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마음을 노래로-17화 (17/502)

00017  2012  =========================================================================

하, 역시 하늘은 스스로 원하는 자를 돕나보다.

[지혁아 혹시 잡지 화보 찍을 생각 있냐?]

종교가 없는 나지만, 그때 그 순간만큼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존재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들의 알 수 없는 가호가 없었다면, 멍청하고 어리석은 나는 최고의 순간을 걷어찰 뻔했으니 말이다.

[그게, 저번에 너 앨범 화보집 작업한 디렉터가 제안을 해서 말이야. 이제 여름 다 지나가서, 이번 겨울에 실릴 화보라던데?]

[앨범 화보집도 겨우 찍었는데, 잡지 화보를 어떻게 찍어?]

뭔가, 뜬금없는 민재 삼촌의 제안에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삼촌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나가려했고 말이다.

[알았다. 나도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 본거지. 뭐, 무조건 하라는 건 아니었으니까.]

더군다나, 저번 앨범 화보집 촬영 이후 화보집이라면 질색을 할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하물며, 여름이 지나갔다고는 해도 초가을의 날씨는 여전히 무더웠는지라 패딩을 입고 사진을 찍힐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었다.

[그래도 오늘 하루만이라도 생각해봐. Stylish랑 같이 찍는,]

[감사합니다. 삼촌. 언제, 어디로 가면 되는 거죠? 제가 뭘 준비하면 될까요?]

곧바로 자리에 앉았지만 말이다.

사람은 역시 진중하고 신중해야한다.

*

새벽 3시부터 실내촬영, 오전 11시부터 야외촬영이라는 살인적인 스케줄 표를 처음 받았을 때 나는 내 눈이 잘 못된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스케줄 표는 오타도 아니요, 그렇다고 내 눈이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이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에 나는 전날부터 제주도에 내려와 휴가 아닌 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이런걸 보고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는 걸까?

뭐, 매일매일 포이보스 휴게실에서 휴가같이 보내고 있긴 하지만, 외지에 온 것과 서울 한복판에 있는 것이 비교나 가능할까.

어쨌든 전역 후 오랜만에 찾은 삼촌의 별장에 여정을 풀었다. 참, 이런 걸 보면 나도 마냥 불행한 놈은 아닌 것 같다. 비록 남들처럼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에 버금가는 사랑으로 나를 키워준 삼촌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가만보니 삼촌이 사랑하는 사람은 나뿐이 아닌 듯하다.

가져온 옷들을 옷장에 걸어두고 속옷들을 수납장에 집어넣으려던 내게 익숙한 자태의 물건들이 발견됐으니 말이다.

그것도 내게 익숙한 보급형이 아닌 뭔가, 뭔가 아주 특별한 듯한, 한 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물건들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누가 온 것 같더니만. 그새 여기까지 데려왔나 보다.

이거, 이거 진짜 삼촌 결혼하는 걸 내 눈으로 보는 건가? 뭐, 피임을 하는 것을 보니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불연 듯 몇 달 전 어떤 여성분과 진하게 스킨십을 나누던 삼촌을 떠올리며 풀었던 짐들을 챙겨 다른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 좋을 때다. 좋을 때.

그렇게 전망 좋은 3층 다락방에서 나와 2층으로 방을 옮겼다. 물론 주기적으로 세탁이나 기타 자질구레한 것들을 관리해주시는 분이 계시지만, 왠지 그곳에 머물기엔 조금 꺼림칙했으니 말이다.

뭐, 3층보다는 못하지만, 이곳 2층 창문에서도 바닷가가 보였는지라 딱히 불편한 건 없었다. 다만, 방이 좀 더 좁았을 뿐.

하, 여전히 풍경은 멋지네. 이 맛에 여기 오는 거지.

직선거리가 20M가 될까, 말까한 해변 가를 포함한 주변 필지가 모두 삼촌의 소유여서인지 몰라도 이곳만 오면 꽤나 안락하게, 주변 신경을 쓸 필요 없이 휴가다운 휴가를 보낼 수 있었다.

