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4 2012 =========================================================================
“선배님 수고하셨습니다. 핸드폰 가져가시면 됩니다.”
“사인 감사합니다.”
“그래! 남은 군 생활 동안 몸 조심해라! 괜히 그 미친, 아니 그 중대장한테 찍혀서 고생하지 말고!”
하, 드디어 끝났다. 빌어먹을 예비군. 2박 3일 동안 도수체조를 한 것만으로도 미치겠는데, 비 오는 날 판초우의를 입히다니! 판초우의를 입히고 사격을 시키다니!
융통성 없는 지휘관 덕에 현역 애들만 고생을 진탕할 수밖에 없었다. 예비군들이 지휘관한테 쌓인 불만을 모조리 현역 애들한테 풀었으니 말이다.
하, 다음해에는 다른 곳으로 전출했겠지? 뭔가 헛된 바람을 품어보며 위병소를 빠져나가려던 그때였다.
간만에 잡아본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려 퍼진 것은 말이다.
*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TBN 예능프로그램 동네형님 세트장이 활기참으로 가득 찼다.
그동안 남자게스트만 연달아 나오던 지난 촬영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여자 게스트 그것도 미모로 유명한 2인조 여성 듀오 다빈치가 나왔으니 말이다.
“어? 그럼 민경이는 요즘 눈에 들어오는 사람 있어? 뭐, 혜리처럼 또 나?”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 가운데, 좀 전 이혜리의 선택을 받은 김희현이 이 기세를 몰아 또다시 선택을 받아보려는 듯 또 다른 멤버 김민경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이혜리의 선택을 못 받은 다른 출연진들이 각자 김민경에게 어필을 하기 시작했다.
두 명 다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다빈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미모담당은 김민경이었으니 말이다.
“나, 나는 요즘 강지혁 씨가 눈에 들어오더라고.”
하지만 그런 출연진들의 기대와는 달리, 김민경의 대답은 다른 이를 가리켰다.
“와! 5살 연하! 무려 5살 연하?”
“와! 장운이 실망하는 것 봐! 대박!”
몸매면 몸매, 키면 키, 얼굴이면 얼굴. 남자들이 원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갖춘 김민경의 대답에 출연진들이 눈에 띄게 실망하는 기색을 내보였다. 물론, 금세 정신을 차린 뒤 이를 예능화 시켰지만 말이다.
“뭐야, 장운이랑 경운이는 완전 이용만 당한거네? 오늘? 하하하하!”
“장운이형 어디가? 하하하하하! 집에 가면 안 돼!”
촬영하는 내내 김민경이 서장운, 민경운 두 명과 썸을 타는 듯 한 컨셉으로 방송을 이어갔던지라, 멤버들의 놀림은 김민경에게로 국한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 나 강지혁 전화번호 있는데!”
김희현이 또다시 폭탄 같은 멘트를 던진 것은 말이다.
“어?”
“와! 방금 민경이 반응 봤어? 와 대박이네!”
“뭐야, 진짜 좋아하나보네! 와... 장운 형 갖고 놀았어!”
그런 김희현의 발언에 순간적으로 몸을 앞으로 내민 김민경과 또다시 이를 두고 놀리기 시작하는 멤버들의 행동에 촬영장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뭐야, 희현이 강지혁이랑도 친해? 뭐야, 애는 도대체?”
“너 무슨 몸이 서른여섯 개냐?
“나 지혁이랑 친해! 완전 친하지!”
요즘 한창 돌풍을 일으키고 있지만, 이렇다 할 방송활동을 하지 않는 강지혁은 모든 방송사들의 섭외 1순위였다. 그것이 예능이든 음악방송이든지 간에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강지혁의 번호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친분까지 있다는 김희현의 말에 장내의 분위기는 부러움과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물론, 김희현이 연예계 마당발로 유명하다지만, 방송활동이라고 해봤자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게 출현한 강지혁과 친분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출연진을 비롯해 제작진들까지 기대에 찬 눈빛을 자신에게 보내자, 김희현이 매니저를 불러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헐, 대박! 진짜 있나봐? 진짜 친해?”
“오늘 희현이 한 건 하나요!”
“와... 민경이 눈빛 봐봐.”
주변 이들의 관심이 꽤나 드높자, 김희현은 통화버튼 누르기를 주저할 수가 없었다. 유난히도 손이 떨려왔지만 말이다.
[띠이이, 띠이이, 띠이이]
이렇다 할 컬러링도 없는 무미건조한 통화음이 울려 퍼지자, 촬영장은 언제 시끄러웠다는 듯 고요해졌다.
