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외전. 율리아의 하루 >
지구의 종말이 끝났다.
인류는 갑자기 시작된 종말처럼, 그것이 갑자기 끝나버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나 김우진의 선언에 그것이 종말이었음을, 그리고 끝났음을 인지했다.
[이거 나만 보임?]
[jpg]
[끝이 끝났다? 이개 뭔 개소리임?]
↳빡대가리임?
↳이 무슨 어머니 같은···.
↳end가 끝이 아니라 종말이란 뜻도 있음
↳그럼 종말이 끝났다네.
↳···진짜 종말이었다고?
[ㄹㅇ]
[ㄹㅇ로 종말이었네? ㅁㅊ]
↳종말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되긴 함
↳ㄹㅇ세상 멸망하는 줄 알았음
↳전 세계에 괴물이 나타났는데 그게 종말이 아니면 뭐임
[이딴 게 종말?]
[내가 아는 종말은 이렇지 않았는데...]
↳니가 아는 종말은 어떤데
↳괴물들 막 나오고, 각성자들 등장하고, 세상 피폐해지고 나도 각성하는?
↳괴물들 막 나오고(나옴), 각성자들 등장하고(등장함), 세상 피폐해지고(원래 피폐함), 나도 각성하는(꿈깨)?
↳꿈깨ㅋㅋㅋ
↳왜! 나도 각성자 좀 되면 안 되냐! 나도 각성자 될 수도 있잖아! 그래 안 그래!
↳안 그래
↳되고 싶다고 말해!
↳되고 싶어!
↳응, 안 돼.
↳ㅅㅂ
↳ㅋㅋㅋㅋ이새끼들 잘 노네
↳근데 왜 원래 피폐한데ㅋㅋㅋ
↳세상은 아직 살만 하다고!
“흐음.”
커뮤를 살피던 율리아가 손을 펴고 작은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지구를 구하고 자신의 차원으로 돌아간 용사가 썼던 백정탈도 하나 같이 찍었다. 스마트폰으로 찍어 글 하나를 썼다.
[나는 각성자인데]
[난 각성자임.]
↳ㅈㄹㄴ
↳나는 신이다 임마
↳인증 없는 글은 뭐다?
↳먹이를 주지 마시오
↳요즘 이런 놈들이 많네ㅋㅋ
↳ㄹㅇ근데 인증하는 놈은 못 봄 ㅋㅋ
↳ㅈㄹ하네 진짜. 니가 각성자면 도게자 박고 명동 한복판에서 여장하고 돌아다닌다
역시나 댓글들이 불탔다. 특히 급발진 하는 댓글 하나에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인증]
[jpg]
[ㅇㅇ인증함
도게자 박고 여장도 해라]
↳···?
↳포샵 아님?
↳방구석 ㅈ문가들 나와주세요
↳아닌 것 같은데?
↳주작이지ㅡㅡ 사람 손에서 어케 바람이 나옴
↳팩트)각성자면 나온다
↳ㅇㄱㄹㅇ?
↳근데 저 백정탈 찐아님?
↳백정탈이 한두 개인가
↳도게자 박아라
커뮤는 조작 증거를 찾겠다고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율리아는 희희낙락 웃다가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아, 이러면 안 되지.”
원래는 이러지 않는데 커뮤를 하다 보니 왠지 조금씩 물드는 것 같았다.
게임을 켰다. 종말이 언제 있었냐는 듯, 게임 속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콰작, 익숙하게 감자칩을 먹으며 게임을 돌렸다.
“와, 백정 차이 끝내주네.”
답이 없는 팀원들을 한탄하며 게임을 하드 캐리했다. 판이 끝나자마자 보이스를 켰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한 판 돌리고 계셨습니까?]
“암 걸릴 것 같아요. 믿을 만한 팀원이 필요해요. 방금도 질 뻔 했어요. 말이 되요? 21킬에 딜량 1등을 하고 질뻔 했다니까요?”
[그게 게임이죠.]
“빨리 들어와요. 듀오나 돌리게.”
[네.]
최상위권 랭크인지라 큐가 잘 잡히지 않는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압도적인 게임으로 1승을 챙겼다.
“이거죠. 팀에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게임 할 맛이 나네요. 바로 다음 큐를 잡을까요?”
[네. 바로···두리쉬마님? 갑자기 왜? 예? 잠깐만요. 그게 무슨···?]
“강민식님? 무슨 일이에요? 강민식님?”
연결이 끊어졌다. 율리아가 강민식의 이름을 불러보았으나 대답은 없었다.
“···뭐지?”
두리쉬마님의 이름이 나온 걸 보면 무언가가 습격을 당한 건 아니다. 아무래도 두리쉬마님이 강민식이 필요한 일이 생긴 모양이다.
“···아쉬운데.”
