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외전. 지구의 종말(11) >
운이 좋았다.
지구의 집에서 쉬기 위해 지구로 왔고 그 타이밍에 게이트가 열렸다. 마물이 아닌 프로니우스가 직접 등장했다.
놈이 게이트 너머, 지구까지 힘을 투사하는 순간, 김우진은 그 존재를 눈치 챘다.
좋은 기회였다.
그렇게 만나고자 했던 어둠의 사도를 죽이고 이 거지 같은 전쟁을 끝내버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
가장 먼저 달라붙어 있는 두리쉬마와 프로니우스를 떨어트려 놓았다. 그리고 게이트와 프로니우스 사이를 점했다.
불꽃을 일으키며 질주한다.
프로니우스가 권능을 발현한다. 공간이 일그러진다. 기묘한 감각과 함께 감각을 교란시킨다.
처음 당한 자들은 난해할 수밖에 없는 힘이었다. 하지만 김우진에게는 더 없이 익숙한 환경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고 적응하고 버텨낸 전적이 있으니까.
불꽃이 외부의 영향으로 기이하게 굴절했다. 그러나 빠르게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왔다.
“······!”
프로니우스의 권능이 강화된다. 제자리를 찾아갔던 불꽃이 다시 흔들리지만 이미 김우진은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불의 검이 공간을 가른다. 궤적의 끝에 차원룡의 목이 놓여 있다. 새하얀 비늘로 뒤덮인 손이 마중 나온다. 불쑥 튀어나온 손톱이 검과 부딪힌다.
─!
불꽃이 비늘을 불태운다. 프로니우스가 신음을 흘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다음 순간, 다시 한 번 궤적을 그리며 힘을 받은 불의 검이 재차 떨어진다.
─!
마력의 파편이 비산한다. 부서진 비늘들이 떨어져 나간다.
프로니우스가 숨을 들이킨다. 공기와 함께 응축된 마력을 그대로 쏘아낸다.
──!
코앞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불꽃을 밀어낸다. 김우진이 마력을 뚫고 다시 전진하나 그 순간, 분위기가 뒤바뀐다.
새하얀 마나가 시커멓게 돌변한다. 불길한 마기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주인의 머리와 눈을 검게 물들인다.
─!
다시 한 번 검과 손톱이 부딪힌다. 이번에는 그 누구도 밀려나지 않았다.
“그래.”
눈이 마주친다. 똑같이 검으나 두 쌍의 눈동자가 가진 의미는 전혀 달랐다.
“어쩐지 어둠의 사도치고는 더럽게 약하다 했어. 날 상대로 힘을 숨길 여유가 있었다는 거지?”
“없으니까 꺼낸 거라는 생각은 안 하나?”
“이제와서 약자 코스프레 하지 마. 신도 죽인 새끼가.”
프로니우스는 대답대신 다시 한 번 마력을 쏘아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브레스가 김우진을 덮쳤다.
콰득, 검이 숨결을 가른다. 양 옆으로 흩어지며 마기가 폭발한다. 그 사이로 김우진이 다시 질주한다.
“역시 너와는 지금 만나선 안 되었다. 우리의 전투는 지금이 아니야. 기다려라. 내가 다시 찾아올 때까지.”
“웃긴 새끼네. 누가 도망치게 놔둘 줄 알고?”
치열한 접전 속에서도 김우진은 여전히 게이트를 등지고 있었다.
허나, 프로니우스는 담담히 웃었다. 그대로 공간을 찢었다.
“어디 가려고. 네 목숨은 여기 놓고 떠나야지.”
김우진이 공간을 비튼다. 차원룡들에 비하면 못할지언정, 그 또한 공간의 권능을 가진 신을 삼킨 전적이 있었다. 최선은 아니지만 적어도 열린 균열을 비틀어 방해할 수준은 되었다.
균열이 순식간에 닫혔다. 하지만 프로니우스는 코웃음치며 다시 균열을 만들었다. 이번엔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개, 수백 개. 눈 깜짝할 사이에 늘어나는 균열들은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할지라도 모두 없애기에는 지나치게 많았다.
그렇기에 공간 자체에 간섭하기 보다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법을 택했다.
모든 것을 불태우는 것.
새하얀 백염이 모든 게이트를 뒤덮었다.
하지만 그 불꽃이 완전히 꺼졌을 때.
“···이렇게 농락당한 건 좀 오랜만인데.”
녹아내린 게이트들 속에 프로니우스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간만에 속이 끓어올랐다. 과연 차원룡인지 정확히 어떤 차원으로 사라졌는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이 세상에 완벽은 없다. 있긴 있겠지만 김우진의 수준으로는 파악하지 못하는 거겠지.
김우진이 폐허가 된 대지 위에 쓰러진 두리쉬마의 상세를 살폈다.
“두리쉬마님, 괜찮으십니까?”
“···죽을 것 같다. 역시 괴물 같은 놈이다. 너무 강하군.”
“확실히 두리쉬마님이 당할 만 했습니다. 이전 주신들보다 더 강합니다.”
“어둠이 작정하고 키워낸 사도다. 대체 언제부터 계획했는지 모르겠군.”
“무슨 뜻입니까?”
“아무리 어둠이 힘을 부여했다고 해도 저 정도 수준이 하루아침에 될 리는 없다는 거다.”
“어둠이 두리쉬마님을 미끼로 이용했다는 겁니까?”
“···말이 이상하지만 크게 틀리지는 않다. 다만, 어둠이 아니라 프로니우스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숨기고 나를 이용한 거겠지. 난 멍청하게 놈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고.”
