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4 2012 =========================================================================
“어? 지수 와써?”
평범한 비닐 봉투와 고풍스러워 보이는 종이 가방을 양 손에 든 채 귀가한 지수를, 마침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멤버들이 맞이했다.
오늘은 그녀들에게 있어 데뷔 전 마지막 휴식이라고 할 수 있는 날이었다. 다만, 지금 시간까지 밖에 있다 온 이는 지수뿐이었지만 말이다.
“언니, 어디 갔다 왔어요?”
“지수 뭐하다 왔어?”
해외국적 멤버들을 제외한 멤버들 전부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는지라, 그녀들의 지수에 대한 관심은 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수 또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긴 했다. 다만,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다, 숙소에 돌아와 또다시 나갔을 뿐.
이를 모르지 않은 멤버들이기에 그녀들은 지수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와 그녀의 오늘 하루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다.
“우와! 케이크랑 쿠키네?
“마싯게따! 지수야 이거 머거도 돼?”
하지만, 그런 그녀들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지수는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옷을 벗기 시작했다. 물론 가져온 봉투 속에 담겨 있던 디저트 거리들을 먹어도 되냐는 멤버들의 질문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채 말이다.
“우와! 이건 또 모야?”
“헐, 대박! 완전 예쁘다! 언니 이거 어디서 났어요?”
“이고 어디서 나쏘?”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이백 삼십 만원? 헐! 대박!”
추운 날씨임에도 짧은 치마를 입었던 지수가 치마와 스타킹을 벗을 때쯤, 멤버들은 좀 전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디저트들이 담겨있던 봉투와는 달리 매우 고급스러워 보이는 종이봉투 속에는 그녀들 모두가 탐낼 만한 크로스백이 담겨 있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크로스백에 달려있던 가격표에 적힌 숫자들은 이제 막 데뷔를 앞둔 그녀들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0이 달려있었는지라 이내 숙소의 거실은 소란스러움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들을 정말로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어, 언니!”
“언니 노... 노브라?”
“뭐?”
“지수가?”
물론, 여러 가지 옷을 껴입는 경우가 많은 겨울의 특성상 브라를 하지 않는 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브라를 하는 것은 그녀들을 포함한 여자들 전체가 귀찮아하는,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행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들을 정말로 놀라게 한 것은 바로 다른 누구도 아닌 지수가 노브라를 했다는 것이었다.
남다른 볼륨으로 인해 주변 이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싫어 항상 헐렁한 옷만을 입는 지수가 노브라를 한 채, 그것도 짧은 치마를 입은 채 저녁 늦게 귀가했다는 것은 그녀들에게 있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들의 의문을 풀어줄 지수는 어느새 욕실로 들어간 상태였다.
“우와! 이거 진짜, 진짜 마시써!”
“아! 미미 언니! 언니 혼자 다 먹으면 어떡해요!”
이내 한 쪽 구석에서 혼자 열심히 쿠키를 먹고 있던 미미의 말에 멤버들의 관심은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지만,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몇 명 멤버들의 시선은 그곳을 향해 있지 않았다.
좀 전 지수가 들어간 욕실로 향해있을 뿐.
*
“그러니까, 음원을 먼저 공개하자고요?”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본 민재 삼촌은 여전히 말랐고 잇몸 또한 선홍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민재삼촌과 간만에 만난 해후를 나누는 것도 잠시, 이내 이어진 본론에 나도 모르게 반문해버렸다.
“14곡이니까, 주마다 2곡씩 해서 총 7주간 차례대로 음원 공개를 하는 거야. 그리고 마지막 14곡이 다 발표된 시점에 음반도 정식으로 발매하고 말이야.”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정규 1집 때와는 달리, 조금은 복잡해 보이는 민재 삼촌의 제안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음반이 발매되면 음원 또한 자연스럽게 유통될 진데, 굳이 이걸 앞당겨 하는 이유와 효용을 모르겠으니 말이다.
그런 내 심사가 표정에 드러나서일까. 삼촌이 자세한 설명을 하려는 듯 내게로 몸을 가까이했다. 물론 나는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몸을 뒤로 뺐지만.
“팬 분들한테 선택지를 미리미리 주는 거지. 앨범을 구매할만한 가치가 있는 곡이다. 정성을 들여서 만들었다, 그러니 믿고 사 달라. 뭐 이런 거?”
“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번 1집 뽑았을 때처럼 너무 주먹구구식이 될 까 걱정이어서 그래. 삼촌이.”
“주먹구구식이라니요?”
“1집 때 기억 안나니? 재고 없어서 음반 공장 찾아다,”
“아!”
주먹구구식이었다는 말에 의아한 것도 잠시, 이어진 민재 삼촌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그때당시 앨범에 대한 엄청난 수요에 당황한 나머지, 음반 제작 공장이란 공장은 모조리 발품 팔아가며 수량을 조달해야했던 그때의 고생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삼촌이 보기엔 너 이번에도 무조건 백만 장은 넘어.”
“설마요.”
