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145화 (145/150)

# < 외전. 지구의 종말(15) >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예외가 있다면 화염을 견딜 만큼의 초인 정도.

프로니우스는 화염을 완전히 견딜 만큼 육체가 단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번에 휩쓸릴 만큼 나약하지도 않았다.

비록 그 불의 파도가 그가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해도.

화염의 파도가 사그라든 그 자리에, 프로니우스는 살아 있었다.

육신이 반쯤 녹아내린 모습은 아무리 좋게 말할래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살아만 있을 뿐,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회광반조. 놈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저 드높은 격으로 간신히 떠나가려는 영혼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김우진이 다가갔다. 눈이 마주쳤다.

“흐하하하하하···!”

프로니우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미친 듯이, 정말 미친 듯이 웃었다.

“김우진.”

그리고 한 순간, 웃음이 뚝 그쳤다. 놈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반쯤 녹아내려 더욱 흉측했다.

“김우진, 김우진, 김우진, 김우진, 김우진, 김우진!”

갈라진 성대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네가! 네가 백신전을 삼키기 전에 내가 먼저 나섰어야 했다. 씨앗부터 널 밟았어야 했어!”

분노, 슬픔, 자괴감, 억울함, 증오, 허탈함까지. 무어라 콕 찝어서 형언할 수 없는 한이 놈의 눈에 맺혔다.

“너를 죽이고 백신전의 세 멍청이들과 싸워야 했다. 그랬다면···!”

“이제와서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그래, 그렇겠지.”

프흐흐흐, 그렇게 기다려온 결말이 고작 이건가. 프로니우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프로니우스.”

“알베니우스.”

프로니우스가 입술을 짓이겼다.

“너는 종족의 배신자다.”

“······.”

“동족을 몰살시킨 신들과 손을 잡고 종족의 대의를 막아섰다. 그리고는 결국 실패하게 만들었지.”

마지막 동족이라는 정이 너를 살렸다.

“그 어리석은 판단이 지금 날 죽이는군.”

뿌드득, 프로니우스가 이를 갈았다. 증오와 분노가 뒤섞여 알베니우스의 피부를 찔렀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여기서 쓰러지지 않았을 거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끝끝내 백신전을 무너트렸을 것이다!”

네가 아니었다면!

“동족의 한 또한 풀었을 거란 말이다!”

“···미안하다는 소리는 하지 않아. 네 복수에는 내 미래가 없었으니까.”

“동족을 위한 복수였다!”

“나는 네 동족이 아닌가? 결코 나를 위한 복수는 아니었지.”

“동족을 위한 것이 너를 위한 것이었다. 동족이 없는 세상에 미련이라도 있다는 거냐!”

“다시 만났을 때도 그 소리를 했었지.”

알베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족은 동족이고 나는 나다. 이미 죽은지 한참 된 동족을 따라가기 위해 자살하기도 싫고, 그 복수에 휘말려 아무 의미없이 미래를 잃어버리기도 싫다. 드래곤들이 언제부터 동족애, 가족애가 들끓었다고.”

“아무리 가족애가 부족하다고 한들 동족애는 있다. 해츨링 하나가 당하면 모든 성룡이 나서는 게 우리였다. 헌데 수백의 해츨링들까지 모두 죽었다.”

“그래서 이미 수만 년 전에 죽어버린 자들을 위해 이 세상 전체를 부수자고? 그러면 가만히 살고 있는 다른 종족들은? 그들은 무슨 죄가 있지?”

“왜 죄가 없지? 백신전의 치하 아래 복종하며 살고 있는 대죄가 있는데.”

“뭐라고?”

“왕이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 책임은 그 나라에 전체에 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우가 좀 달랐다.

“궤변이군. 신들의 존재도 모르고, 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피조물들이 태반인데.”

김우진이 픽 웃었다.

“넌 그냥 남탓을 하고 싶은 거네.”

“내 복수의 정당함을 말하는 거다.”

“나도 정당해. 난 이 세상을 지킬 의무가 있어서 널 막을 의무도 있거든.”

프로니우스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사나운 눈빛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김우진, 그리고 알베니우스. 죽어서도 너희들을 저주하겠다.”

놈의 시선이 다시 알베니우스에게 닿았다.

“동족을 위해서 복수를 다짐했건만, 동족으로 인해 복수를 이루지 못하다니.”

이 무슨 궤변인가.