쩝, 홀로 큐 한 판을 더 돌린 그녀가 깔끔하게 승리를 챙기고 거실로 나왔다. 김우진이 초밥을 먹고 있었다.
“앗! 치사하게 혼자 드세요? 제 거는요?”
“아까 물어봤는데 안 먹는다며.”
“···제가 그랬다고요?”
“컴퓨터 압수.”
“아, 왜 그러세요.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적당히 좀 해라, 적당히 좀.”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요.”
율리아가 익숙하게 김우진의 앞에 앉아 초밥을 먹기 시작했다.
“맛있네요.”
“비싼 거니까. 커뮤에 인증 샷 올린 거 너지.”
“그걸 벌써 보셨어요? 저한테만 뭐라고 할 게 아니라 소장님도 커뮤 중독이네요.”
“온 커뮤에 다 퍼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
“와, 역시 인터넷.”
능청스럽게 감탄하는 그녀의 모습에 김우진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더 터치하지 않았다.
종말이 일어나고 용사들이 활약한 시점에서 그 정도의 일탈은 허용 범위였다. 율리아도 그걸 알기에 적당히 장난친 거고.
“그런데 그놈, 정말로 여장 시킬 거냐?”
“본인이 알아서 하겠죠. 딱히 생각은 없어요. 보고 싶지도 않고.”
“오늘 어디 간다며?”
“오랜만에 세이드를 보러 가려고요.”
세이드는 여전히 글라크에서 잘 살고 있다. 이그라실의 여왕과 결혼하면서 가정과 새로운 고향이 생겼고 아르반에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신이 아니고, 신이 될 가능성도 당장은 없으며 본인 또한 딱히 희망하지 않았기에 가끔가다 김우진이나 율리아, 알베니우스가 만나러 가고 있었다.
“갈 때 선물 사가.”
“선물이요?”
“남의 집에 갈 때는 빈손으로 가는 거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거기서 구할 수 없는 것들 좀 몇 개 가져가려고요.”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거 가져가서 문명 망치지 마라.”
“에이, 당연하죠. 저를 뭘로 보시는 거예요?”
“덜렁이.”
“저도 명색이 주신이거든요?”
초밥을 마저 삼킨 율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뭐.”
“칵테일이요. 밥을 먹었으면 한 잔 해야죠.”
“맡겨놨냐?”
“에이, 저희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저 앞에 있거든요?”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김우진이 투덜거리면서 칵테일을 만들어주었다. 신선한 라임과 애플 민트를 섞은 모히또였다.
“아, 그러고 보니 강민식님이 두리쉬마님한테 잡혀간 것 같던데요.”
“빠르네. 강민식이 필요하다고 해서 알아서 하라고 하긴 했는데.”
“그게 언젠데요?”
“두 시간 전?”
“타이탄의 행동력은 역시 대단하네요.”
그 정도면 김우진에게 말하고 곧장 강민식에게 달려간 수준이었다.
“잘 먹었어요!”
“세이드한테 안부 전해줘.”
“네.”
식사를 마친 율리아가 짐을 챙겼다. 아공간에 이것저것 넣은 뒤, 오랜만에 지구의 옷이 아닌 아르반의 옷을 꺼냈다.
“가볼까.”
차원의 방벽을 열었다.
* * *
“정말로 세계수의 씨앗이군요. 이걸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이그라실의 여왕, 넬리아 이그라실이 흥분을 숨기지 못했다.
글라크에는 세계수가 없다.
본래는 존재했으나 종말의 겁화를 피하지 못하고 불타 사라졌다.
엘프들에게도, 글라크의 모든 인류에게도 재앙이었다.
종말의 불길은 대륙 전 차원을 휩쓸었고 대륙 대부분을 집어 삼켰다.
마기가 대지를 침식했고 인류에게 허용된 공간은 더 없이 작고 초라해졌다.
용사 김우진에 의해 종말을 막았고, 절대신 김우진에 의해 마기가 완전히 정화되었지만 한 번 피폐해진 대지의 기운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드넓은 대지는 그야 말로 그림의 떡이었고 인류는 어떻게든 지기를 회복시키고자 했지만 대륙은 넓어도 너무 넓었다.
그런 상황에서 율리아가 가지고 온 세계수의 씨앗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세계수가 뿌리를 내리고 대지를 살피면 메말랐던 토지가 다시 비옥해지는 건 시간문제니까.
당연히 엘프로서 다시 세계수를 모실 수 있다는 행복도 함께였다.
“감사합니다. 신께서 은혜를 내리지 않았다면 저희는 다시 어머니 나무를 모실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겁니다.”
“아니에요. 굳이 제가 아니어도 어머니 나무의 씨앗은 글라크에 돌아왔을 거예요.”
세계수는 차원의 방벽에 간섭할 수 있다. 때가 되면 방벽을 열고 하이엘프에게 씨앗을 들려 내보낸다.