[딸각]
이내 들려오는 연결됐다는 소리에 김희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 지혁아! 형이야!”
하지만, 그를 비롯한 촬영장에 있던 전부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단 한마디뿐이었다.
“누구신데요?”
*
“아! 죄송합니다. 선배님. 저번에 번호 드렸었는데, 문자를 안주셔서요. 죄송합니다. 선배님.”
위병소를 막 나오려고 할 때쯤 걸려오는 전화를 받은 게 문제였다. 아니,
[지, 지혁아! 형이야!]
“누구신데요?”
사람이 번호 달라고 할 땐 언제고 자기 번호를 안주면 내가 어떻게 알아봐? 그때가 언젠데?
어쨌든, 걸려온 전화를 받았고 그 상대방이 선배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사과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시끄러운지 모르겠다. 어디서 전화하길래 이렇게 시끄러워?
[혹시, 희현 씨랑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가요?]
하지만, 이내 들려오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 그리고 연락 한번 없던 선배의 전화와 맞물리는 상황은 단 하나 뿐이었으니까.
이내 전화 속 바뀐 목소리의 주인공이 선배가수인 민경운 씨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인사를 드리고 나자, 본격적인 질문이 쏟아져왔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전화를 계속 받아야만 하는 이유 같은 거 말이다. 하.
“저번에 제가 처음 음악방송 나갔을 때 번호 달라고 하셔서요. 그래서 번호 드렸습니다.”
[그게 끝인가요?]
“네?”
[뭐, 술을 마신다거나 밥을 마신다거나, 야! 김희현 가만있어봐 일단!]
“예... 그때 번호 드린 후로 처음 연락 주셔서요. 저는 번호를 모르고 있었...”
번호를 모르는데 무슨 밥이고 술타령인지 모르겠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전화를 끊을 수도 없었다. 딱 봐도 방송인 게 분명하니 말이다.
[지금 다빈치 분들이랑 같이 촬영을 하고 있는데요. 혹시 아시나요?]
빙고! 역시나.
[다빈치 분들 노래 한 소절 부탁해드려도 될까요? 아 혹시, 모르시거나 그러신 건?]
“아, 그게 아니라... 지금 제가 있는 곳이...”
[에이, 변명!]
그나저나, 이런 걸 몰이라고 하는 걸까? 아무리 예능이라고는 하지만 꽤나 무례하게 느껴졌다. 내가 예능을 몰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물며, 지금 내가 실내에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 그게 아니라...”
[대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단! 결! 할 수 있습니다!]
[근무 중 이상무!]
“제, 제가 지금 위병소 앞이라서요... 예, 예비군...”
때마침 대대장이 부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설명하는 데 꽤나 큰 힘 쏟을 뻔했다. 어휴.
[아파도 사랑하니까 - 다빈치]
......
내 마음을 왜 이렇게 모르니
정말 알다가도 모르는 네 마음을
도대체 헤아릴 수 없어
너는 내 애인이니까 네가 내 연인이니까
내가 다 미안해 내가 다 이해해 떠나지 마
하루 종일 연락 안 된다고
술 좀 그만 마시라고
귀찮게 네가 싫어하는 말도 하지 않을게
아파도 사랑하니까
......
물론 실제로 내가 다빈치를 모른다거나 그러지는 않았기에, 서둘러 대기 중이던 석현 형의 차에 올라타자마자 노래를 부르긴 불렀다. 하, 내가 진짜 다빈치어서 부른다.
[지혁아 고맙다! 내가 꼭 비싼 걸로 밥 살게!]
비싼 걸로 밥 산다는 말을 후회하게 해드리죠. 희현 선배.
그렇게 길었던 전화를 끊고 서둘러 야상을 벗어던졌다. 하, 이놈의 짬 내.
*
“오늘 치맥 한 잔?”
“오늘? 콜”
“누나는?”
“나도 콜!”
언제나처럼 회사 로비 겸 휴게실에서 우리들은 각자 소파 한 개씩 차지한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다른 방송활동이 없기에 할 일이 곡 쓰거나 노래 부르는 거 밖에 없는데 정작 얼굴은 팔릴 대로 팔려서 밖에도 못나가니 말이다.
뭐, 급식 넘버원은 급식 먹으로 부산 내려갔고 급식 넘버투는 마찬가지로 급식 문제 때문에 잠시 미국에 갔기에 결과적으로 회사에는 수아 누나와 나, 승현이 밖에 없었다.