그랬기에 어렸을 때마다 삼촌과 나의 여름, 겨울 휴가 지는 이곳이었고 말이다.

뭐, 그렇다고 마냥 이곳의 시설이 최고라는 말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이 해변 가 별장이지 비주얼은 현대적인 것과는 거리가 전혀 멀었기 때문이다.

부엌 겸 거실 역할을 하는 15평 남짓한 1층, 작은 방 2개가 있는 2층 그리고 3층 다락방 1개가 전부인 이곳은 심지어 난방을 하려면 1층에 마련된 벽난로에 장작으로 불을 피워야 됐으며, 음식을 해먹을 가스도 들어오지 않아 뭘 해먹으려면 마찬가지로 벽난로를 이용해야 됐으니 말이다.

어휴, 그나마 자체 발전기로 온수기를 사용할 수 있어 다행이지. 그러지도 못했다면 나와 삼촌은 이곳에 올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뭐, 어쨌든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아담하고 소박한 Private beach에 나 혼자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만족스러웠다.

그만큼 창밖으로 펼쳐진 작은 해변은 여전히 푸르고 맑았으며 또 향수를 불러일으켰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창가에 앉아 바깥 풍경을 구경하다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나와 달리, 오늘 저녁 11시쯤에 도착해 같이 촬영 세트장으로 이동할 석현 형이기에 나 혼자 점심, 저녁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는지라 서둘러 나갈 차비를 했다.

뭐, 이곳에 있는 거라고는 와인 같은 술들과 소금 같은 향신료뿐이었으니까.

*

점심을 간단히 사먹고 앞으로 며칠 동안 그곳에서 먹을 바비큐 재료들을 산 뒤 한 숨 푹 잤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를 졸지에 휴가 보내버린 그 살인적인 스케줄 때문에 고생 좀 할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8시간 쯤 잔 뒤 촬영장에 도착한 나는 생각보다 큰 스튜디오 규모에 놀람과 동시에 긴장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었다.

[지혁아 지금 제주도 가는 항공편이랑 배편 전부 결항이다. 지연된 것도 아니라 아예 취소 되버렸는데, 어쩌냐? 일단 계속해서 알아볼테니까. 일단 먼저 세트장에 가있어. 주소는 이미 알고 있지?]

갑작스런 폭우와 번개에 제주를 오가는 교통편이 전부 마비된 것 때문에 석현 형 없이 홀로 택시를 타고 이곳에 오기도 했거니와,

[이거, 오늘 야외촬영 못하겠는데요? 어떡하죠?]

[이런 미친! 기상청 도대체 뭐하는 거야? 어떻게 이 정도 날씨인데도 예측을 못해? 뭐? 해가 쨍쨍? 이런 씨,]

뭔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회의를 하고 있는 촬영 팀의 표정 때문이었다.

“어머! 어서와, 지혁씨! 내가 지혁 씨 이번 앨범 대박 날 줄 알았다니까? 요즘 핫 하지?”

“아, 안녕하세요.”

그런 와중에도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내게 환영의 인사를 건네는 사진작가 덕에 겨우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마냥 세트장 입구에서 멀뚱이 서있었을 테니 말이다.

“지혁 씨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잠깐 대기실에 가서 쉬고 있어. 시간 되면 내가 부를 테니까 말이야.”

이어진 사진작가의 말에, 세트장 내 스태프의 안내를 받고 대기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비록 혼자지만, 이때만큼은 혼자인 게 편했으니 말이다.

뭐, 잠도 많이 잤겠다. 혼자서 할 게 없었는지라 결국 내가 할 거라고는 핸드폰 밖에 없었다.

심심한데, Stylish 선배들이나 검색해볼까?

어차피 곧 있으면 같이 촬영을 하게 될 텐데, 미리 뭐라도 알아보면 좋을 것 같아 검색해본 그녀들의 프로필은 사뭇 대단했다.

170cm, 168cm, 168cm, 168cm, 167cm.

