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2 2012 =========================================================================
프라하,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 프랑스, 스페인.
6개국을 잇는 한 달하고도 보름의 여정이 끝났다.
아무리 비수기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아무런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떠난 배낭여행이기에 걱정이 많았다. 실제로 이번 여행이 내 인생 최초의 해외여행이었으니 말이다.
“고마워. 삼촌. 덕분에 뭔가 기분도 전환된 것 같고 추억도 많이 생긴 것 같아.”
그 누가 전역 선물로 400만원에 달하는 유럽배낭 여행비를 받겠냐마는, 잘난 삼촌 덕에 이 모든 호사를 누린 내 자신이 너무 행운아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비록 그 여행길이 호사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호스텔 도미토리를 전전하며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었지만 말이다.
“응, 지금 마드리드에서 모스크바 왔어. 여기서 이제 곧 있으면 인천행 비행기 타. 에이, 경유로 왕복해야 비행기 표가 싸지. 어, 어 괜찮아. 일단, 한국 시간으로 내일 오전쯤에 도착할 것 같아. 에이 뭐 하러 그래. 그냥 택시타고 갈게.”
체크인을 한 뒤, 보딩까지 꽤나 시간이 남아 면세 주류 코너를 돌며 삼촌에게 연락을 걸었다. 술을 즐기지 않는 삼촌이지만, 그래도 이왕 유럽까지 온 거 뭐라도 하나 사다주고 싶었으니 말이다.
“어, 그렇다니까. 나오지 말고 일 봐. 애도 아니고 집하나 못 찾아가겠어?”
그런데, 정작 전화를 거니 본 목적보다는 삼촌을 말리는 게 우선인 것 같다. 무슨 마중이야. 택시타고 가면 나도 편하고 삼촌도 편할 텐데 말이다.
“알았어. 일 봐. 나도 남은 시간 공항이라도 둘러볼 테니까.
뭔가, 급한 일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보딩 직전까지 전화기를 붙잡고 삼촌과 통화를 했을 것이기에 오늘만큼은 다행이었다. 삼촌이 바쁜 사람이라는 게 말이다.
그나저나, 공항을 둘러보는 것인데도 왜 이렇게 아쉬운지 모르겠다.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것뿐인데 말이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지난 한달 보름동안 말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짧은 인연에 설레고 반가워 할 때도 있었고 예상치 못한 난관에 돈을 날린 적도 많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 모든 게 그립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추억이 돼버렸다. 너무나도 간직하고 싶은 그런 추억이 말이다.
[형, 뭐에요. 형이 왜 탈락이에요!]
[형, 장난 쳐? 진짜 죽을래? 하, 이런 쓰레기가.]
[지금 어디야? 주소 불러!]
[이러는 게 어딨어!]
뭐, 내가 내 스스로를 탈락자로 지목한 것을 알게 된 녀석들이 폭풍 문자를 보내자 난 유럽이라며 약을 올리기도 했고,
[뭐, 아쉽지만 그래도 잘했다. 너도 이제 머뭇거리지 않을 것 같으니까, 여행 끝나면 앨범 준비하자. 알겠지? 그리고 네 계좌에 삼촌이 용돈 넣었으니까, 여행 중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팍팍 먹어. 괜히 경비 아낀다고 참지 말고.]
[그래, 평생 노래하면서 가수로 살아갈 거면 바로 앞을 내다보는 것보다 좀 더 먼 곳을 바라보며 걸어야 할 때가 있어. 지금은 많이 아쉽겠지만, 너를 응원하는 팬들이 많다는 것과 네 스스로 노래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점에서 이번 방송 출연은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았다고 삼촌은 생각한다. 그나저나, 용돈 안 부족하니? 삼촌이 더 보내줄까? 아니, 숙소랑 다 예약을...]
두 명의 삼촌에게 장문의 문자를 받았으며,
[차가움 속의 사랑으로 네티즌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이끌어낸 강지혁 탈락! 410,321표라는 어마 무시한 득표수를 얻고도 탈락한 강지혁에 네티즌들 의아, 분노!]
[1등 강지혁 41만 표, 2등 김영진 13만 표. 그런데 정작 탈락자는 1등 강지혁?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규칙에 시청자들도 오락가락! 시청률은 최고! 진행은 최악?]
