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외전. 파랑새와 호랑이의 밤(完) >
“얘들아, 잘자.”
- 잘자.
- 잘자.
소장이 눈을 감는다. 숨소리가 균열해지자 릴리와 나르가 눈을 떴다.
- 가?
- 가자.
세계수에게 낮과 밤은 큰 차이가 없다.
거대한 신목에게 잠이라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장이 잠에 들면 두 세계수의 또 다른 일과가 시작된다.
모두가 잠든 지구의 밤. 릴리는 날개를 펼치고 밤하늘을 날았다.
- 시끄러.
밝은 조명들, 북적이는 사람들. 밤이 되면 조용해지는 과거의 연옥과도 사람이 없어 조용한 지금의 연옥과도 다르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 나도, 나도.
- 따라와.
- 응.
창문에 고개를 내밀고 버둥거리던 나르가 허공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릴리와 나르가 허공을 유영했다. 소장은 인간들에게 들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사실 들킬 일은 없다. 마법적 능력이 없는 인간들의 시선을 피하는 것쯤은 숨 쉬는 것만큼 쉬우니까.
- 오늘은 뭐해?
- 구경.
첫 번째 목적지는 부평의 한 고급 펜트하우스였다.
익숙하게 창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으나 아무도 없었다.
- 어디 갔지?
- 몰라.
일곱 주신 중 하나인 독쟁이의 집이었으나 사람의 온기보다는 차가운 냉기가 느껴진다. 자리를 비운지 꽤 오래 되었다는 것을 릴리는 인지했다.
- 다른 곳으로.
- 응.
곧장 한국을 벗어나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구경할 사람은 둘이었다.
- 찾았다.
- 먹깨비.
릴리가 눈을 빛냈다. 저 멀리 길거리 식당에서 핫도그를 사 먹는 남자가 보였다.
- 또 먹어?
- 또 먹어?
“응? 너희들이 여기는 어쩐 일이야?”
먹깨비가 핫도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 구경?
“먹어볼래?”
- 응.
릴리와 나르가 핫도그를 한입씩 베어물었다. 팡 터지는 육즙과 육향, 그리고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소스가 썩 괜찮았다.
“어때, 나쁘지 않지?”
- 응.
- 응!
“음식이라는 게 반드시 비싸다고 맛있는 게 아니거다. 재료가 아무리 좋지 않아도 그걸 어떻게 맛있게 만드느냐는 요리사의 능력이지. 내가 마물들을 이용해 진미를 만드는 것처럼.”
“물론 대부분은 싼 만큼 딱 그 정도의 값어치를 하겠지만 이 세계에는 은근히 숨은 명인들이 많거든. 뛰어난 능력으로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능력이 아주···.”
- 말이 너무 많아.
- 맞아.
릴리와 나르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먹깨비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평소에는 조용조용하다가 음식 이야기만 나오면 술 취한 난쟁이보다 더 시끄러워진다.
릴리는 이럴 때는 그냥 조용히 벗어나는 게 좋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 가자.
릴리가 나르에게 눈짓했고 먹깨비가 눈치 채기 전에 멀어졌다.
지루한 설명을 조금 들었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었으니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 이번에는 여기!
다음으로 간 곳은 보스턴에 위치한 거대한 저택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갔으나 역시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독쟁이의 집과는 달랐다. 밑에서부터 온기가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두 정령체가 지하로 들어갔다. 백미터쯤 들어갔을까, 거대한 지하 연구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으, 이거지. 정말 끝내주는군!”
수많은 기계와 마법진들, 여기저기에 서린 신의 권능들까지.
난쟁이가 대학이라는 곳을 다니며 만들어 놓은 개인 연구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연구실이 비교적 조용했다. 평소라면 이런 저런 기계를 돌리고 실험하면서 시끌벅적했어야 했는데.
- 뭐 먹어?
- 뭐야?
“응? 세계수들이구만. 언제 왔나?”
- 방금.
- 방금.
얼굴이 붉어진 난쟁이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뭘 먹냐면, 어린 그대들은 아직 잘 모르는 끝내주는 걸 먹고 있지.”
- 나 어려?
- 안 어려.
“어리지. 아직 백 년도 못 산 핏덩이들인데.”
- 릴리, 어른.
- 나르도 어른.
