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146화 (146/150)

# < 외전. 지구의 종말(16) >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당연히 종말에도 마찬가지다. 종말 자체가 차원의 끝을 의미하지만 그 종말에도 마지막이 존재한다.

하지만 지구의 종말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종말 차원으로 넘어온 신들의 군단.

연옥.

백신전.

그리고 지구.

프로니우스는 네 개 중 하나라도 확실하게 박살내기를 바랐고 그에 따라 지구를 찾아온 마물들의 질과 양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신들에게 있어 몇 만, 몇 십 만의 마물은 그다지 어려운 게 아니다. 몇 백 만, 몇 천만이 몰려 있어도 어찌 어찌 막아낼 수 있고, 막아냈다.

하지만 피조물들은 달랐다. 그들에게는 마물 한 마리, 한 마리가 버거운 상대고 수천 만의 마물들은 재앙, 그 자체였다.

“···하, 프로니우스를 너무 쉽게 죽였어.”

다른 세 개의 수작을 막고 마지막을 끝내기 위해 지구에 온 김우진이 왔을 때, 지구는 난장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일반적인 차원의 종말들은 한쪽에서 한쪽으로 이어진다.

북부에서 마왕이 일어나 남하한다거나, 서부에서 광룡이 미쳐 동진한다거나.

하지만 지구의 종말은 달랐다. 지구인에게 더 없이 친숙한 게임의 방식을 차용한 만큼 스테이지와 게이트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게이트는 한 곳에서만 열리는 게 아니었다. 50개가 넘어가는 게이트들이 전 세계에 퍼져 다수의 전장을 형성했다. 거기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 싶을 때, 격랑이 밀려왔다.

지구 전체를 뒤덮다 시피한 균열들.

수십 개, 수백 개 수준이 아니었다. 수만 개. 그 모든 균열에서 마물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107명의 용사들은 한 차원을 지키기 위해 있기에는 지나치게 많았지만 지구가 맡이한 특수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부족해보일 지경이었다.

대체 프로니우스가 안배해 놓은 마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여전히 균열들에서는 마물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릴리, 나르. 되겠어?”

- 응.

- 응.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김우진의 집 정원에 심어진 두 개의 가지가 뻗어나가 거목으로 성장했다. 마법과 권능으로 인해 사람들의 시야에는 보이지 않지만 세계수들의 분신은 금세 뿌리를 내려 지구의 핵에 도달했다.

그리고 간섭을 시작했다.

세계수를 세계수라 불리게 만든 권능. 부족한 지구의 마력을 본체로부터 충당하며 빠르게 방벽 수복에 들어갔다.

어차피 프로니우스의 권능을 만든 균열들이다. 한 번 벌어진 균열을 다시 닫으면 다시 벌어질 일은 없다.

두리쉬마와 106명의 용사들이 날뛰고 있는 이상, 피해는 다소 있겠지만 종말을 막는 건 기정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나쁘기만한 상황은 또 아니다.

이번 일로 무수히 많은 마물과 피들을 삼킨 지구의 수명이 대폭 늘어났으니. 지구의 종말은 적어도 꽤 오랫동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다.

“흠.”

김우진은 지구의 집으로 돌아왔다. 스마트폰을 켜고 커뮤니티를 살폈다.

[십년감수한 사람]

[그건 바로 오늘 아침에만 해도 괴물한테 잡아먹힐 뻔한 나. 하지만 정의의 말뚝이 가면이 구해줘서 삼. ㄹㅇ십년 감수]

↳다행이네

↳괴물들 거의 다 정리 되가는 듯?

↳괴물 입 냄새 심함?

↳산속에 방치된 이동형 화장실 냄새 남. 똥 찌들고 썩은 내

↳존나 디테일 하네 ㅋㅋ

↳밥 먹는데 똥 이야기를 하네ㅡㅡ

[세계 구원 99%]

[미국, 남미, 유럽, 오세아니아, 아시아에 있는 모든 균열 닫혔다고 함. 아프리카도 거의 완료. 에티오피아 밀림쪽에 조금 남은 듯?]

↳ㄴㄴ에티오피아가 아니라 나이지리아임.

↳와, 그럼 진짜 끝이네?

↳ㅈㄹ이 새끼 구라임 나 지금 모나코인데 균열 있잖아 ㅅㅂ

↳균열이 있는데 커뮤를 한다?

↳믿겠다. 넌 한국인이 맞군

↳한국인이라면 그럴 수 있지

[??:크와아아아]

[존나 쌘 말뚝이탈이 울부지졌따! 다 주겄따!]

[동영상]

↳와 존나 살벌하네

↳망치질 한 방에 다 뚝배기가 깨지네

↳망치가 왜 커졌다 작아졌다 함? 무슨 원리임?

↳팜입자

↳개미망치임?

