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외전. 지구의 종말(12) >
마물이 싫다. 마물이 좆같다.
용사가 되었을 때, 아주 지겹도록 잡았다. 토악질이 나올 만큼 죽이고 또 죽였다.
그걸 신이 되어서도 해야 한다고 하니 참 엿 같은 기분이다.
그럼에도 해야만 하니 한다. 그리 위안하며 원정대를 꾸렸다.
60의 신들과 2천의 집행자들이 포함되었다. 명실상부한 우주 최강의 전력.
김우진은 프로니우스가 아니라 프로니우스 할아버지가 와도 결코 이 전력을 막을 수 없다고 자신했다.
프로니우스가 특별할 뿐, 마물들은 결코 신들을 이길 수 없다. 어쩌다 신에 준하는 마물이 한두 마리씩 나오긴 했지만 그뿐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다.
그게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김우진은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간다.”
우주가 탄생한 이래 처음으로 신들로 이루어진 군단이 출정했다.
* * *
종말 차원이란 멸망을 막지 못한 차원들이다.
차원의 피조물들은 모두 죽고, 차원은 황폐화되며, 마물이라는 불법 거주자들이 머무는 곳.
마나 대신 마기가 흐르고, 생명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죽음의 땅.
이 우주에는 그런 차원들이 무수히 많이 널려 있다.
차원은 언제나 탄생하고 멸망하기를 반복한다. 신들은 용사라는 대행자를 통해 차원의 수명을 늘리고자 하지만 모든 것이 성공하는 건 아니다.
비록 실패 확률이 성공 확률보다 낮다고 해도 그게 우주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쌓였다면, 종말 차원은 정말 샐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일부 종말 차원들이 시간이 흘러 완전히 소멸했다는 부분들을 감안 하더라도.
그렇기에 종말 차원에 작정하고 숨어버린 프로니우스를 찾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번 일은 반드시 프로니우스를 찾겠다기보다는 미끼의 느낌이 강하니까. 찾으면 좋고, 아님 말고다.
“그런데 알베니우스님이 아직 대규모 이동은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2천명 정도는 대규모도 아니라더라.”
백신전의 전력은 물량이 아니라 질이다.
50의 신과 2천의 집행자들. 알베니우스는 그들이 넘어갈 여유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긴, 생각해보면 수적으로는 백신전이 참 적긴 하네요.”
“그렇지.”
어지간한 차원에서도 국가 단위의 군대가 한 번 모이면 만은 기본이다. 하지만 그게 백신전이 약하다는 건 아니다.
2천명밖에 없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이다.
진격은 빨랐다. 백신전에 집결한 신의 군단은 곧장 종말 차원과의 접경지역으로 향했다.
알베니우스의 능력을 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여러 차례 신들의 공간의 권능을 이용했다.
그리고 마침내 종말 차원에 발을 들였다.
“없네요.”
“텅 비었습니다.”
“절대소장신님이 오신다는 것을 알고 모두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간 것이지요. 역시 절대소장신님이십니다.”
며칠에 걸쳐 수 십 개의 종말 차원을 살폈다. 하지만 차원에는 마땅히 존재해야 할 마물 한 마리도 없었다.
누가 봐도 이상했고 수상했다.
“네 예상대로 되고 있는 것 같은데.”
“물지 않고는 못 베기는 달콤한 미끼잖아요.”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났다. 또 다시 수십 개의 종말 차원을 확인했다. 여전히 마물은 없었다.
그들은 점점 우주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치지직-
통신구가 신호를 받아들였다. 거리가 워낙 멀고 마나가 없어 노이즈가 잔뜩 끼었다.
[마물···습···! 대···규모···!]
자세한 내용은 말하지 못하고 통신이 끊어졌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백신전과의 직통 통신구였으니.
“드디어 왔네요.”
“알베니우스님.”
“그래. 생각보다 더 깊게 들어와서 20초는 무리지만 1분 안에 끊어보지.”
알베니우스가 권능을 발휘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파직-
스파크가 튀었다. 차원 전체가 일그러졌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침식이 김우진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이건.”
“온다.”
신들과 집행자들이 본능적으로 투기를 일깨웠다.
순간, 균열이 벌어졌다. 수십, 수백, 수천, 수만. 샐 수도 없이 많은 게이트들이 차원 전체를 뒤덮었다.
가히 신기에 가까운 권능.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놈은 한 명뿐이다.
“함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모두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저 멀리 프로니우스가 보였다. 담담한 중얼거림이 모두의 귓가에 아른 거렸다.
“당연히 함정이어야만 했다.”
우주를 지배하는 백신전의 1인자가 멍청하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열이 받으니까.
“그런데 설마 네가 직접 오다니. 정말 멍청한 건가?”
“똑똑한 거지. 이렇게 네가 직접 마중 나오게 만들었으니까.”
김우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 예상보다 반응이 더 격하네? 직접 나온 거 보니 이쪽 방향에 네 본거지가 있는 모양이지?”
