 그러면 그 결과는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일걸?]

오프더레코드인 상태에서 말을 나누었던 수많은 시간동안 많은 힘을 얻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차로 삼십여 분을 달렸을까. 어느새 공항에 도착한 나는 제법 능숙한 체크인 절차를 밟아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제작진의 배려로 취리히에서 인천까지는 대한항공 직항 편을 탈 수 있게 됐기에 나로서는 피로 걱정을 한 층 덜 수 있었다.

“출발 시간이 저녁 7시니까, 한국 도착하면 스위스 시간으로 6시 반, 그럼 한국 시간으로는 오후 1시 반쯤이겠네요. 도착시간이요.”

승무원에게 받은 비행기 표를 보여주며 조심히 가라는 뜻으로 손을 흔드니, 누나들이 나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간단다. 공항 측의 특별허가로 보딩 게이트까지 촬영 팀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나 뭐라나.

“어차피 오늘 저녁 내내 숙소에서 짐정리하고 쉬는 것 빼곤 할 일도 없는데, 우리 지혁이 마중해줘야지.”

나로서는 누나들도 내일 점심쯤에 이곳으로 와야 되기에 얼른 가서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 강했지만, 누나들의 의지를 꺽지 못했다. 내 카트를 앞장서서 끌며 게이트로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피곤하면 내일 오전에 늦잠이라도 자면 되니까, 얼른 가자, 지혁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게이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빨리 보딩을 하는 것이 누나들에게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딩 게이트 앞에 도착한 나는 충격적인 현실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요?”

“지금 낙뢰랑 우박, 천둥까지 죄다 주의보 떨어져서 방금 전부터 출발이건 도착이건 전부 지연이란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찬 보딩 게이트들 앞에서 지친 듯 의자며 땅바닥에 앉아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독일어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로 방송되는 공항 내 방송까지.

뭔가 일이 잘 못되었다는 생각에 서둘러 공항데스크로 갔다 온 영식 삼촌의 말에 일행은 정확한 상황파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혁아 시상식이 몇 시라고 했지? 6시라 했나?”

“7시라고 알고 있어요.”

시상식 같은 큰 행사는 시간에 딱 맞춰 가면 되는 학예회가 아니었다. 메이크업부터 의상협찬 그리고 무대가 있다면 그 무대 준비까지. 준비를 하면 할수록 끝이 없는게 시상식 준비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희연 누나, 미애 누나 그리고 영식 삼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정상적으로 이륙했어도 5~6시간 전에 인천에 도착할, 준비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지혁이 자칫 잘못하면 시상식에 불참하게 될 최악의 상황까지 나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일단 민재 형한테 전화해야겠다. 대준아! 너는 데스크 쪽으로 가서 계속 대기하고 있어라! 무슨 정보라도 나오면 바로 알려주고!”

“예, 형!”

예기치 못한 상황에 분주해진 아름다운 누나 스태프들이 공항 곳곳을 달려 다닐 그때 그 시각, 한국은 밤을 세운 편집 팀의 노력에 의해 아름다운 누나의 티져가 무사히 공개되었다. 나영식도 김대준도 모르는 영상들로 말이다.

*

TBN 공식 홈페이지 및 각종 포털사이트에 공개된 아름다운 누나 프로그램의 공식 티져는 업로드 되는 순간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당초 윤연정, 김자욱, 김희연, 이미애라는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여배우들과 가요계의 신성이자 그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강지혁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았던 프로그램인 만큼 대중들의 관심이 뜨거울 수밖에 없었는데,

안 그래도 관심이 깊던 프로그램의 2분짜리 티져가 공개되자, 대중들은 자연스럽게 이를 접했고 결과는 대박이었다.

새벽 시간에 공개되었음에도 공개된 지 30분 만에 조회 수 1백만 회를 돌파했기 때문이다.

출발 3시간 전에 포이보스 휴게실 소파에서 자고 있던 강지혁이 비행기 표를 받게 되는 과정부터 누나들의 속 얘기까지. 이 모든 것이 대중들의 관심을 이끌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쳤던 것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핫한 장면은 따로 있었다. 2분 티져 중에 무려 50초나 배당된 한 장면이 대중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것이다.