↳다른 각성자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듯

↳근데 어떻게 한 방을 못 버티냐

↳버틸 줄 아는 괴물들은 두 방에 죽었기 때문에

↳ㅇㄱㄹㅇ

↳와 그걸 몰랐네

[101명의 백정들]

[백정탈들도 ㄹㅇ미쳤는데? 조직적으로 연계하면서 괴물들 휩쓸고 다님.]

[동영상]

↳말뚝이탈이 힘으로 다부수고 다니면 얘네들은 빠르게 약점만 공략하는 느낌이네

↳ㅇㄱㄹㅇ픽 하니까 그냥 죽네 약점을 어케 알았지

↳쟤네 마물 퇴치의 스페셜리스트임. 쟤네들보다 상대 잘하는 놈 없음

↳그걸 남궁형이 어찌 아시오?

“···강민식이군.”

적당히 커뮤를 살피던 김우진이 스마트폰 화면을 끄고 눈을 감았다. 잠시 기감을 느끼고 다시 떴다.

“상황 어때요?”

“거의 끝났다.”

완벽한 마무리 단계다. 지구에 열린 거의 모든 균열들은 닫혔고 튀어나온 마물들은 용사들에 의해 학살당하고 있다.

107명의 용사들을 동원한 만큼 피해도 최소한으로 줄였으니 제법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김우진이 부엌으로 가 술들을 꺼냈다. 능숙하게 여러 술과 얼음을 넣고 쉐이커를 흔들었다.

검은 빛의 액체가 유리잔을 가득 채웠다.

“엑, 냄새가 이상한데요?”

“냄새만 이상할까.”

코를 들이밀고 킁킁 거리던 율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독이잖아요! 그것도 진짜 지독한 독. 강민식님한테 얻은 거죠?”

“맞아. 스피리타스에 놈이 정제한 독을 한 방울 떨어트렸지.”

“···설마 저를 암살하시려고? 토사구팽?”

“헛소리 하지 마.”

“그럼 제건 어딨는데요?”

“만들어 먹어.”

“할줄 모르는데요?”

“귀찮은 거겠지.”

쿵-

그때 집 밖에서 굉음이 들렸다. 집이 요동치고 곧 현관이 열렸다.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말뚝이탈과 양반탈, 각시탈이 들어왔다.

“끝났다.”

말뚝이탈의 망치가 자연스레 사라졌다.

“세계수들 덕분에 모든 균열이 완벽하게 닫혔고 침입해 들어온 마물들을 모조리 박멸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원 없이 마물들을 때려잡아 보는군.”

“그래 보이십니다.”

김우진이 딱 맞춰 만들어 놓은 칵테일을 내밀었다. 시커먼 색깔에도 두리쉬마가 별 의심 없이 들이켰다.

“···좋군. 지금까지 네가 만들어주었던 그 어떤 술보다 낫다.”

“네, 그러시겠죠.”

역시 술이 아니라 독을 먹인다는 게 좋은 선택지였다.

“다시 한 번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긴 했지. 이런식으로 싸워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나더군.”

“두리쉬마님이 아니었다면 이곳은 난장판이 됐을 겁니다.”

그가 아니어도 막기는 막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처럼 적은 피해로 막기는 힘들었을 거다.

두리쉬마 홀로 활약한 것이 다른 용사들의 모든 활약과 비견될 정도니.

“한 잔 더 있나?”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김우진이 스피리타스를 꺼내 쉐이크에 넣고 강민식의 독을 섞었다.

“기다리고 있던 걸 보니 잘 끝난 모양이군.”

“예. 프로니우스는 죽었고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연옥도, 백신전도, 지구도 모두 안전합니다.”

“다행이군.”

쪼르르, 김우진이 빈 술잔을 채웠다. 두리쉬마가 단숨에 들이켰다.

“그 차원룡은 어땠나?”

“마지막까지 복수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습니다.”

“···그렇군.”

두리쉬마가 씁쓸하게 웃었다. 프로니우스는 과거의 두리쉬마였다. 두리쉬마는 그를 통해 과거의 자신을 보았다. 누군가 그를 이해한다면, 오직 이 세상에 두리쉬마만이 가능할 것이다.

태초부터 글러 먹은 알베니우스는 논외로 치고.

“내가 미쳐 날 뛸 때는 네가 없어서 다행이다.”

“미쳐 날뛰시긴 하셨습니까?”

“···사소한 건 넘어가는 게 이로운 법이다.”

“저기, 말씀중에 죄송한데 전혀 사소하지 않은데요?”

“너에게 말하지 않았다, 엘프.”

두리쉬마가 율리아의 말을 일축했다.

빙글, 빈 술잔을 돌리며 물었다.

“지금 바쁜가?”

“따라드리겠습니다.”

“혹시 죽은 신 있나?”

“없습니다.”

“아쉽군.”

“굳이 신이 되지 않으셔도 괜찮지 않습니까?”

용사가, 집행자가, 신이 되어야지만 신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일반적인 자들과 달리 두리쉬마는 태생부터 우주의 힘을 품은 타이탄이었다.