“내게 본거지라는 건 의미가 없다. 너도 그래서 온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텐데?”
벌어진 균열들을 통해 마물들이 튀어나온다.
“···맙소사.”
“저게 다 몇이지?”
“아직도 나옵니다.”
“경계를 늦추지 마라.”
끝도 없이.
신과 집행자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오랜 세월 어둠과 싸워왔으나 이렇게 많은 마물들을, 여전히 증식하는 마물들을 한 자리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멍청하지 않다면 예상대로 한 번 더 꼬은 것이겠군.”
“꼬아?”
“이쪽을 미끼로 던져주고 내가 네놈들의 본거지를 빈집으로 알고 치게 하려는 속셈 말이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그게 아니다?”
“네가 여기 있으니···그렇군.”
김우진을 마주보던 프로니우스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믿고 있는 게 신격을 얻은 알베니우스였나.”
아무리 잘 숨겼다고 한들 직접 마주친 이상, 서로의 존재를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멍청한 게 아니라 제대로 된 노림수였구나. 내가 이쪽으로 오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어.”
“아니지, 네가 이쪽으로 와서 더 큰일이 난거지.”
“넌 날 죽일 수 없다. 이곳은 종말 차원이고, 어둠의 앞마당이다.”
아카식 레코드의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마력이 진해진다. 반대로 변방으로 갈수록 마기가 진해진다.
그리고 이곳은 변방 중에서도 변방. 어둠의 힘이 더없이 짙은, 마나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종말 차원이다.
프로니우스와 마물들에게는 홈그라운드이며, 김우진과 신들에게는 최악의 환경.
“오늘 넌 반드시 네 소중한 것들을 잃는다.”
네 목숨이던, 아니면 백신전이던, 차원 연옥이던.
“백신전과 연옥을 치겠다고? 네가 여기 있는 시점에서 가능할 것 같아?”
“전력을 꽤나 남겨 뒀겠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마저 감안하고 보냈으니 상관없다. 내가 어둠의 사도가 된 게 언제인지 아느냐? 두리쉬마를 앞세우면서도 나는 오랫동안, 정말 오랫동안 복수를 곱씹었다.”
그가 어둠의 사도가 되었을 때, 이미 두리쉬마라는 또 다른 사도가 존재했다.
프로니우스는 두리쉬마에게도 자신을 들키지 않기 위해 깊숙이 숨었다. 그리고 조금씩 마물들을 빼돌려 모아왔다.
그게 몇 만 년이다.
“그게 얼마나 되는지 짐작이나 할 수 있나?”
“몇 만 년을 살아보지 않아서.”
“너희들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떤 최악의 종말을 목도할 것이다.”
백신전과 연옥을 시작으로 모든 차원을 무너트릴 거다.
“그리고 더 이상 균형을 맞추게 될 수 없는 아카식 레코드 또한 어둠에 삼켜지리라.”
더 이상 생명체가, 차원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가 된다.
그것이 완전한 종말.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고, 그 누구도 행복해서는 안 되는 완벽한 세계.
“···이거 웃긴 놈이네.”
김우진이 픽 웃었다.
“그렇게 하면 너한테 뭐가 남는데?”
“아무것도.”
“그런데 그렇게까지 한다고?”
“너희한테도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니까.”
그게 중요한 거다.
“내게 얼마만큼 남느냐고 아니라, 너희들에게 얼마만큼 남지 않느냐가.”
“그냥 미친 새끼 아니야?”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지. 신들에 의해 종족이 멸족당하는 그날 이후, 나는 살아도 산 게 아니었으니까.”
가족을 잃고, 종족을 잃은 그를 지탱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백신전과 그들이 이룩한 이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종착점에 다다르기 직전이다!”
“그런 건 날 이기고 난 다음에 해.”
김우진은 굳이 네 복수 때문에 다른 이들을 다 죽이겠다느니, 거기에 의미가 없다느니 하는 말들을 늘어놓지 않았다.
눈이 돌아간 이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심정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단순한 가족이 아니라 종족 전체가 아무런 이유 없이 멸족 당했다면 그 분노가 어떨지 김우진은 상상도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은 이전 주신들과 백신전의 업보다.
그것을 김우진과 다른 신들, 그리고 차원 전체에 전가하여 모두를 죽이겠다고 하는 건 그냥 또라이다.
그렇기에 김우진은 그를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냥 서로의 목적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적이다. 누구 한 명이 죽어야지만 끝이 나는.
“넌 오늘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어.”
“너야 말로 이곳으로 오지 말았어야 했다. 너희는 깨닫게 될 것이다. 신들에게 죽어간 차원룡들의 비통함을, 그리고 남겨진 나의 고통을.”
“헛소리 하지 마.”
백신전과 연옥이 무너진다고?
“내가 아무런 대비도 안 하고 왔을 것 같냐?”
“신이 된 알베니우스를 믿고 있나 본데 소용없다. 이곳에 온 이상, 내 앞에 선 이상 너희들은 누구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해. 나를 죽이기 전까지는.”
