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1 2012 =========================================================================
“우와! 삼촌 이 여자가수 목소리 엄청 좋은데요? 랩 하시는 분도 좋고.”
삼촌이 건네준 파일을 재생시킨 내 귀에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듣는 순간 나는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봄 향기]
차디찬 겨울이 지나고
어느새 너와 내가 좋아하는 봄이 왔어
하지만 도저히 말 못하겠어.
내 손에 남은 너의 봄 향기가 날 버벅이게 만들어.
네 눈을 바라볼 수 없어서
오늘도 난 말하지 못했어.
나는 언제라도 기다리고 있어.
오늘은 말할까.
꽃구경 같이 가자는 너의 말.
나는 오늘도 설레기 시작했어.
바보야 말 좀 해봐.
네 속마음 이미 알고 있어.
네 모습과 행동 이미 나를 떨리게 하고 있어.
봄 향기 가득한 오늘 듣고 싶어.
너의 고백을.
......
내가 남을 위해 처음으로 써준 곡이 내 예상보다 더한 퀄리티로 내게 되돌아왔을 때의 기분. 일종의 감동마저 느껴졌기에 나는 깨달았다. 작곡가, 작사가들은 직접 자신들이 만든 곡을 부르지 않음에도 이런 식의 희열을 느끼구나 라고 말이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것 같아요. 삼촌!”
완성된 노래의 퀄리티는 이렇게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내가 기대한 것에서 플러스 알파, 베타, 감마가 된 정도였다. 그 정도로 내 마음에 쏙 든 노래가 되어버렸으니,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을 것이라는 확신 또한 생겼다.
그렇게 봄 향기에 대해서 얘기하던 삼촌은 내가 만족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뿌듯한 얼굴로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런 삼촌의 모습에 나 또한 고마움이 더욱 느껴졌고 말이다.
“드라마 OST라 별다른 방송활동은 없을 거고, 또 남자 랩퍼가 이 곡을 끝으로 군대를 간다네? 뭐 지금쯤은 훈련소에 있겠네. 여튼 그 여자가수 쪽 소속사 대표가 너를 한번 보고 싶단다. 좋은 곡 줘서 고맙다고.”
“그래요? 저는 상관없어요. 저도 제가 만든 곡이 많이 사랑받게 되면 좋거든요.”
“그래, 그럼 그쪽에 연락해서 날짜 잡으마. 어차피 넌 스케줄 없으니까, 언제든 오케이?”
“얍!”
갑작스런 식사제안을 받았지만,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촌이 먼저 말을 안 해줬다면, 도리어 내가 먼저 제안하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 후로도 봄 향기를 비롯해 차후 앨범 발매계획 그리고 방송생각에 관해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눈 뒤 삼촌이 작업실에서 나가자, 나는 다시금 내가 만든 곡을 재생시켰다.
어느새 너와 내가 좋아하는 봄이 왔어.
크,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기똥차다. 진짜.
그나저나, 이름이 뭐라 했지? 우나? 뭐였더라. 나는 서둘러 폰을 꺼냈다.
물론 아이돌이니 매우 예쁠 것이다 라는 기대 때문에 검색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 노래를 잘 불러준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 검색해보려는 것이다. 진짜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너무나도 빨리.
*
[어떻게 하면 그렇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다리가 기니.
널 보면 미치겠어.
너의 그 다리가 날 미치게 만들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섹시하니.
널 보면 미치겠어.
너의 쓰리 사이즈가 날 미치게 만들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완벽하니?
......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개사를 전적으로 맡긴 것은 나였지만 말이다. 나 이런 노래를 만든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노래는 180도 달라져있었다. 물론 그녀 몸매가 꽝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씁쓸하다.
그래도 삼촌은 괜히 개사를 한 것이 아닌 듯 거의 신들린 듯한 무대를 선보였다. 진짜 무대에서 정신 줄 놓은 것 같은?
삼촌이 연습생들한테 누누이 강조하고 또 좋아하는 무대를 본인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
그런 점 덕에, 집 떠난 자식 쳐다보는 듯 한 씁쓸함이 점차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자식은커녕 결혼도 못한 놈 주제에.)
여튼 지금 나는 케이팝 싱어라는 프로그램을 방청하고 있다. 포이보스 뮤직소속 전용 좌석에서 크리스랑 수아와 함께 말이다.
지금 내가 포이보스 식구이기도 하거니와, 내 노래의 첫 무대를 보고 싶기도 했다. 평소 방송 출연을 하지 않던 나의 갑작스런 부탁에 민재삼촌과 제작진이 환호했다는 것은 비밀이지만.
어느새 무대는 끝을 맺었다. 수많은 박수와 함께 말이다.
심지어 케이 팝 싱어에서 종종 재성 삼촌을 대놓고 디스 하던 양연혁 대표님도
"박재성 씨 신곡은 오늘 아침 뮤직비디오로 접했다. 그리고 메시지를 보냈다. '네가 지난 몇 년간 낸 곡 중에 제일 좋은 것 같다'고. 이건 내 개인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다."
"사운드와 안무가 세련됐다"
"대중들은 호불호가 있겠지만 진심으로 멋있는 무대라고 생각 한다"
나름의 극찬을 해준 터라, 나 또한 절로 뿌듯했다. 이렇게 노래를 잘 소화해준 재성삼촌에게는 고마움을 느꼈고 말이다.
그나저나, 오늘이 케이 팝 싱어 결승전이라고 했나?
이번에도 저번 시즌처럼 누군가가 우리 소속사의 식구가 되는 것일까 라는 호기심에 나 또한 자리를 지켰다.