굳이 신이 되지 않아도 신 이상이 될 수 있으니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물론보다 험하고 오래 걸리는 길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것도 옛날이야기다. 쉬운 길이 있다면 굳이 돌아갈 필요가 없지.”

“그건 그렇죠.”

“어쨌든 공석은 없다는 거군.”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그리고 김우진이 보기에 더 이상 프로니우스 같은 사태가 일어날 일은 없었다. 그가 새로운 업보를 쌓거나 신들이 쌓아올린 업보가 또 있지 않는 이상.

“···없겠죠?”

“포이닉스나 가루다들의 생존자가 남아 있지 않는 이상은 그럴 거다. 어쩌면 생존자가 남았어도 나처럼 해탈했을 지도 모른다.”

“하긴, 그것들이 죽은지는 두리쉬마님보다도 한참 됐으니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망각과 감정의 풍화는 모든 종족에게 동일하니.

“어쨌든 한시름 놨군요.”

“그래. 나는 앞으로 종말이 일어나는 차원들을 좀 찾아다녀야겠다.”

“종말을 맞이하는 차원들이 좋아하겠네요.”

김우진의 시선이 두리쉬마 뒤에 쭈구리처럼 서 있는 두 용사에게 향했다.

“고개 아프다. 앉아라.”

“예!”

“예!”

두 용사가 자리에 앉았다.

“술은 많으니까 먹고 싶은 걸로 알아서 따라 먹고.”

“예!”

“예!”

“두리쉬마님, 이녀석들 어땠습니까?”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지구에 잘 적응하기도 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괘씸하긴 해.”

두 용사의 동공이 흔들렸다.

“하지만 한 번 뱉은 약속은 지킨다. 약속대로 연옥에 가두지도, 모든 것을 앗아가지도 않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탁, 김우진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용사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두 번은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저도 명심하겠습니다!”

김우진이 휘휘 손을 저었다. 두 용사들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사라졌다.

어지간하면 앞으로 다시 볼 일 없겠지.

“연옥의 소장님이 아쉬워하겠네요. 굴러들어온 죄수들이 사라져버렸으니.”

“두 명 쳐줘.”

“정말요?”

“이건 특별한 경우니까. 일종의 천재지변이지. 원래 천재지변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야.”

“알겠어요.”

김우진이 티비를 틀었다.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30분 전인 오늘 오후 8시 29분경을 끝으로 모나코의 마지막 게이트가 닫혔습니다.】

【이로서 다섯 번째 게이트 사태가 끝났습니다.】

【이번 사태는 이전과는 다른 전 세계적인 재앙이었으나 각성자들의 활약과 각 국가의 유연한 대처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갑자기 나타난 101명의 새로운 각성자들은 모두 백정탈을 쓰고 있어 일명 101명의 백정부대로 불리며···.】

【···마지막 게이트를 닫음과 동시에 사라졌습니다.】

【···한국 정부는 이들의 도움에 감사하며 또 다시 재발할 게이트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이들의 신원을···.】

【예상보다 피해가 적을 뿐, 전 세계적인 피해는 어마어마합니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입니다. 파리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괴물들로 인해···.】

【교토의 목재 건물들은 불을 뿜는 마물의 등장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해 더 큰 피해를···.】

【대다수의 게이트가 사막에 열렸던 호주는 비교적 도시의 피해가 적어···.】

【UN은 이번 사태로 말미암아 더 이상 개인적인 대처가 아니라 범지구적인 협력 체계로···.】

종말은 완전히 끝났다. 인류는 앞으로 재건을 위해 애쓸 것이다.

피해가 생각보다 적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피해가 아예 없는 건 또 아니니까. 김우진은 마음속으로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저승이란 건 없다. 그들은 우주의 어느 차원인가로 넘어가 환생하게 될 거다.

그곳은 종말이 한참 남은 곳이길.

‘그게 지군가?’

당장 지구보다 종말이 늦게 오는 차원은 없을 것 같은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중얼거렸다.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려나?”

“힘들 걸요.”

마물과 종말을 맞은 차원이 이전과 완전히 같게 회귀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난 예전의 평온한 지구가 좋은데.”

“그래도 더 이상 종말이 일어나지는 않을 테니 평화롭겠죠. 아마 한동안 떠들다가 게이트가 다시 안 열리면 서서히 조용해지지 않을까요?”

“하긴, 그렇겠지.”

결국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종말도, 마물도, 각성자들도.

모두 잊혀지고 교과서나 역사서에 좀 실리고 말겠지.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상을 살 거다.

물론 그전에.

“조금 더 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보채야지.”

“어떻게요?”

“이렇게.”

따악-

김우진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프로니우스가 만들었던 타이머가 떠오르던 그 자리에 새로운 글씨가 새겨졌다.

[Final Stage Clear]

[End Is Over]

종말의 종료를 선언했다.

외전. 지구의 종말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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