그의 시선이 알베니우스에 닿았다. 김우진의 방법은 프로니우스가 직접 오지 않았떠라면 충분히 먹혔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프로니우스가 존재하는 한, 알베니우스의 권능은 사용되지 못한다.
“누가 그래? 이곳에서 벗어날 거라고.”
김우진이 검을 소환했다.
“널 눈앞에 두고 내가 도망칠 리가 없잖아.”
오늘 이 자리는 우리 둘 중 한 명은 죽어야 끝나는 거야.
“들어와, 이 개새끼야.”
김우진이 검을 쥐고 호흡을 내뱉었다. 불꽃이 질주한다.
한 걸음, 내딛는다.
────!
고막이 찢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충격파가 퍼진다. 불꽃과 마기가 뒤섞인다.
그리고.
“공격하라!”
“절대신님을 도와라!”
“절대소장신님을 따라 악들을 토벌하라!”
신과 집행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신이시여. 백신전 근방에 균열이 벌어졌습니다.”
“예상대로군.”
“예, 근데 조금 많습니다.”
“몇 개나 되나?”
“샐 수도 없습니다. 족히 수만 개가···.”
“작정했군.”
집행자가 말끝을 흐렸다.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불안감에 데르카인이 혀를 찼다.
다급히 차원 밖으로 나가 균열을 관측했다. 우주를 가득 메운 균열들 틈으로 마물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데르카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김우진과 이야기가 끝나 있었다. 저들의 기습은 예정된 바, 모든 신들과 집행자들이 모여 있었다.
“멍청한 놈. 하긴, 도마뱀들 대가리가 다 그렇긴 하지.”
“그건 드래곤 혐오 발언입니다만?”
“드워프가 드래곤을 혐오하는 게 뭐 어때서 그런가. 놈들이 뜯어가는 금은보화가 얼마나 많은데! 드워프 사회에서는 도마뱀 혐오가 없으면 진정한 드워프로 처주지 않네.”
그런가? 강민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준비!”
“준비!”
위이잉, 철컥-
데르카인의 명령에 차원 전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자원 전체에 깔린 백만 개의 마력포들이 늘름한 포신을 드러냈다.
“···이걸 진짜 쓰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뭐라고 했나. 공격은 최선의 방어! 마력포는 최고의 방어 시설이라고 했잖은가!”
“아무리 그래도 마력포 백만 제작설이라니···. 그걸 제안하고, 결국 해낸 것도 놀라운데 그걸 쓰는 날이 올 줄이야.”
“말했잖나. 언젠가 반드시 쓸 날이 올 거라고. 그게 무기의 숙명이니.”
차원 대부분을 뒤덮은 거대한 마력포들은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충전!”
“충전!”
“장전!”
“장전!”
우우우웅-
마력포들이 주변의 신력을 빨아들이며 에너지를 충전했다. 그리고 특제 제작된 포탄들이 장전되었다.
그리고.
“발포하라!”
“발포하라!”
──────────────!
백 만 개의 거대 마력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그것은 단순히 마력포 여러 개가 발사된 게 아니었다. 모든 마력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로 결집되며 나아갔다.
마치 마력포 그 자체로 이루어진 차원에서 쏘아내듯, 거대한 빛줄기가 되어 우주를 가로질렀다.
그대로 균열과 마물을 덮쳤다.
──────────────!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비명도 굉음도 없었다.
소멸. 마력포는 모든 것을 쓸어버렸다.
균열의 사분의 일이 날아갔다. 억에 달하는 마물의 반의 반이 소멸했다.
데르카인의 주도 아래, 드워프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만든 요새 차원 백신전이 진정한 위용을 드러냈다.
“···도르크스가!”
그 여파로 제 2의 백신전으로 삼으려고 여러 시설들을 만들던 상위 차원 하나가 흔적도 없이 소멸했지만 작은 해프닝에 불과했다.
미리 비워 놓은 게 다행이었다.
* * *
“정말 여기까지 오다니.”
시에나 올름이 한숨을 쉬었다. 저 멀리 균열이, 마물의 무리가 보인다.
어림잡아 수천만. 정말 지독할 정도로 많은 무리는 군단이 아니라 파도다.
- 멍청이들.
- 멍청이들.
“어머니 나무님들? 할 수 있지?”
- 당연히.
- 응.
- 전부 죽여. 내 영역을 침범한 대가를.
거대한 신력이 꿈틀거렸다.
릴리의 육신이 커졌다. 번개로 몸을 감싼 거대한 비조가 포효했다.
그녀의 곁에 정령체들이 떠올랐다. 차원 전체를 뒤덮은 세계수의 나뭇잎만큼, 샐 수도 없이 많았다.
- 전부 다!
나르가 거대한 백호가 되었다. 호랑이 정령체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 간다!
- 간다!
“든든하네.”
시에나가 화살을 쏘았다. 하나로 시작된 화살은 곧 수 만 개로 증식했다.
그게 신호였다.
마물들이, 정령체들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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