근데 다른 삼촌들은 원래부터 회사에 잘 안 나왔으니 그렇다 쳐도 민재 삼촌은 요새 뭐하는 데 이렇게 얼굴보기가 힘들지?
“누나, 요즘 민재 삼촌 얼굴 봤어?”
“응? 글쎄. 통 못 본 것 같은데?
“나도 저번 주에 나 녹음 첫날 때 빼고는 못 본 것 같은데? 승현아 넌?”
“난 한 달은 된 것 같은데?”
흠... 이거 우리한테 너무 무관심한 것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뭔가 잘못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 우리 아이돌 아니지?”
“으, 응?”
확실히 그동안 잘 못 생각하고 있던 것 같다.
“막말로 우리가 밥상 차려주면 맛있게 먹을 궁리만 하는 아이돌은 아니잖아? 승현이 너도 아이돌 할 거였으면 YH나 JS 갔을 거고.”
“나야 형이랑 급식들이랑 같이 버스킹도 가고 그러 길래 여기러 왔지. 민재 삼촌도 좋고 계속해서 음악하고 싶었으니까.”
그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맛있게 먹을 자신 있으면 밥상도 스스로 차릴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니겠어?”
그게 아이돌과 비 아이돌의 차이일 테니까.
“우리가 하겠다고 해서 조금 힘들겠다 싶으면 도와주는 게 민재 삼촌이랑 회사에서 하는 일인 것 같아. 도와주겠다고 무대를 마련한 뒤 우리를 하게끔 만드는 게 민재 삼촌이랑 회사에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꺼낸 화두에 수아 누나랑 승현이도 마찬가지로 뭔가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거, 이거 안 되겠다.
“승현아 만약 무대 나간다고 하면 이거는 무조건 부르고 싶다 하는 거 네 다섯 곡 정도만 골라봐. 자작곡이든 뭐든 간에.”
“어, 어? 지금?”
“그럼 지금부터 해야지, 뭐 따로 할 거 있어? 누나도 마찬 가지고.”
“나, 나도?”
“요즘 일거리가 없어서 삼촌이 심심해하는 것 같으니까, 일거리 좀 만들어주자. 뭐, 누워서 천장이나 볼 사람은 빠지고.”
누워서 천장이나 보고 있을 거냐는 나의 말에 수아 누나는 물론 이고 머뭇거리던 승현조차도
핸드폰과 작곡 노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럼 나도 한번 골라볼까?
*
[OFFICIAL ; 포이보스 뮤직 정강이 토크 콘서트 EP 1. 학식단!]
[정강이] : 정 승현(20), 강 지혁(22), 이 수아(26)
[출입가능] : 무조건 솔로 (삼남매 모두가 솔로이므로 커플은 출입불가!)
학식 먹을 만한 나이 (막내 정승현(20)부터 맏이 이수아(26)까지!)
[일시] : 곧
[참가방법] : 공연 며칠 전 깜짝 공지
[초대가수] : 아직 미정.
-안녕하세요. 포이보스뮤직 소속 뮤지션 정강이입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데 나만 엄청 외로운 계절이 다가 왔어요 ...... 팬 여러분들을 위한 토크 콘서트를 구상하게 됐습니다. ...... 대관부터 티켓발매 그리고 공연 구상까지 모두 저희 삼남매가 직접 도맡아하는 만큼 토크 콘서트는 3~40명 정도의 소규모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해주세요!
[PS]
-민재삼촌 미안해요!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
-급식이들아 급식 잘 먹고 있니? 우린 콘서트 공연할거야, 부럽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나 엄청 즉흥적이고 추진력 짱이라는 걸.
“이거 진짜 이렇게 올려도 돼?”
“저번에 말도 안하고 신촌 버스킹 갈 때 민재 삼촌이 그랬어. 하기 전에 말만 하면 된다고.”
정승현 너 말로만 그러지 마라. 얼굴은 그리 밝으면서 말이야. 너 학교 다닐 때 장난 좀 쳤구나?
“진짜?”
“일단 공지만 올려놓는 건데 뭘. 크크크크크”
“너무 일 크게 벌리는 거 아냐?”
“누나 내가 토크 콘서트 비슷한 거 해봤는데 진짜 괜찮은 것 같아. 함 해보자! 스케쥴도 없는데 뭐가 걱정이야?”
수아 누나의 염려마저도 단호히 물리친 뒤 나는 엔터키를 상큼하게 눌러줬다.
하, 뿌듯하다.
“일단 대관부터 알아보자”
자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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