릴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역시 난쟁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을 새장에 가둔 그날부터.
“크흠, 내가 실언을 했군.”
그녀의 눈빛이 묘해지는 것을 본 난쟁이가 냉큼 말을 주워담았다. 그녀의 시선이 난쟁이가 들고 있는 술잔에 닿았다.
- 나도 먹어볼래.
- 나도.
“이걸? 안 되네.”
- 왜?
“얼마 없으니까. 나 혼자 먹기도 부족하네.”
- 그런 게 어딨어!
- 어딨어!
“그렇다면 그런 줄 알게. 이건 줄 수 없어! 두리쉬마가 언제 강민식을 데리고 지구로 다시 올줄 모른단 말이네!”
- 그래도 한 방울!
- 한 방울!
술이라는 것은 알았다. 평소에 술에 별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난쟁이가 취한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마력포가 아닌 다른 것을 이렇게까지 아끼는 것도 처음 보았다. 그래서 궁금했다.
- 가지 조금 잘라 줄게.
- 나도.
“···으음, 그렇다면야.”
난쟁이가 술잔을 내밀었다. 릴리와 나르가 잔 안으로 주둥이를 파묻었다.
푸우우웁-
그리고 뱉어냈다.
- 맛없어! 독이야!
- 으엑!
“프흐흐, 독이 아니라 술이네. 이 맛을 모른다니 아쉽구만.”
- 우릴 독살하려고!
- 맞아!
“독살이라니. 나는 이렇게 잘 먹지 않나?”
난쟁이가 벌컥 벌컥 술을 들이켰다. 릴 리와 나르의 눈이 샐쭉해졌다.
- 이상한 난쟁이.
- 독 먹는 난쟁이.
- 키 작은 난쟁이.
- 괴짜 난쟁이.
- 술 취한 난쟁이.
- 빨간 난쟁이.
“거참, 술 마시는데 옆에서 자꾸 그럴 건가?”
- 흥.
- 갈 거야!
릴리와 나르가 난쟁이의 집을 벗어났다.
- 이제 어디로?
- 음, 백신전으로!
나르와 릴리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들은 백신전에 있었다.
두 세계수의 본체와 가지가 심어진 세 개의 차원 중 하나.
연옥을 제외하고는 가장 우주의 힘이 풍부한 차원. 마물들의 침략이 있었을 때 모습을 드러냈던 마력포들은 다시금 지하로 사라져 있었다.
“태초에 절대신께서 존재했고···.”
- 광신도!
- 광신도!
릴리는 백신전을 돌아다니다 집행자들을 상대로 경전을 전파하는 광신도를 찾았다.
“세계수님들이군요. 오랜만입니다.”
- 쫓겨났다며?
- 났다며?
“···세계수님들의 직설적이 화법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군요. 신을 섬기는데 고난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절대소장신께서 저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내리시는 시련입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버텨낼 것입니다.”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던 광신도의 얼굴이 평온을 되찾았다.
“예. 버텨낼 것입니다.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아니었다.
- 이상해.
- 도망가자.
소장이 그랬다. 미친것들하고는 상종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릴리와 나르는 소장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세계수였다.
- 짐승. 없어.
- 없어?
- 또 싸우러 나간 거 같아.
- 맨날 싸워, 짐승.
- 정상이 아냐.
짐승은 백신전에 없었다. 늘 종말 차원을 돌아다니며 싸움을 갈망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리 특별할 건 없었다.
- 연옥으로 가자.
- 응.
릴리가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가 나르와 함께 직접 조성한 차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 활쟁이!
- 활쟁이!
“···그렇게는 부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니? 정말 말 안 듣는구나.”
집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활쟁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짐승이 가장 만나기 힘든 주신이라면 활쟁이는 가장 만나기 쉬운 주신이었다. 종말 차원을 싸돌아다니는 짐승과 달리 활쟁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백신전이나 연옥에서 휴식하며 보내니까.
- 입에 착착 감겨.
- 잘 감겨.
“잘 감긴다고 그렇게 부르는 건 옳지 않는단다.”
- 릴리, 그런 거 몰라.
- 나르도 그런 거 몰라.
“···점점 뻔뻔해지는 것 같은데.”
- 몰라.