“아니다. 삼촌이 음악 생활 그리 오래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삼촌 감각에 이번 앨범도 대박 날 것 같다. 팬 분들의 믿음에 한 치 어긋남 없는 그런 웰 메이드 앨범이니까 말이야.”
설마요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는 했어도, 나 또한 이번 앨범에 기대하는 바가 제법 크다. 물론 이 같은 기대는 정규 1집이 초대박을 냈다는 것에 기인했지만 말이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말을 계속 듣다보니, 새삼 민재 삼촌에 대한 고마움이 느껴졌다. 기본적으로 포이보스에 소속된 이래, 민재 삼촌에게는 항상 고마움을 느꼈지만, 이번 경우와 같이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세심한 관리를 받을 때면 이점이 더욱 와 닿았으니 말이다.
“미리 음원 공개하면서 음반 선주문예약을 받을 거야. 그러면 수요예측도 가능하고 앨범 찍는데 시간도 벌수 있으니까 말이야. 지혁아, 어때? 괜찮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삼촌의 제안한 내용자체가 좋았을 뿐더러, 삼촌을 안 믿으면 이 세상에서 내가 믿을 사람은 얼마 되지도 않을 테니까.
“그런데, 지혁아 너 방송활동도 슬슬 하겠다는 말 아직 변함없는 거지? 그때 예능도 슬슬 해보겠다고...?”
“방송활동이요? 갑자기 그건 왜요? 네, 뭐 예능은 좀 무섭긴 해도...”
대충 얘기가 마무리 된 것 같아, 다시금 휴게실 소파에 누우려던 그때 삼촌의 입에서 뜻밖의 화제가 튀어나왔다. 그동안 음악 관련된 얘기를 주로 나눴기에 이런 종류의 대화는 그다지 나눠본 기억이 없었는지라, 나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호기심 수준의 의아함이지만.
“아, 아니. 그냥 뭐, 궁금해서?”
“팬 분들이 원하시니까, 저도 언제까지 안 나갈 수는 없겠죠. 좋은 프로그램 있으면 삼촌한테 소개해달라고 그때 말했던 것 같은,”
“그, 그렇지? 그래! 그럼 일단 앨범일은 삼촌이 하자는 대로 하는 거다? 내일 앨범 계약 사인할 테니까, 오전에 보자! 바이바이!”
갑작스럽게 방송 얘기를 꺼내더니, 미처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삼촌은 잽싸게 휴게실에서 모습을 감췄다. 마치 뭔가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나저나, 내일 오전에 여기서 또 보자는 건가? 이거 참, 뭐가 뭔지.
어쨌든 삼촌이 제안했던 것은 내가 보기에도 나름 좋아보였기에 걱정은 없었다. 뭐, 그걸 떠나서, 삼촌이 내게 해가 될 일은 제안하지 않았을 테니 나로서는 그저 믿을 수밖에.
그렇게 간만에 누워본 포이보스 휴게실 소파의 감촉을 느끼며, 본격적으로 한 숨 자볼까 싶던 그때였다.
주머니 속 핸드폰 진동에 문득 액정을 본 나는 그 순간 자리를 박찰 수밖에 없었다.
[유재연은 좋았겠다. 전 남친이 강지혁이라서 - 던킨 도너츠 청담점.]
봐서는 안 될 게 눈에 보였으니까.
*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익명의 문자를 보자마자 정신이 이미 나간 상태였으니까.
“어머, 진짜 오셨네요?”
던킨 도너츠 청담점이 서울에 있건 뉴욕에 있건 위치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작정 택시에 올라탔고 정신을 차린 지금 나는 던킨 도너츠 청담 점에 앉아있다 와 눈앞에서 생글생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가 익숙한 이라는 게 중요했다.
“역시나 재연 언니였네요? 대박!”
거울을 볼 수 없어 지금 내 표정이 어떨지 나로서는 알 방도가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결코 그 표정이라는 게 밝지는 않을 것이라는 거다.
“날 떠본 겁니까? 어째서...?”
볼 때마다 항상 웃는 얼굴에 흥 넘쳐보이던 소녀가 그 순간만큼은 두렵게 느껴졌다. 웃고 있는 얼굴 속에 무엇이 감추고 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뭐, 일단은 궁금해서 그런 거라고 해둘게요. 덕분에 확실해졌잖아요?”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 갑작스런 익명의 문자 그리고 눈앞에 존재감을 드러낸 익명의 존재부터 어째서 자신에게 그런 문자를 보낸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정신없이 머리를 휘감았다. 도저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갖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재연 언니가 강지혁 선배님 전 여친이라는게.”
도저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갖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와... 그런데 진짜 대박이네요. 뭐, 키 크고 다리 날씬하고 몸매 좀 되는 그런 건 이해되는 데 밤에는 여자로서 남자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여자 이건 솔직히 이해가 잘 안됐거든요? 애교는 그렇다 쳐도요.”