포이보스 소속인 주제에, 할 일 없어 매일 소파에 드러누워 천장만 쳐다보고 있는 주제에 재방송으로 세 네 번 본 게 전부이지만 말이다. 도대체 너란 놈은 매일 TV 붙잡고 누워있으면서 뭘 보는 거니.
어찌됐건 크리스 김과 권수아. 톡톡 튀는 동생들에 이어 또 다른 식구가 들어온다면, 회사 분위기가 훨씬 살게 될 거라 확신한다.
상대적으로 JS, SH보다 회사 규모나 지향하는 음악면에서 큰 차이가 있는 우리 회사지만 포이보스는 포이보스 만의 길이 있는 거니까.
물론 신촌 버스킹 사건 이후, 요즘 들어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는 지 하루 종일 회사에 있어도 코빼기도 안 보이는 내 양쪽 녀석들에게 삐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 회사에서 할 일 없는 뮤지션은 나 혼자라는 사실에 우울해져서 그런 것 또한 절대, 절대 아니다.
나는 단지, 새로운 음악동료를 맞이하고 싶었을 뿐이다.
*
“자, 곧 있으면 결승자가 가려지는 케이팝 싱어 4 파이널! 그렇다면 잠시 각 소속사를 어필하는 시간을 가져볼까요?”
갑작스런 MC의 질문타임이 시작됐다. 뭐, 조금 뜬금없어도 이해 못할 진행은 아니었다. 소속사 입장에서 보자면 어쨌든 좋은 원석을 영입해야했고 또한 반대로 좋은 원석은 값진 보석이 되기 위해 선택을 해야만 했으니까.
“저희 회사 밥 맛있고요! 시설도 엄청 좋아요!”
“수진! 수진! 수진!”
각 소속사 선배가수 자리에 앉아있던 이들의 어필이 시작되었고 어느새 우리 포이보스의 차례가 되었다.
“저, 저도 케이팝 싱어 열혈 시청자인데요.”
대표로 내가 말하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살짝 떨어버렸다. 물론 거짓말을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방송에 미숙한 것일 뿐.
“사실 저희 회사가 규모도 적고 댄스 연습할 때 2명 이상은 한꺼번에 연습도 못해요. 그리고 회사 앞 김밥천 아, 이거 말하면 안 되나요? 음, 여튼 저희 회사 식당은 현관문에서 10M 떨어진 김밥헤븐이에요.”
시설 면에서나 규모 면에서 우리 회사는 딸릴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딱히 자랑할 만한 게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내 발언에 장내는 웃음보가 터졌고 민재삼촌은 테이블에 엎드려 버렸고 말이다.
“그냥 같이 심심하면 버스킹도 가고 그래주실 분이 와주시면 좋겠지만. 뭐 그렇지 않더라도 평생 음악이라는 길을 같이 걸어가 주실 분이 오셨으면 좋겠어요. 혼자 걸으면 많이 외롭잖아요? 음악이라는 게.”
그냥 마음가는대로 말해버렸다. 괜히 분위기 깨는 것 같아 찔리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혁아 삼촌은 네가 맘에 든다. 삼촌 회사가 비록 재성이 회사에 비해서 규모 면에서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모인만큼 네가 걷는 길이 외롭지는 않게 해줄 수 있어.]
내게 제안을 건넸던 민재 삼촌 말마따나, 우리 회사가 원석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 길이 외롭지 않게 해줄 동반자가 되어주겠다는 것.
숙연한 분위기에 내가 너무 과도하게 진지를 빨았나 싶어, 슬쩍 심사위원석을 보니 민재 삼촌이 잘했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됐다. 민재 삼촌이 됐다고 하니 눈치 볼 필요 없이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그런 내 모습에 MC가 재치 있게 진행을 시작했고 이내 분위기는 다시금 뜨겁게 달궈졌다.
자, 그럼 결승 무대를 구경해 볼까나.
*
안되겠다. 속이 너무 쓰려서 말이다.
수많은 이슈를 자아냈던 케이 팝 싱어가 끝나고 우리 포이보스에 새로운 식구가 생겼다.
바로 그 새로운 식구는 김수아 누나와 결승전 무대에서 봤던 정승현이었다.
드디어 급식들에게서 벗어나, 소주한잔 들이킬 수 있는 이들이 들어온 것이다.
물론 기존에도 술을 마실 수 있는 삼촌들은 넘쳤다.
하지만, 우리 회사가 기본적으로 워낙 연령 양극화가 심하다보니 그동안 내 또래라고는 급식 2명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삼촌들과 함께한 환영회 후 며칠 뒤 나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 우리끼리의 술자리를 마련했다.
물론 급식들은 불만에 찬 얼굴로 사이다를 들이켜야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속에 있는 얘기도 어느 정도 꺼내고 음악 얘기도 어느 정도 하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술을 물처럼 먹었나보다. 이렇게 속이 뒤집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나저나 아직도 못 일어난 것인지 카톡 답장이 없는 승현이는 그렇다 쳐도, 수아 누나는 괴물인가보다. 셋 다 정신 줄 놓고 마셔댔는지라 크리스랑 권수아 아니었으면 집에도 못 갔을 텐데 수아 누나만 멀쩡히 녹음실에서 혼자 작업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혁아! 준비다 됐지? 이거부터 마셔라. 그리고 나머지 한 병은 수아 가져다주면 되는 거지?
나 또한 선약이 있지 않았다면 회사에 나오지도 못 했을 거다.
나도 멍청한 게 선약이 잡혀있는 줄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 마셨다니. 조금 내 자신이 한심해졌다.
“지혁아 고마워~”
녹음실에서 흘러나온 수아 누나의 목소리에 간단히 응해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그럼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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