[연애를 하는 게 두렵다고?]

[뭐가 두려운데?]

[10년 동안 연습생 생활을 했는데, 첫사랑이랑 헤어지고 석 달 동안 완전 폐인처럼 지냈어요. 몸무게는 거의 20KG이상 찌고 머리는 장발에 수염도 안 깎고 뭐 그렇게 석 달 동안 지내서 많이 실망시켜드렸어요. 삼촌한테도 그렇고 같이 데뷔를 꿈꾸던 사람들한테 도요.]

[아...]

[흠...]

[뭔가, 데뷔를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첫사랑한테 차이고 나서 사랑도 잃고 삶은 엉망이 됐고 꿈도 사라져 버렸어요. 그래서 뭔가 버림받는 것에 대해서 너무 두려워요. 마찬가지로 그래서 연애를 시작하는 거가 아직 두렵고요.]

꽤나 술에 취한 듯 한 지혁과 나영식PD 그리고 막내작가로 잘 알려진 대주 작가의 술자리 대화가 주는 파장이 생각 외로 컸기 때문이다. 내용 자체는 별게 없었으나, 지혁 자체가 워낙 방송활동을 하지 않은 채 은둔했기에 이 같은 반응은 점점 더 크기를 불려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날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하는 줄 알았데.

내가 사랑한다 말할 땐 자신도 그런 줄 알았데.

사랑인 줄 몰랐데.

......

나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마치 영화처럼 갑자기 노래를 부르더니, 눈물을 흘리며 잠에 빠진 강지혁의 모습은 남녀를 불문하고 빠져들 만큼 깊은 공감을 자아냈으니 말이다.

“크으! 하루 종일 붙잡은 보람이 있구만?”

“PD님 지금 조회수 100만 찍었습니다! 새벽 3시인데도 조회 수가 장난 아닙니다!”

“PD님 이거 진짜 대박 조짐 아닌가요?”

프로그램 대박을 알리는 전조현상처럼, 각종 포털사이트에는 새벽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누나와 관련된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하루 종일 편집실에 갇혀있던 이들의 입에서 보람에 찬 미소가 맺혔다.

그때였다.

[따르릉, 따르릉]

스위스 취리히에서 발생한 예상 못한 상황이 한국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

공항에서 대기한지 3시간 반. 지나간 시간이 무색하게 스위스 취리히의 밤하늘은 여전히 천둥과 번개 그리고 우박으로 가득했다.

삼십분 전부터 몇몇 비행기들이 지연이 상태에서 결항 상태로 전환되자, 도미노처럼 이 같은 현상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하... 망했다.”

영식 삼촌의 고개 떨굼에 스태프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처음으로 참가할 시상식에 설레던 내 모습을 떠올린 것인지, 삼촌은 내 눈을 바라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에이, 삼촌 뭐가 걱정이에요. 아직 시간 남았잖아요. 희연 누나랑 미애 누나가 저 시상식 가라고 여기 면세점에서 비싼 옷까지 손수 코디해줬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그리고 설사 못 간다고 하더라도 시상식이 거기 한 군데인가요? 못 가면 다른데 가면 되지.”

정작 나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애초에 상에 탐이 나거나 방송 욕심이 있었다면, 그동안 회사 휴게실에서 잉여처럼 지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스케줄이 빡빡하긴 했는데, 내가 민재 형한테 KMA 지장 없게 해줄 테니까 꼭 좀 너 섭외해달라고 부탁했다. 미안하다 지혁아.”

내가 이번에 KMA를 나가겠다고 한 이유자체도 그동안 팬들에게 소홀히 했던 점을 반성하려는 점에서 시작한 것 인만큼, 이번에 시상식에 불참하게 된 것은 또 다른 시상식이나 방송활동으로 보답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영식 삼촌과 스태프들 입장에서는 그게 아닌가보다.

뭐야 이거, 당사자는 괜찮다는데 이거 왜들 이래? 덕분에 희연 누나랑 미애 누나한테 멋진 옷이랑 구두도 선물 받았고 같은 처지의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즉석 팬 사인회도 해줄 수 있었는데 말이지.

