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149화 (149/150)

# < 외전. 소인과 거인 그리고 독인 >

“학식이 맛있다고 소문이 났다고?”

“예. 소문대로 어지간한 맛집보다 괜찮습니다.”

“이게?”

“이래서 맛알못들이란···.”

“방금 뭐라고 했나?”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베르너가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디 가나?”

“뉴욕쪽에 맛집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놈의 맛, 맛.”

“그놈의 마력포, 마력포랑 뭐가 다릅니까?”

“다르네. 난 더 이상 마력포를 입에 담지 않으니까.”

“마력 미사일이나, 마력포나.”

“엄연히 다르네!”

데르카인이 버럭 소리쳤으나 주변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았다. 권능으로 소리를 차단한 덕분이었다.

“예, 예. 열심히 만드시길 바랍니다.”

“가기나 하게.”

“근데 안질리십니까? 전 세계 대학들 돌아다니면서 전부 강의 듣고 계시지 않습니까?”

“새로운 것을 배우는게 지겨울 리가 없잖은가. 자네는 미식을 하는 게 지겹나?”

“이해가 확되네요. 그게 미식과 동급이 될 수 있다는 걸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솔직히 중복되는 것도 많잖습니까?”

“사람마다 알고 있는 지식이 다르고 해석이 다르네. 그리고 큰 틀을 같아도 대학마다, 교수마다 세세함이 다르지. 그 모든 것을 종합할 것이네.”

아마 대학 생활이 엄청나게 길어지겠지만 상관 없었다. 어차피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으니.

‘나중에는 대학원에 진학도 하고 학회에도 나가야지.’

그렇다고 대학원 랩실에서 노예처럼 살 생각은 없었다. 권능을 이용해 알맹이만 쏙 빼먹을 생각이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러지.”

베르너가 사라졌다. 홀로 남은 데르카인이 텅 빈 식판을 치우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강의가···.”

스마트폰으로 강의시간표를 꺼내 확인했다. 점심시간을 제외하면 공강이라고는 거의 없는 빽빽한 시간표였다.

“우주항공이군. 마력위성이라. 이것도 나쁘지 않단 말이지.”

우주에 마력위성을 배치하고 지상으로 쏘아내는, 혹은 우주의 적들을 향해 쏘아내는 그림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이곳의 인간들은 태양에너지를 받는다고 하지만 태양이 아니라 아카식 레코드의 빛을 통해 에너지를 수급하면···.”

그 파괴력은 태양빛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된다. 그러한 위성으로 행성 위를 도배한다면 철벽의 요새가 된다.

“1차적으로 위성, 2차적으로 미사일, 마지막 3차로 마력포.”

우주에서 한 번 요격, 들어오는 대기권에서 두 번 요격, 그리고 지상에서 세 번 포격.

그 압도적인 화망을 견뎌낼 적들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거다.

“아니지. 그것도 좋지만 역시 그 우주 전함이라는 것도 나쁘지 않단 말이야.”

지구인들은 과학 기술이 부족해 만들 수 없고 공상이나 이론적으로만 존재하지만 데르카인에게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인공지능은 정령으로 대체하고, 장갑이나 부품을 만드는 건 애초에 드워프들이 최고다. 설계는 그의 장기이며 과학이 부족한 부분들은 마법으로 대체하면 그만이다.

“상상만해도 좋군.”

김우진은 과유불급이라고 하지만 옛 말에도 그랬다. 평화를 원하는 자, 전쟁을 준비하라.

그게 아니더라도 수키로가 넘어가는 거대한 우주전함은, 수천문의 거함 거포들은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도 든든함을 자아낸다.

그것만으로도 우주전함을 만들 이유는 충분하다.

“빨리 가야지. 이러다 강의에 늦겠군.”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만이 살 길이었다.

늦깎이 대학생이 서둘러 강의실로 들어···가지 못했다.

───!