그 말을 끝으로.

프로니우스가 눈을 감았다.

그에게 쌓인 업이 그대로 김우진에게 흡수되었다.

“심란해 보이십니다?”

“심란하지.”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놈과는 그냥 가는 길이 달랐던 거고 난 지금의 우주가 마음에 드니까.”

“좋은 마인드네요. 근데 용케 도망 안 치셨습니다? 평소였다면 진즉에 빤스런 했을 텐데.”

“내가 언제 도망을 쳤다고?”

“한 번 나열해 봐요?”

“나 덕분에 프로니우스를 잡은 걸 잊었나 보지?”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아닌 건 아닌거죠.”

“이런 양아치 같은 놈이!”

김우진과 알베니우스가 투닥거리며 낄낄거렸다.

“저기요? 두 분? 아직 전투가 끝난 건 아니거든요? 왜 둘이서 청춘영화 마지막 장면을 찍고 계시죠?”

마물 수백을 한 수에 갈라버린 율리아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둠의 사도가 죽었다고 한들 마물의 정신에 새겨진 파괴 본능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물들은 여전히 살아 신과 집행자들을 공격했다.

“알베니우스님을 부려먹어. 난 완전히 탈진이야. 전력을 다했다고.”

“나도 마찬가지다.”

“알베니우스님은 도주로 차단 말고 한 게 없잖아요.”

“프로니우스의 도주로를 차단하는 게 어디 쉬운지 아나?”

“쉬워보이던데요.”

“근데 왜 넌 하지 못했지?”

“전문가가 있는데 제가 왜 합니까?”

“뭐, 임마?”

“그럼 알베니우스님이 직접 싸우시지 그랬어요.”

“그러려고 했는데 네가 나선 거다.”

“와, 말이나 못하면.”

“뚫린 게 입인데 말을 못하면···.”

“그러니까 두 분! 전투 아직 안 끝났다고요! 엔딩 크레딧 내리지 말라고요!”

율리아가 소리쳤다.

“쟤도 지구에서 살더니 영화랑 드라마를 너무 오래 봤군.”

“게임에 더 미쳤습니다.”

“어쩐지, 눈이 퀭하더니.”

결국 김우진과 알베니우스는 모든 마물들이 토벌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 * *

프라니우스와의 격전이 끝난 군단이 백신전으로 귀환했을 때, 백신전의 전투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마력포로 거의 절반 가까이 되는 마물들을 박멸하고 시작한 전투는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승패가 정해져 있는 싸움이었다.

“내가 뭐라고 했나!”

마력포의 화력 앞에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마물들이 많았다.

데르카인은 그런 흔적들을 마저 정리하며 자화자찬했다.

“아무리 백신전이라고 해도 언젠가 침략 받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유비무환! 마력포로 대비를 해놓으니까 이렇게 적은 피해로 적들을 막았지 않나.”

“이번에는 부정할 수 없겠군요.”

“이번에는 이라니? 쓸데없는 사족 달지 말게. 기면 긴거고 아니면 아닌 거네.”

그런 의미에서 말이네.

“이번 사태로 무언가 느끼는 게 없나?”

“느끼는 거요?”

“자네가 그랬지. 절대 백신전까지 침공당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지만 어떻게 됐나?”

“하고 싶으신 말이 뭡니까?”

“그러니까 축약하자면 더 강한 화력이 필요하다는 거네. 백신전을 지키기 위해서! 들어보게. 내가 이번에 지구의 양자공학과 물리학, 기계공학, 항공우주공학, 신소재공학, 반도체, 화학을 배우면서···.”

“뭘 그렇게 많이 배우셨습니까?”

“쓸만하다 싶은 건 다 배웠네. 자고로 배움에는 끝이 없으니까.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새로운 경지에 눈을 떴네.”

“새로운 경지라면?”

“단순히 쏘고 나가는 마력포가 아니라 쏜 뒤에도 자유자재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마력 미사일! 정령지능을 탑재해서 실시간으로 정보와 좌표를 계산하고···.”

“안됩니다.”

“···내 말을 들어보라니까? 이번 마력미사일은 기존의 마력포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연옥에 깔린 마력포만 백만 개입니다. 그 이상으로 늘리고 싶으면 기존의 마력포를 철거하고 만드세요.”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자식을 내치라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나!”

“자식도 아니고 이미 지나치게 많습니다.”