릴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활쟁이의 어깨에 앉아 부리를 찻잔에 가져갔다. 콕, 상큼하면서도 은은한 향이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아까 먹었던 독극물보다는 나았다.
- 훨씬 맛있어.
- 맞아.
“훨씬? 아까 뭘 먹었니?”
- 난쟁이가 독 줬어.
- 난쟁이가 먹고 얼굴 빨개졌어.
“강민식으로 만든 술이 있다더니 그걸 먹은 모양이구나. 오랜만에 신났겠네.”
활쟁이가 픽 웃었다.
- 이상한 난쟁이.
- 더 이상한 활쟁이.
“아, 혹시 디아네를 만나고 왔니?”
- 광신도 봤어.
- 또 이상한 거 전파해.
“역시 당분간은 곁에 가지 않는 게 좋겠어···.”
- 왜?
“아무것도 아니란다. 김우진은?”
- 소장 자.
- 이상해. 안자도 되는데 매일 자.
“육체는 괜찮아도 정신적 피로감이라는 게 있으니까. 수면은 정신적 피로를 해결하는데 가장 좋은 수단이란다.”
- 몰라, 그런 거.
- 나도.
“그야 어머니 나무의 정신력은 모든 신을 통틀어도 가장 뛰어나니까.”
- 나 뛰어나?
- 나도 뛰어나. 에헴.
릴리는 활쟁이와 함께 짧은 티타임을 마쳤다.
역시 본체가 있는 곳이라 그런지 마음이 편안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편안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연옥보다 더 익숙해져버린 그곳이 그리웠다.
- ···돌아갈래.
- 나도.
“잘 가렴. 내일 또 오고.”
- 응.
- 응.
릴리가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아니! 간다고 핑을 찍었는데 대체 갱을 왜 당해주는 거죠? 맵 안보세요? 혹시 그 부분만 모니터가 맛이 갔나요?”
“제발 솔킬 좀 그만 따여요! 못하면, 망했으면 좀 사리라고요! 그게 어려워요? 타워 좀 허깅하고 있으라고! 나가지 말고!”
방문 너머로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미세하게 열린 틈 사이로 수북이 쌓인 감자칩이 보였다.
- 에휴.
절로 한숨이 나왔다.
- 원조 귀쟁이. 아직도 게임해.
- 원조 귀쟁이. 언제 철들어.
하루 종일 잠도 안자고 게임만 하다니.
지구의 종말이 일어났을 때는 조금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 같더니 종말이 끝나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하여튼 문제가 많은 귀쟁이다.
따끔하게 한 마디 해야하는데 소장이 원조 귀쟁이한테는 유독 너그러운 게 문제다. 정이 너무 많다. 그래서 더 좋은 거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릴리가 자고 있는 소장에게로 되돌아왔다.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소장이 잠결에 그녀를 쓰다듬었다. 기분 좋게 손길을 느꼈다.
그러길 한참. 날이 밝아왔다.
- 걷어?
- 응. 걷어.
햇빛을 거의 대부분 차단하는 암막 커튼을 걷었다.
- 일어나!
- 잠꾸러기!
날개로 뺨을 툭툭 두드리며 소리치자 나르가 그녀의 행동에 호응했다.
양옆에서 건드리자 소장은 눈을 뜨는 대신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절로 포근해지는 느낌에 손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아, 이러면 안 되지. 깨워야 하는데.
- 일어나.
- 맞아.
“···몇 시야?”
- 10시 1분!
- 1초 지나서 이제 10시 2분!
“아직 더 자도 되잖아···.”
-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
- 잡아.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새한테 먹혀.”
- ···나 먹혀?
나르가 울먹였다.
- 아니, 넌 호랑이야.
- 맞아, 난 호랑이야.
- 그리고 난 새야.
“아니, 넌 나무야.”
- ···그러네?
- 나도 나무야.
“그래, 그러니까 5분만 더 자자.”
소장이 다시 눈을 감았다.
- 아이 같아. 어리광부려.
- 맞아.
푹 한숨을 쉰 릴리가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포근하고 따스했다.
평온하고 익숙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값어치가 있다.
릴리가 눈을 감고 김우진의 온기를 느꼈다.
햇빛이 비춰온다. 오늘도 하루가 시작되었다.
언제나와 같이 평화로운.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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