굉음과 함께 무언가 그의 앞에 떨어졌다.

“사, 살려주세요! 데르카인님!”

사람, 아니 신이었다.

* * *

“일단 진정하게.”

따악, 데르카인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며 권능을 펼쳤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무언가에 놀란 사람들에게 암시를 걸어 아무 일 없던 것으로 만들고, 아무도 없는 멀쩡한 환상을 보여주며, 소리를 차단에 말이 세어나가는 것을 막았다.

가벼워 보이지만 무려 세 가지 권능이 종합된 콤비네이션이었다.

“자네 얼굴이 왜 그렇게 초췌하나? 무슨 일 있나?”

“데르카인님···!”

눈이 퀭한 강민식이 데르카인의 손을 붙잡았다.

“깜짝이야. 이 뼈다귀 같은 손은 뭔가? 어디 흡혈귀놈한테 피라도 빨렸나?”

“흡혈귀보다 지독한 사람한테 피가 빨렸습니다···.”

“자네 피를 빨아갔다고? 설마 김우진이?”

“아닙니다. 소장님이 제 피를 가져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두리쉬마님입니다. 아니,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강민식이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더니 두리쉬마의 손을 이끌고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음습한 곳으로 향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나는 강의를 들어야 하네.”

“그깟 강의가 저보다 더 중요합니까!”

“도끼를 부르는 그런 말은 하지 말게.”

“···죄송합니다. 제가 들어도 이상하긴 했습니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티팩트! 아티팩트 좀 주십시오!”

“아티팩트? 갑자기 무슨 아티팩트?”

“그거 있잖습니까. 세계수를 신에게서 감췄던 아티팩트! 구름하늘인가 뭐시기!”

“구름하늘이 아니라 하늘구름이네. 뭐시기가 아니라 내 걸작 중 하나고.”

“예, 아무튼 그거. 그거 어디 있습니까?”

“아공간 어딘가에서 썩고 있을 거네. 그런데 갑자기 하늘구름은 왜?”

“숨어야 합니다!”

“자네가?”

“예, 제가!”

데르카인이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자네는 사용할 수 없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세계수를 위해서 맞춤 제작한 물건이라 자네가 숨는다고 한들 큰 효력을 기대하기 어렵네. 일개 피조물들이라면 당연히 눈치 채지 못하겠지만 고작 피조물들에게 도망치려고 한다면 내게 아티팩트를 부탁할 필요가 없겠지.”

수염을 어루만지던 데르카인이 물었다.

“말해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제대로 말을 해줘야 내가 도와줄 수 있지 않겠나?”

“···두리쉬마.”

“두리쉬마?”

“예. 두리쉬마 그 개새끼가 저를 휴대용 비어텐더로 여기고 있습니다!”

“···으응?”

* * *

쌓인 게 많은지 강민식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김우진이 자네를 두리쉬마에게 넘겨서 납치를 당했다?”

“예.”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종말을 맞이한 차원들과 종말 차원들을 돌아다니며 업을 쌓는 두리쉬마를 쫓아다닌다?”

“예.”

“그런데 두리쉬마가 술에 맛을 들리더니 계속해서 술에 독을 요구한다?”

“예.”

“그런데 내성이 생겨서 요구치가 늘어났고 결국 일반 독으로는 감당이 안 돼서 자네의 피를 요구한다?”

“예. 제 피가 제가 가진 모든 독중에 가장 독합니다.”

“그런데 그 빈도가 점점 늘어나서···.”

“피가 빨려서 다 죽을 지경입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어쩐지 안색이 창백하고 온 몸이 뼈다귀 같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다.

“자네 피로 술을 만드는 게 가능한 건가? 독과 알콜은 엄연히 다른데.”

“제 권능입니다. 피로 제가 먹어본 거라면 어떤 종류의 독기로도, 약물로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군. 피로 알콜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군.”