[거듭된 논란에 프로젝트 데뷔 측 曰 “시청자분들의 쓴 소리 달게 받겠으며 더 나아지는 모습 보여 드리겠, ...”]
[평균등수 41.4등 팀 VS 6.6등 팀의 대결. 기적을 일으킨 41.4등이지만 최종결과는 그들의 패배? 해도 해도 너무한 팀 구성에 프로젝트 데뷔 측의 해명 글에도 네티즌들의 분노는 그치지 않아.]
내 노래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엄청 많다는 것도 느꼈는지라, 가끔 육체적으로 여행길이 힘들 때마다 이러한 것들이 내게 많은 힘이 돼주었음은 두말 하면 잔소리였다.
[모스크바 국제공항에서 인천 국제공항까지 가는 아에로플로트 SU251비행기 편은 스카이 얼라이언스 대한항공 KE2301로 대체되었습니다. 이용하시는 고객 분께서는 잠시 뒤, 게이트 넘버 D24에서 보딩이 이뤄질 예정이오니,]
뭔가,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아쉬운 감정이 커져만 가는 내 속내를 알아줘서일까. 싸구려에다가 그 값만큼 서비스가 최악이라고 알려진 아에로플로트 항공편이 항공 동맹사인 대한항공 항공편으로 바뀌었다는 안내방송 덕에 귀국행이 그다지 고달프진 않을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이러면 기내식으로 한식 먹을 수 있는 건가?
*
“삼촌 1만장은 너무 많은 것 아니야? 내가 아이돌도 아니고.”
여행 중 통화로 했던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삼촌은 내가 귀국하자마자 앨범작업을 진행시켰다. 그것도 꽤나 큰 규모로 말이다.
비아이돌 남성 솔로로 데뷔할 예정인 내가 정규앨범으로 데뷔한다는 것부터가 큰 모험인데, 예상 앨범 판매량도 너무 높게 잡은 듯해 나로서는 뭔가 얼떨떨했지만, 정작 민재 삼촌은 걱정 말라는 듯 거침없이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요즘 앨범 낼 때마다 몇 십만 장씩 파는 S급 아이돌 아닌 이상, 1만장 넘기도 힘들잖아.”
“14곡 전부 들어보니까, 충분할 것 같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남은 녹음 작업에 집중해. 이제 2곡 남았지?”
“뭐, 그렇긴 한데...”
아, 나도 이제 모르겠다. 나야 뭐 크게, 크게 준비하면 손해 볼 건 없다. 그만큼 회사에서 내게 많은 투자를 해준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렇게 삼촌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녹음실로 들어가려던 그때였다. 삼촌이 뭔가 할말이 남아있는 듯 우물쭈물 하길 래,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지혁아. 삼촌도 면세점에서 산 술 좋아하는데.”
하, 괜히 돌아봤다. 필요 없다더니, 이제 와서 뭔 소리야.
[지혁아, 감정 몰입하는 거는 좋은데 그렇다고 너무 빠져들면 안 돼.]
“끄응”
원래부터 노래를 부를 때 몰입하는 정도가 심하긴 했는데, 이번에는 특히나 심한 것 같다. 모든 수록곡들이 내 이야기이고 추억인지라, 좀처럼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어제는 그저 감만 잡고 녹음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마음이 싱숭생숭하기도 하고 앞선 노래들 때 느꼈던 감정들이 쌓이고 쌓여서인지 더 한다고 해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만 같았으니까.
“후우...”
마음이 복잡할 때는 육체를 고달프게 만들면 된다는, 어느새 삼촌의 지론이 내 습관이 돼버린 탓에 아주 오랜만에 바벨을 들어올렸다.
뭐, 군대 다녀온 뒤로 운동과는 통 거리가 멀었는지라 들어 올린 중량은 본래의 삼분지 이도 못됐지만 말이다.
[쿵]
그런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래도 나름 말년 때, 몸 만든다고 열심히 운동하고 그랬는데 어느새 몸 자체가 물렁물렁해진 것인지 그것 조금 들었다고 온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흐읍.”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벨을 놓고 휴식을 취하지는 않았다.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7종류의 각종 비타민을 챙겨먹고 30분간 체조를 한 뒤에 시간이 날 때마다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삼촌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지금 몸 상태보다 나빠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후우.”
그렇게 한 두 시간 쯤 흘렀을까. 온 몸에 흐르는 땀과 비례하여 일시적으로 펌핑된 근육들을 보며 나름 흐뭇하게 운동을 마치려던 그때였다.
