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8 2012 =========================================================================
정아 씨와의 무릎베게 씬.
하린 씨와 희연 씨의 가운데서 그녀들의 손을 잡고 걷는 씬.
SE 씨를 업는 씬.
연지 씨와의 흡족한 촬영을 시작으로 Stylish 선배들과의 사진 작업은 환상적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나를 떨리게 만들었던 첫 번째 연지 씨와의 씬처럼 수위가 센 씬은 없었지만, 그래도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여자 아이돌 그룹과 같이 화보를 찍는 다는 것은 혈기왕성한 남자로서는 매우 영광된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나 날씨였다.
“이거 어떡하죠? 날씨가 이 모양이라 오늘 야외촬영은 힘들 것 같네. 나중에 서울 근교에서라도 따로 자리를 마련해야 될 것 같은데. 어휴... 다들 소속사에 직접 협조 구할 테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수고했어요, 다들!”
번개는 줄어들었다지만, 밤새 쏟아지던 폭우는 더욱더 심해졌는지라 야외촬영은 단번에 취소되고 말았다. 덕분에, 나와 Stylish 선배들 그리고 그쪽 매니저와 코디는 졸지에 제주도에 갇혀 버렸고 말이다
뭐, 어차피 휴가삼아 내려온 나로서는 딱히 상관은 없었지만, 그녀들은 아닌가보다.
“예, 예. 사장님 지금 항공편이고 배편이고 다 끊겨서 오늘내로는 절대 못 갈 것 같습니다. 네, 네. 기상청 날씨 보니까 앞으로 적어도 이틀은 이 상태로... 네, 네. 알겠습니다. 애들 숙소 빨리 잡고 제가 공항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예, 예. 상황보고 비행기 뜨면 바로 애들 올려 보내겠습니다.”
하긴, 나와 달리 그녀들의 이번 제주도 방문은 순수 스케줄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숙소를 제대로 잡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비록 극 성수기인 7월, 8월은 아니지만 요즘 한창 중국인들이 몰려들고 있는 제주도이니 말이다. 뭐, 대충 모텔이나 민박집 아니면 최고급 호텔에서 잘 거라면 상관없겠지만.
“저기, 차는 여기다 주차하시고요. 여기서부터 저 오솔길로 10분 정도 걸어가야 되요.”
뭔가, 나무가 우거진 으슥한 오솔길로 걸어가야 된다는 내 말을 듣고는 겁을 먹은 듯하다. 아니, 뭐 이해는 한다만 너무 대놓고 티를 내니 나로서는 서러울 지경이다. 이 사람들이, 내가 뭔 짓을 하려고 했으면 아까 연지 씨랑 화보 찍을 때. 크흠...
하, 상황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저희 애들이 낯을 너무 심하게 가려서요. 죄송합니다.]
촬영 중간, 중간에 쉴 때마다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준 Stylish 선배들의 매니저 덕분에 그녀들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었는지라, 나 또한 살갑게 그를 대했다.
[아! 그러시구나. 어쩐지 혼자 오셔서 조금 의아했습니다.]
게다가 내가 촬영장에 온 순간부터 나를 주시했었는지 내가 혼자 온 이유에 대해서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이어가는 매니저 덕분에 쉬는 시간에 혼자 어색하게 앉아 휴대폰만 보지 않아도 되어 나로서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지혁 씨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저희 애들 숙소 잡아야 되는데, 지혁 씨도 같이 잡아 드릴까요?]
뭔가, 나까지 챙겨주려는 듯한 추임새에 당혹스러웠지만 말이다.
뭐, 자기 딴에는 혼자 있는 내가 걱정 되서 그런 거 일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그의 행동이 괜한 걱정일 뿐이었다.
숙소를 잡는 게 잘 되지 않는 듯 인상을 찌뿌리던 그와는 달리, 난 이미 지낼 곳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 뒤로 어떻게 지금 상황까지 오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예? 방 다 찼다고요? 네, 네 알겠습니다.]
[애들아 아무리 그래도 모텔은 조금 그렇겠지?]
[아! 거기도 방 다 찼다고요? 네, 알겠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지금 이렇게 됐을 뿐.
“아! 그럼 저희 애들 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지혁 씨.”