“다희 씨, 지금 도대체 저와 뭘 하자는,”
답변을 기대하지 않는 일방적인 말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마치 추리소설의 탐정이 범인을 지목할 때 자신의 추리를 청중에게 풀어내듯 그녀는 자신감에 찬 듯 했다. 이 자리에 온 순간부터 답은 이미 정해졌고 이로 인해 그녀 자신의 추리가 맞았다는 것을 증명 받았을 테니까.
“재연 언니 그런 쪽으로는 아예 관심 없던 것 같던데, 밤에 여자로서 남자를 기쁘게 해줄 수 있다는 게 제가 상상하는 그거 맞죠? 헐, 대박. 재연 언니도 선배님도 응큼해요! 그땐 나이도 어렸을 텐데!”
“그만!”
JS 사옥 바로 앞에 있는 곳 인만큼 매장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런 곳 인만큼 그녀의 발언은 위험했다. 알려져서도 알리고 싶지도 않은 사실이 까발려진 것은 그녀 하나로 족했으니까.
“아, 아차! 실수!”
다행인 것은 맞은편에 앉아있던 그녀 또한 이를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적어도 마냥 이 사실을 떠벌리고 싶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목소리 크기를 확연히 줄였으니까.
“그냥 궁금했어요. 털털하고 활발한 재연 언니가 어째서 지혁 선배님과 관련된 얘기가 들려올 때면 얼굴이 굳어지는지, 나정 언니랑 지수 언니와 다르게 재연 언니는 어째서 지혁 선배님을 초면인 듯 대하는 지가요. 뭐 나정 언니는 초밥 옮겨줄 때 빼고는 선배님을 피하는 것 같긴 하지만요.
생각해보면 재연이와 관련해서 나를 곤경에 빠뜨린 상황들에는 모두 그녀가 관련되어 있었다. 그때는 그녀의 행동이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그녀의 행동은 천진난만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그때의 생각이 안일했음을 깨달았다.
그 모든 상황자체가 자신의 추리를 완성시키려는 그녀의 그물이었으며 나는 그 그물에 갇힌 줄도 모르고 파닥거리는 물고기였음을 말이다.
“게다가 어제 재연언니가 지수언니를 보는 눈빛이,”
“지수가 여기서 왜 나옵니까. 게다가, 하...”
“어? 지수 언니는 또? 아하! 지혁 선배님은 지수 언니는 모르는구나. 흠... 그렇구나.”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할지 잘 모르겠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다가온 지금 이 상황이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워보였으니까. 아니 수습해보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 나는 멘붕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아셨으니 어쩔 수 없지만, 지금 알고 있는 이 사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주도권을 줄 생각이 없는지 아니면 아직 자신의 궁금증이 다 풀리지 않은 것인지 추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근데 진짜 궁금한 게 뭔지 알아요? 방치해도 나만 바라보고 있어줄 여자가 이상형이어서 재연 언니랑 사겼는데, 왜 차이셨어요? 방치를 너무, 너무, 너무 하셨어요? 아니면 아! 혹시 바람...? 아닌데 노래 가사로 봐서 바람은 아닌 듯한데.”
“하...”
도저히 대화가 안됐다. 간신히 정신의 끈을 붙잡고 입을 열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혼란뿐이었으니까.
“저 사실 흥이 많긴 해도, 말이 많지도 애교가 많지도 않아요. 낯도 조금 가리는 편이고요. 걱정 마세요. 아무한테도 말 안할게요. 저도 재연 언니랑 멤버들이 곤란해지는 거 싫거든요. 단지, 오늘은 호기심 많은 여고생의 발칙한 장난? 그 정도로,”
“다희 씨!”
“어? 언니!”
“다희야?”
무엇이 그녀의 진심일지, 그녀의 진짜 의도는 무엇일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말을 믿어야할지, 아무런 확신도 결론도 내지 못했다. 다만 진심이길 바라며 동글동글한 그녀의 눈을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잘 짜여진 연극처럼 나와 그녀 앞에 지수를 포함한 Trendy 멤버들이 등장했으니까.
*
[잠깐 삼촌 보러 왔다가 뭐 좀 간단히 먹으려고 들어왔는데, 우연히 마주쳤어.]
[응, 맞아! 나 너무 배고픈데, 먹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커피라도 마시려고 들어왔는데, 선배님이 계셨어.]
유난히도 수상쩍다는 듯 나와 다희를 바라보던 지수와 나정의 의심을 풀고자 입을 열기는 했으나,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다희 양과의 대화가 주는 충격은 컸으니까.
대충 오해를 풀자마자, 나는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냐는 듯한 시선들을 받았지만, 없는 할 일을 지어내면서까지 자리를 벗어났다. 그때 나에게 윙크를 하며 손을 흔든 다희 양을 보며 나는 허탈함을 금치 못했다.
단순 장난질인지 아니면 원하는 게 따로 있는 것인지. 확실한 게 없음에 그저 고개를 내저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녀의 의도를 확실히 알기 전까지는 그녀의 귀여운 인상에 밝은 미소를 보더라도 마냥 웃지는 못할 거라는 걸 말이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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