지하인 이곳에 맛있는 냄새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말이다.
아무래도 삼촌이 왔나보다. 녹음 때문에 집이 아닌 회사 휴게실에서 숙식을 하던 요 며칠 못 본 것이지만 그래도 거의 매일 보던 얼굴을 안보다 보려니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다.
서둘러 축축해진 민소매 티를 벗은 뒤 수건으로 대충 땀을 닦았다. 오랜만에 한 운동 덕인지, 콧속에 진하게 밀려들어오는 좀처럼 참을 수가 없었으니까.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아직 초봄이라서 그런지,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땀을 흘리고 난 탓인지 내게는 시원하게만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사, 삼촌?”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지하실을 벗어난 나를 맞이한 것은 진수성찬이 아니었다.
뭔가, 찹쌀떡처럼 달라붙어 진하게 키스를 나누고 있는 한 쌍의 남녀가 두 눈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지, 지혁아!”
“어, 엄마야!”
“즈, 즐거운 시간 되세요. 저, 저는 일이 있어서.”
트레이닝 복 바지에 상의는 딸랑 저지차림이지만, 서둘러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 사, 삼촌 나 오늘 집에 못 들어와! 녹음해야 돼서! 파, 파이팅!”
마당에 비치된 그릴로 순수 구운 듯한 바비큐 구이와 와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달싹 달라붙어 있는 두 사람의 모습까지.
하, 외롭다. 나 참. 도대체 키스하면서 손을 어디다 가져다 대려는 거야? 그 직전에 자리를 피해서 다행이지, 좀만 늦었으면 못 볼꼴을 볼 뻔했다.
그나저나, 흠... 내가 삼촌을 닮은 거였구나. 아니, 남자들 전체가 원래 그런 건가?
어쨌든, 왠지 모르게 나름 뿌듯하다. 삼촌이 무성욕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나도 이제 사촌 동생이 생기는 건가?
*
[미니도 아니고 정규앨범인데 그래도 할 건 해야지. 타이틀 곡이 없어서 뮤직비디오 찍는 건 힘들겠지만, 요즘 흔히들 하는 화보촬영은 해줄 수 있으니까, 걱정말고 한번 해봐.]
안 그래도 앨범을 1만장이나 선주문 한 상태이기에, 꽤나 과분한 투자를 받은 상태였다.
[뮤직비디오 못 찍어준 게 마음에 걸려서 그래. 그러니까, 마음 편히 먹고 다녀와.]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앨범에 실을 화보까지 계획했다는 삼촌의 말에 나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앨범 1만장. 1장에 1만원이라고 했을 때 총매출은 1억.
거기다 CD 제작 수수료, 유통 수수료를 제외하면 얼마나 남을까.
정작 그 1만장을 다 판다는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화보까지 찍는 다는 것은 적자를 감내하겠다는 뜻과 같았기에 나로서는 끝까지 거부의사를 표했다.
[진짜 안 해도 되? 하, 그럼 전화해야겠네. 여배우 섭외하느라 엄청 힘들었는데 말이야. 네 또래에서 엄청 잘 나가는,]
삼촌의 마지막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감사해요. 삼촌.
[삼촌이 보기에 네 앨범은 무조건 성공해. 운 만 따라주면 재판까지 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잘하고 와. 어차피 화보촬영이라고 해도 앨범에 싣는 거라서, 너한테 잘 맞춰줄 거야. 그 쪽도 하루 이틀 일하는 거 아닐 테니까.]
미안해요, 삼촌.
[진짜 삼촌이 너무 고마워도 절은 하지 말아라. 나이 들어보니까.]
한창 혈기왕성한 나라서요.
너무 떨렸다. 섭외하기 무척 힘들었다는 말을 계속해서 하며 내게 생색을 내는 민재 삼촌의 행동이 주는 기대감이 장난 아니었으니 말이다.
“자, 자! 오늘 주인공들이 다 모였으니, 인사한번 하고 본격적으로 시작해봅시다!”
하지만 그런 기분 좋은 설렘이 가져다 준 떨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배우 공지연이에요. 오늘 잘 부탁드려요.”
“처...음 뵙겠습니다. 신인가수 강지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알 수 없는 미소로 내게 인사하는 그녀를 마주봐야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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