뭔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나를 보며 내 뒤를 따라오던 매니저분이 별장의 모습을 이리저리 확인하더니 이내 다시금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뭐, 지금 생각해보니 나를 걱정해서 숙소를 챙겨주려 했던 게 아닌 것 같다. 자기가 공항에서 대기해야하는 만큼 그나마 안면이 있는 내게 남은 일행을 부탁하려 했던 것 같으니 말이다.
하, 어찌됐든 나와 멀찌감치 떨어져서 두리번거리는 Stylish 선배들과 코디 1명을 데리고 서둘러 별장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오솔길을 걸어오느라 비를 홀딱 맞았으니 말이다.
“3층 다락방이랑 2층 방들 쓰시면 됩니다. 욕실은 2층에 있고요.”
“네, 감사합니다...”
분명히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여름 날씨였는데, 지금 보니 완전 초겨울 날씨인지라 서둘러 벽난로에 불을 피워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들을 먼저 들여보낸 뒤 나는 장작들을 가지러 별장 옆에 조그맣게 붙어있는 허름한 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 미인들과 별장에 온 건 좋다만 말 한 번 붙이기 힘드니, 나 원 참.
*
벽난로에 불을 때어 난방을 한 뒤 흔들의자에 앉아 주전자 물이 끓기만을 기다리는 내 주위에는 그녀들이 앉아 있었다.
솔직히 각자 방에서 안 나올 줄 알았다. 살다, 살다 이렇게 낯을 심하게 가리는 사람은 처음 봤으니 말이다.
“한 시간 정도 지나면 방도 따뜻해질 거에요. 혹시, 차라도 드실래요?”
당일 스케줄인데다가 따뜻한 날씨를 예상하고 온 탓인지 그녀들은 제각기 얇은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각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하, 아쉽다. 크흠...
혹시라도 감기에 걸릴까 먹으려던 차를 도저히 나 혼자만 먹을 분위기가 아니었는지라, 그녀들에게도 예의상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물어봤는데, 설마 대답을 안 하겠어?
그건 낯가림이 심한 게 아니라, 예의가 없는 거다. 진심.
“저, 저는 주세요!”
뭐, 일행 중 유일하게 일반인인 코디 분은 그런 내 제안을 잽싸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감사해요. 묵을 데도 제공해주시고요.”
“저, 저도요.”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저희가 낯가림이 심해서요. 많이 불편하셨죠?”
나머지 그녀들도 결국 비싼 그 입을 열었다. 드디어.
하, 원래 미인들이랑 대화하는 게 이렇게 힘든 건가? 힘들어도 너무 힘들다.
어쨌든 왠지 모르게 그녀들이 자신들의 벽을 조금이나마 허문 듯 한 기분이 들어 기분은 좋았다. 뭐, 지금 당장 대접할 만한 게 스틱커피 뿐이라는 게 아쉽지만 말이다.
“아니에요. 아까 매니저분이 그러시더라고요. 낯가림 심하시다고.”
각자의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부어주고는 스틱 커피 2개씩을 넘겨주고 나서 나 또한 흔들의자에 몸을 맡겼다.
폭우 때문 인건지. 아직 오후 3시밖에 안됐는데, 밖은 저녁처럼 어두웠다.
산장 자체에 TV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빛이라고는 무드 등 두 세 개의 은은한 불빛과 벽난로 불빛이 전부여서 일까.
하, 이러면 너무 센치해지는데.
뭔가, 막걸리에 파전이 생각날 정도로 분위기는 죽여줬다. 나 혼자 있었다면 눈물 꽤나 흘렸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있는 게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 이런 센치함이 같이 있는 이들의 어색함을 이기지는 못하는 구나.
“저도 이제 씻어야 될 것 같네요. 그럼 편히 쉬세요.”
서둘러 커피를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이런 미인들을 두고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게 슬프긴 했지만 말이다. 하, 저 이불 좀 어떻게 할 순 없나? 크흠...
*
몸에 남아있던 찝찝함을 남김없이 씻어내고 내 짐들을 챙겨 계단에 놔둔 뒤 1층으로 내려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1층 소파에서 자야 될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뭐, 소파라고는 해도 거의 간이침대 식 이었는지라 불편할 건 없었다. 애초에 방을 3층, 2층으로 잡은 것도 창밖 풍경 때문이지 거기가 더 안락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으니까.