“마물들이 쳐들어 온다니까!”

“오늘 같은 일은 또 없을 겁니다.”

“있으면?”

“있어도 마력포가 백만 개니 어떻게든 되겠죠.”

“이런 무책임한! 자네 같은 마인드가 방산업계를 병들게 하는 거네!”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불경입니다! 절대소장신님의 말에 따르세요!”

“광신도는 좀 닥치고 있게.”

“마땅히 섬겨야할 분을 최선을 다해 섬기는 일이 광신도라 불리는 일이라면 저는 기꺼이···.”

“자네랑 할 말 없으니 비키게.”

“아뇨, 저랑 이야기하시죠. 절대소장신님께서는 바쁘십니다.”

김우진은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데르카인을 디아네에게 떠넘기고 나니 이번에는 달의 늑대가 푸념했다.

“저도 소장님을 따라갈 걸 그랬습니다. 저 빌어먹을 쇳덩이들이 대부분을 해결할 줄이야.”

“이쪽으로 오셨으면 실컷 싸우시긴 했을 거예요. 마물들이 진짜 많았거든요.”

“끄응, 소장님이 직접 싸우면 지난번처럼 나설 수 없다고 판단해서 남은 건데···.”

“동감입니다. 마물들이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요리용으로 쓸만한 게 희박하네요. 아, 우울해.”

김우진은 여러 신들을 상대해주며 차원을 살폈다.

“죽은 신들은 있습니까?”

“죽을 뻔한 놈들은 있어도 죽은 신은 없네. 자네는?”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집행자는 177명이 죽었네.”

“저희 쪽은 278명이요.”

신들은 격이 달라 어찌 어찌 목숨을 보살폈다고 해도 집행자들은 달랐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마물들은 결코 가벼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나마 두 전장 모두 김우진의 불꽃과 마력포라는, 마물들의 물량을 어느 정도 커버할 수단이 있어서 이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 마무리 좀 해주세요.”

“연옥에 갈 생각인가?”

김우진이 율리아와 함께 연옥으로 향했다. 연옥 또한 전투가 끝나 있었다.

- 먹어! 다 먹어!

- 먹어!

마물들로 인해 균열이 일어난 차원의 방벽은 빠르게 수복 중이었고 산처럼 쌓인 마물들의 시체는 정령들이 달라붙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있었다.

- 소장!

- 소장!

정령들을 지휘하던 두 세계수가 김우진을 발견하고 날아왔다.

- 막았어!

- 완벽하게!

“잘했어.”

두 세계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김우진이 두 정령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부스스한 얼굴의 시에나가 나무 위에서 툭 떨어졌다.

“하암, 왔니?”

“···주무셨어요?”

“내가 나설 필요가 전혀 없어 보여서.”

“그래 보이긴 하네요.”

정령들의 수가 김우진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

“와, 역시 어머니 나무님들이네요.”

- 에헴.

- 에헴.

두 정령이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는 더 볼 것도 없겠는데요?”

“릴리, 나르. 뒤처리 확실하게 부탁해.”

- 어디가?

“지구. 지구도 한 번 확인해봐야지.”

혹시나 해서 대비를 해놓긴 했지만 반드시 올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아까 프로니우스가 했던 말을 들어보면 이미 지구는 침략 당하고 있었다.

“율리아, 거기에 용사를 얼마나 보냈다고 했지?”

“101명이요. 전부 이전 백신전과의 전투에 참가했던 분들이에요.”

“아, 알베니우스님 때문에 종말 차원에서 떠돌던?”

“네.”

“그놈들이라면 믿을 만 하지.”

어떤 용사보다 마물에 대해 해박하고 많이 죽여본 스페셜리스트들. 지구 출신도 아니기에 감당해야 할 업도 없다. 그렇기에 딱 적절했다.

“릴리, 지금 지구는 어때?”

- 아직 전투 중.

“그러면 네가 좀 도와줄 수 있겠어?”

- 음. 아직 부족해.

“그러지 말고. 뿌리 적당히 내렸을 거 아니야? 나르랑 같이 방벽 강화해서 더 못 들어오게 만 해주면 돼. 어차피 프로니우스는 죽어서 더 이상 진행되지는 않을 거거든.”

- 그 정도라면.

- 가능해!

그리고 그 순간.

지구에 옮겨 심었던 두 개의 나뭇가지가 개화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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