그것이 세계수들이 번식하는 방법이며 율리아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세계수의 씨앗을 단 하이엘프가 당도했을 거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씨앗과 함께 영약들을 가져왔어요. 글라크의 사정상, 아무런 방비 없이 어머니 나무의 씨앗이 발아하면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
세계수는 발아하면서 주변의 마나를 끌어당긴다. 그 한 차례의 폭풍을 견뎌내야지만 선순환이 시작된다.
하지만 피폐해진 글라크에게 있어 첫 폭풍은 재앙이나 다름 없었다.
“감사합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여왕님도 저한테는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하지만 주신께 어찌···.”
“음, 너무 강요하는 것도 오히려 이상해지네요. 그럼 그냥 편하실대로 하세요.”
“예.”
씨앗은 대륙의 정중앙에 심어졌다.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대륙을 복구하기 위한 최적의 위치였다.
세계수를 중심으로 수림이 형성될 거고 나아가 대지 전역에 뿌리를 내릴 거다. 그리고 엘프들은 이곳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리겠지.
세계수를 심은 율리아가 신력을 주입해 더욱 발아를 가속화한 뒤, 근처에 앉았다.
“고맙다.”
“당연한 거를 가지고 뭘.”
세이드가 다가왔다.
“행복해 보이네.”
“나쁘지 않다.”
“나랑 아르반은 다 잊어버리고.”
“뭐냐, 그 허접한 멘트는?”
“아니, 그냥 적당히 행복한 걸 바랐는데 너무 행복해보여서.”
“뭐라고?”
“둘이 사랑을 속삭이는 걸 보여줄 필요는 없잖아.”
“너와 김우진 놈이 본 거지, 내가 보여준 거냐?”
세이드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율리아카 쿡쿡거리며 웃었다.
“선물 가져왔어.”
“선물?”
율리아가 아공간에서 상자를 꺼냈다.
“이게 감자칩이라는 건데···.”
“맛있군.”
“끝내주지?”
“그 정도까지는···.”
“이건 컵라면이라는 거야.”
“신기한데.”
“맛은 더 신기할걸.”
“···환상적이군. 그 지구라는 곳의 음식인가?”
“응.”
“김우진이 그렇게 그립다고 했던 라면이란 것의 맛이 이랬었군.”
확실히 그리워할만 하다. 세이드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콰르르르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대지가 들썩였다. 자라난 싹이 순식간에 거대하게 솟아났다.
“···미친. 이거 맞는 거냐?”
“맞아.”
결코 평범하지 않은 발아였으나 릴리와 나르에 익숙해진 율리아에게는 이제는 당연한 과정이었다.
세계수는 흡사 천년을 산 거목만큼 자라났다.
- 끼잉
그리고 자그마한 다람쥐가 나타났다. 율리아의 어깨 위로 올라가 뺨을 부볐다.
“···정령체가 벌써?”
“뭘 그렇게 놀라. 신이 개입했는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
“이게 당연하다고?”
세이드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율리아가 픽 웃었다.
그녀가 다람쥐를 쓰다듬었다.
“어머니 나무님, 당신의 이름은 레니에요.”
- 낑?
“마음에 드세요?”
- 낑낑!
다람쥐 레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나무에게 이름을 붙여?”
“세이드는 이곳에 갇혀 있어서 잘 모르나 본데 이게 요즘 트렌드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대체 어떤 엘프가 감히 어머니 나무께 이름을 붙이는 거냐!”
“나.”
“······.”
“그리고 소장님? 세이드도 뒤쳐졌네. 세상과 접촉할 필요가 있어 보여.”
“···김우진이 널 버려놨군.”
제기랄, 이래서 둘이 만나게 두면 안 되는 건데.
“김우진과 좀 떨어져라. 놈은 썩은 생선과 같아서 함께 하면 악취가 벤다.”
“이미 동거하는데?”
“동거?”
세이드의 눈이 커졌다.
“난 이 결혼 반대다!”
“뭐래,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김우진 데려와! 이 개 같은 놈을 내 손으로···!”
“세이드가 질 것 같은데.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주신들 전부 그 집에 사니까 오버하지 마.”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잘 들어라. 김우진은 늑대다. 그놈은 탐욕스러운···.”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족의 정에 율리아가 웃고 말았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머물던 율리아가 지구로 돌아갔다.
【종말 이후, 신흥 종교 절대신교의 교세가 더욱 폭발적으로···.】
【절대신교의 교주는 각성자들이 절대신의 가호라고 주장하며···실제로 마지막 종말에 죽은 절대신교의 교인들이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뭐예요?”
“또 사고쳤다. 진짜 저걸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저는 오직 절대소장신님의 신앙을 퍼트리기 위한 충심과 믿음으로···.”
“닥쳐.”
“네! 명하신다면!”
그리고 집 한 구석에서 무릎을 꿇고 양팔을 들어 올리고 있는 디아네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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