“예. 아무튼 그 무식한 거인놈은 만족이라는 걸 모릅니다. 물 먹는 하마도 아니고 하루에도 수십 잔씩 술을 요구합니다!”

“그야 당연하지 않나. 거인족들은 우리 드워프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독을 술을 물처럼 퍼마시네. 그 조상격인 타이탄은 어떻겠나?”

“······.”

강민식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아, 아티팩트. 아티팩트 정말 안 됩니까?”

“만들려면 만들 수는 있네만은···.”

“그럼 어서···!”

“하루이틀 사이에 될 일이 아니네. 그리고 안타깝게도.”

쿠웅-

대지에 거대한 족적이 새겨졌다.

“두리쉬마는 이미 와버렸고.”

“···아아.”

“강민식. 간이 크구나. 감히 도망을 가다니.”

2m가 넘어가는 거인이 으르렁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강민식이 털썩, 주저앉았다.

“오랜만이네, 두리쉬마.”

“데르카인이군.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난 원래부터 여기 있었네. 강민식이 내게 온 거지.”

“너한테?”

데르카인이 슬쩍 강민식을 흘겨봤다. 그 시선에 강민식은 진한 불길함을 느꼈다. 설마, 하는 불안감이 자리 잡았다.

“자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내게 아티팩트를 만들어달라더군.”

“데르카인님!”

“아주 시건방진 소리를 하는군. 그렇다고 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그런 게 아니라···.”

“헌데 그걸 나한테 말해주는 이유가 뭐지?”

“흥미가 돋아서네.”

“흥미?”

“나는 자네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많이 본 적이 없네. 타이탄이 어째서 술을 마시지 않을까, 조금 유별나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더군.”

“그것들은 술이 아니라 물이니까.”

“다르게 말하면 강민식의 피가 들어간 술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아티팩트 같은 건 절대 만들어주지 않겠네. 그 술을 나도 좀 공급 받을 수 있겠나?”

“···데르카인님?”

진한 배신감에 강민식의 입이 벌어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어버버 말이 입 안에서 계속 헛돌 뿐이었다.

“아티팩트 따위를 만들어봐야 내 눈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나?”

“그건 자네가 잘 알지 않나?”

“···좋다.”

“좋은 거래네.”

거인과 소인이 서로의 손을 잡아 악수했다.

거래의 대상이 된 독인의 의견은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그거 아나? 거인만큼은 아니지만 드워프들도 술을 좋아하네.”

그리고 데르카인은 그런 드워프들 중에서도 특히 술을 좋아했다.

“그런데 용사가 되고, 신이 되고 나서 술에 제대로 취해본 적이 없네. 나는 취하고 싶어서 술을 마시는데 취한 적이 없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게 세상의 이치라고 여겼다.

“그런데 타이탄이 만족해하며 계속 찾을 정도의 술이라니. 구미가 당기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이 배신자!”

“미안하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드워프네.”

쩝쩝, 데르카인이 입맛을 다셨다.

“여기 있다.”

두리쉬마가 아공간에서 큰 오크통 다섯 개를 꺼냈다.

“나중에 더 필요하면 이야기해라.”

“고맙군. 좋은 거래였네.”

“마찬가지다.”

독인과 술들이 거래되었다.

“아아아아악! 이거 놔! 난 인간이야! 난 비어텐더가 아니야!”

강민식이 발악했으나 거인에게 끌려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거인과 독인이 사라졌다.

“···조금 불쌍하긴 하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용사가 되어 감옥에 갇힌 이후, 단 한 번도 취한 적이 없는데 다시 취할 수 있다니.

드워프가 되어 이 유혹을 어찌 참을 수 있을까.

데르카인이 강의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그 자리에서 술통을 까 들이켰다.

벌컥 벌컥-

“크어어어어어어! 이거 죽이는구만! 다섯 통이 아니라 백 통이 있어도 모자라겠어!”

그날 데르카인은 3개의 강의에 자체 휴강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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