“저, 저희가 3명씩 자고 남은 방 쓰시면 될 것 같은데...”
그런데, 다른 이들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나보다. 짐을 가지고 내려오는 내 모습에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나 이를 만류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아니에요. 원래 저는 여기 올 때 여기서 자거든요. 벽난로 불빛 보면서 자는 걸 좋아해서요.”
애초에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벽난로 앞에서 자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녀들을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가 왜 그녀들을 설득해야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방도 지금쯤이면 따뜻해 졌을 텐데 안 들어가고 뭐하는 거야?
[꼬르륵]
아하!
배고픔 앞에서 장사 없다고, 센치함도 이긴 어색함도 배고픔 앞에서는 안 되나보다.
하긴 생각해보니, 오늘 새벽부터 촬영하는 동안 밥을 먹은 기억이 없다.
그나저나, 먹을 게 충분할지 모르겠다.
나 혼자 이, 삼일 정도 먹으려고 장을 보긴 봤는데 말이다. 게다가 한창 활동 중인 걸 그룹이 돼지고기를,
“많이 배고프시죠. 이렇게 될 줄 몰라서 먹을 게 많지는 않은데요. 혹시 삼겹살,”
“네, 좋아요!”
“괜찮아요!”
괜찮은 거구나. 칼로리 상관없이 삼겹살은 괜찮은 거구나.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들려오는 칼 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 제발 평상시에도 이렇게 좀 합시다. 그놈의 낯가림은 배고플 때, 배 안고플 때 너무 가리는 것 같다.
그런데, 그때였다.
“여, 연희 씨. 그... 이불...”
여, 연희 씨 그만 흥분 가라앉히시고 이, 이불 다시 뒤집어쓰시는 게.
꼬르륵 소리의 주인공이자, 방금 전 내 삼겹살이라는 발언에 순간 칼 같은 대답을 해준 희연 씨가 뭐가 그리도 급한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자리에서 일어난 것 까진 좋았다. 아니 솔직히 그 후도 좋았지만, 어쨌든 그러는 바람에 그녀를 감싸고 있던 이불이 떨어져나갔다.
“꺄아악!”
당일 스케줄이었는지라, 옷을 챙기지 못했나보다. 그리고 그 옷 중에는,
“이 기집애가 미쳤어!”
“바보야!”
“이런 미,”
속옷도 포함...
하, 살기 참 좋은 날씨다. 감사합니다. Bravo, my life!
*
화로에서 꺼낸 삼겹살과 전자레인지에 데운 즉석 밥을 꺼내와 보니, 제법 근사한 저녁이 준비됐다.
덕분에 이 삼 일은 족히 먹을 수 있었던 재료들이 다 소진됐지만 말이다.
“술이요?”
나와 달리 삼촌은 소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냉장고에는 와인만 몇 병 있었기에 어제 장을 볼 때 소주 몇 병을 사왔었다. 삼겹살을 먹을 때 소주를 먹지 않는 것은 상상도 못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준비된 저녁에 맞춰 잔을 가져와 소주를 따라 한입 마셔보니,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런 내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이지만.
“술 드릴까요?”
“네.”
“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달라고 말하는 연지 씨, 하린 씨의 모습에 저들도 사람인 것을 새삼 깨닫는다. 하긴, 아무리 예뻐도 사람이긴 사람이지. 말 없는 사람. 유난히도 낯가림이 심한 사람.
마침, 혹시나 싶어 와인도 한 병 가져왔는지라 소주를 마시지 않는 이들에게도 와인을 한잔 씩 따라주었다.
뭐, 덕분에 분위기는 한층 깊어졌다. 마치, 캠핑 온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 됐으니 말이다.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저보다 선배님이시고 나이도 많으,”
“쓰읍!”
“뭐?”
“나, 나! 나는 동갑인데!”
그런데, 생각 외로 술이 주는 효과가 대단한 듯 하다. 술이 꽤나 센 듯한 하린 씨와 연지 씨는 그렇다 쳐도 그다지 도수도 높지 않은 와인을 마신 나머지 멤버들의 반응이 사뭇 달라졌으니 말이다.
“말 놔! 말 놔! 나는 동갑이라구!”
하, 이래놓고 내일 아침에 또 원래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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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이 미래다. 창조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