무슨 모델만 모아놓은 것처럼 Stylish 선배들의 프로필상 키는 어마 무시했다. 근데, 솔직히 전에 만나서 직접 본 느낌으로는 프로필상 키보다 실물이 훨씬 큰 것 같다. 180이 넘는 나조차도 좀처럼 옆에 가기 싫을 정도로 비율이 좋았으니 말이다. 아니, 프로필상 키를 일부러 줄인 건가?

뭐, 어쨌든 나로서는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프로필상과 실제 키가 다르든 같든 내가 아리따운 여성분들과 화보를 찍는 다는 것은 변함없으니까.

그런데,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안녕하세요. 신인 가수 강지혁입니다. 며칠 전에 인사드렸었는데, 다시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 잘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Stylish 선배들이 먼저 와있다는 말에 인사를 하기위해 그녀들의 대기실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분명 엄청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졌지만 말이다.

아니, 낯을 가리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싫은 거 아냐?

뭔가, 너무나도 극명한 상황차이에 별 생각이 다들 그때였다.

“자! 그럼 실내촬영 시작할게요. 먼저 지혁 씨랑 연지 씨 커플 촬영부터 할 테니까, 스타일리스트들 준비해주세요!”

때마침 들려오는 사진작가의 말이 아니었다면 괜히 혼자 찔려 망상의 끝을 볼 뻔했는지라, 서둘러 의상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에라, 모르겠다.

뭉클.

연지 씨가 코트 안 내 허리를 두 팔로 감싸며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자, 나도 모르게 움찔 할 수밖에 없었다. 코트를 입고 있었다고는 할지라도 그 안쪽에는 얇은 티 하나만 입고 있는 상태였는지라, 연지 씨의 몸 굴곡이 그대로 느껴졌으니 말이다.

“좋았어! 연지 씨, 거기서 지혁 씨를 올려다봐야지! 옳지! 그 상태에서 포근하다는 듯이 눈웃음! 그래, 나이스!”

더군다나, 아무런 외투 없이 히트텍 상의와 청바지만 입은 상태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연지 씨의 두 눈동자를 마주봐야했기에 나로서는 속으로 불경을 외울 수밖에 없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뭔가, 연지 씨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전문적인 모델이 아니라서 그런지 서로 수줍어 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나는 거기서 수줍음을 넘어선 남자의 본능까지 느껴야 했지만 말이다.

“지혁 씨! 연지 씨랑 눈 마주쳐야지! 부끄러워도 참고 한 번에 갑시다! 한번에!”

게다가 170이 넘는 키를 자랑하는 연지 씨여서 일까. 작지 않은 키의 내가 워커까지 신었는데도 그녀의 얼굴은 내 어깨까지 왔는지라, 뭔가 얼굴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쿵쾅, 쿵쾅.

이성과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을 맞대었을 때 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더군다나, 그 대상이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착한이라면 말이다. 하, 혈기왕성한 나이답게 그녀의 굴곡진 몸이 느껴지는 순간부터 반응하는 녀석 때문에 엉덩이를 뒤로 빼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거기서 좀 더 달라붙어야지. 그래, 그래. 그렇게 말이야. 자, 서로 부끄러워 하지 말고 눈 마주칩시다! 한 번에 끝내자고요!”

그 정도로 사진작가의 요구는 디테일하고 또 집요했으니 말이다.

부처님 도와주세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컷! 좋았어! 자! 그럼 이제 연지 씨는 야외 촬영용 복장으로 갈아입고 지혁 씨는 거기서 코트만 바꿔 입을게요!”

하, 하얗게 불태웠다.

저번 앨범화보집에서도 그렇고 뭔가, 이상하다. 원래 화보촬영이라는 게 이런 건가?

하, 좋다. 참 좋다. 이런 화보촬영 진짜 참 좋은 것 같다. 민망한 것만 좀 빼고 그 대상이 이번처럼 남모르는 사이라면 말이다.

요, 요즘엔 여, 연상, 연하 커플이 대세라던데...

“정아씨! 준비해주세요! 다음 차례!”

아, 아니 일단 다른 사람도 있으니까. 다 찍어보고...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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