미친 듯이 공항을 뛰어다니며 관계자들을 귀찮게 한 탓인지, 스태프들의 행색은 마치 하루를 공항에서 노숙한 여행객처럼 누추했다. 제법 추운 날씨임에도 땀에 흠뻑 젖어있었으니 오죽할까.

안되겠다. 뭐라도 해야지.

*

우리 스태프들 뿐 만 아니라, 인근 게이트의 모든 이용객들 또한 지쳤는지 힘없이 바닥에 주저 앉아있었다. 게이트 앞에서 이용객들의 불만 사항을 쉴 새 없이 접수하던 승무원들도 지쳤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딱 하나.

노래였다.

아까 전에 게이트 데스크에서 사진도 찍고 사인도 받아간 대한항공 승무원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게이트에 위치한 마이크를 잠시 써도 되냐는 약간은 무례한 내 부탁을 승무원 분이 흔쾌히 들어주셨다.

자, 그럼 한번 시작해볼까.

[It's okay - B to V]

어깨가 무거워도

짊어진 무게를 떨쳐내기가

너무 어렵죠.

말해주고 싶어요.

목표가 멀게 느껴지면

잠시 쉬었다 가도 괜찮아요.

......

한국에 있을 때 가끔씩 들었던 B to V 선배들의 노래가 내 입을 통해 스위스 취리히 공항 34번 게이트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B to V 선배들의 It's okay를 부른 뒤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새 꽤나 많은 사람들이, 아니 모든 사람들이 내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사실 제가 7일 오후 7시에 올림픽 체조 경기장에서 코리아 뮤직 어워드에 참석할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스위스가 저를 놓아주지 않네요.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가 제게 집착하다니 너무 영광이네요.”

농담 섞인 멘트를 던지자, 곳곳에서 웃음소리와 환호성이 흘러나왔다. 이쪽 부근이 아시아 쪽으로 향하는 게이트다보니 아무래도 한국 분들이 많은가보다. 그 환호성이 꽤나 컸으니 말이다.

[ほんとうに. ほんとうですか.]

물론 다른 나라 사람으로 보이는 이들의 목소리도 들려왔지만.

“나영식 PD님을 비롯해서 저희 스태프들이 저 한국 보내줘야 한다고 3시간동안 한 번도 안 쉬고 돌아다니시느라 고생이 많으세요. 여러분도 많이 힘드시죠?”

이어진 내 말에 많은 분들이 호응해주셨다. 특히나, 자책감에 빠져 굳어져있던 영식 삼촌과 스태프 분들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려있었다.

그래서인지, 나 또한 힘을 얻어 멘트를 이어갔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이들의 시선에 긴장한 내 자신이 느껴졌지만 말이다.

“상을 받고 안 받고를 떠나서 저는 그동안 팬 여러분을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에 KMA 참석을 결정했는데요. 다른 이유도 아니고,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게 될 것 같은데 어쩌겠어요. 나영식 PD님과 스태프들이 더 이상 마음 쓰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팬 여러분을 찾아가지 못한 것은 지금 이곳 스위스에 계시는 팬 분들께 좋은 노래 들려드는 걸로 그리고 차후 잦은 방송활동으로 대신할게요.”

모두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노래가 지닌 가장 강력한 힘 중 하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쳐서 멍하니 바닥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빛났으니까.

“자, 그럼 첫 곡으로 들려드린 It's okay에 이어서 제가 다음으로 부를 노래는 이번 아름다운 누나를 촬영하면서 작사, 작곡한 고칠게라는 곡입니다. 비행기 기다리시는 동안 제 노래가 조금이나마 힘이 됐으면 좋겠네요.”

[고칠게]

요즘 들어 네 모습이 너무 낯설어.

어제, 오늘 전화도 한번 없었어.

어디 있어, 뭐하고 있어 물어보는 네 전화 기다렸어.

너무 낯선 네 모습 보며

내 사람이 맞는 것인지,

혹시 다른 사람이 생긴 것인지,

이제 내 곁이 아닌 다른 이의 곁에

우리 이별하는 거니.

......

토크 콘서트를 해본 경험이 힘을 발휘한 듯, 어느새 34번 게이트는 공연장이 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스마트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한국을 비롯한 각국에 퍼져나갔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부탁드립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