“그러네요. 두리쉬마님이 조금만 더 똑똑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
“농담입니다.”
“···빌어먹을 놈.”
“일단 백신전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시죠 그리고···.”
그때 차원을 뚫고 메시지가 날아왔다.
[됐어요. 소장님.]
“됐다고? 뭐가?”
[알베니우스님이 20초만에 차원 이동을 할 수 있게 되셨어요.]
“···그래?”
“···갑자기 왜 웃는 거지?”
“판이 뒤집혔습니다.”
이 개새끼. 곧 만나러 간다.
* * *
[송파구에서 화산 터짐]
[jpg]
↳욕하려고 들어왔는데 이왜진?
↳뭐임? 네이팜 터트림?
↳와 땅이 다 녹아내렸네. 저 불꽃 뭐냐
↳이게 송파구라고?
↳탈총사들 중에 누구 불 쓰는 놈 있냐?
↳괴물이 쓴 듯?
↳근데 여기 군사지역인데 어케 찍음?
↳내가 군사임
↳군사 기밀 유출 신고 ㅅㄱ
↳ㅅㅂ 이거 ㅁㅊ새끼네ㅋㅋㅋ
[뭔 일이냐]
[성동구 사는데 송파구에서 불기둥 올라오는 거 여기까지 보임. 갑자기 날이 밝아져서 깜짝 놀람]
↳불기둥?
↳ㅇㅇ하얀 불기둥이었음
↳왜 청색아님? 덜 뜨겁네
↳근데 네이팜 터트린다고 성동구에서 보일 정도로 불기둥이 올라옴?
↳그러게ㄷㄷ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냐
“너무 화려하게 터트렸다. 커뮤니티가 난리가 났군.”
“이제 커뮤도 보십니까?”
“보다보니 볼만하더군.”
백신전에서 치료를 받고 온 두리쉬마가 소파에 누워 태블릿을 만졌다.
“적당히 상대할 놈이 아니다 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구를 전장으로 삼으면 안 되겠군.”
“동감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놈이 도망쳐줘서 다행이네요. 하마터면 지구, 아무리 못해도 동아시아 정도는 날려 먹을 뻔 했으니.”
담담히 주고받는 끔찍한 소리에 집 주인들이 흠칫 놀랐다.
‘저희가 게이트를 막는 동안 지구가 멸망할 뻔 했다는 거 아닙니까?’
‘미친···.’
그것도 종말이 아니라 신들의 싸움의 여파로.
“괜찮아요.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거예요.”
“저, 정말입니까?”
“그럼요.”
율리아의 위로에 고개를 끄덕였으나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소파에 누워 과자 먹으면서 커뮤를 하는 걸 보면 지구에 다 적응하셨군요.”
“네가 붙여준 이놈들이 꽤 도움이 됐다.”
“감자칩은 지금 드시는 것보다 초록색 포장지의 양파 맛이 더 맛있어요! 단짠단짠이에요!”
“참고하지.”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적응을 하게 도와주라고 하긴 했지만 이건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이러다가 율리아랑 같이 게임도 하겠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지구의 종말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당사자가 게임 폐인이 되는 건 곤란하다.
김우진이 두 용사들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절대 게임은 알려주지 마라. 종말이 끝나기 전까지는.”
“네, 네.”
“알겠습니다.”
“지금처럼만 해라. 그러면 약속한 건 지켜질 테니.”
“예, 물론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볍게 식사를 마쳤다. 신들과의 동석에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흡입한 두 용사는 잠시 나가 있으라는 김우진의 말에 그대로 사라졌다.
“그래서 알베니우스가 놈을 따라가는 게 가능해졌다고?”
“정확히는 연옥에서 외곽 차원까지 단 20초만에 차원문을 열 수 있게 된 겁니다.”
“프로니우스놈, 더 이상 게릴라전은 못하겠군.”
“그렇게 되겠죠.”
아무리 프로니우스가 강하다고 한들, 20초를 버티지 못할 무능한 놈들은 없다. 그들은 신이라고 불릴 수도 없다.
더 이상 프로니우스의 게릴라전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과연 놈이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이것 하나일까?
물론 아니다. 허나, 그리 많지는 않고 그 모든 것들이 김우진이 생각하는 범주를 뛰어넘지는 못할 거다.
“놈이 할 수 있는 건 정해져 있습니다. 차원들의 종말을 일으키거나, 꿍쳐두었던 마물들의 웨이브를 진격시키거나, 계속 게릴라전을 하거나.”
종말을 일으키면 지금처럼 신들을 이용해 막는다. 상황에 따라 집행자들까지 막는다.
업을 대규모로 소모하게 생겼으나 그런 걸 따질 대가 아니었다.
웨이브를 진격시키면 오히려 전면전이기에 속이 편하다.
그리고 게릴라전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놈은 그걸 모를 터. 처음의 한 번에 반드시 놈을 잡아야만 한다.
“미친척하고 총력전을 벌이면 피해가 클 텐데?”
“감수해야죠.”
어차피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뒤가 없다. 신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
“그럼 내가 할 일은 따로 없나?”
“지구의 종말만 잘 막아주시면 됩니다. 어쩌면 지구를 미끼로 이용해서 무슨 수를 쓸지도 모르니까요.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이해했다. 걱정 마라. 놈이 직접 오지 않는 이상 내게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테니.”
“믿겠습니다.”
“아. 미끼라고 하셔서 그런가, 방금 기발한 생각이 하나 났어요.”
율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뭔데?”
“굳이 기다릴 것 없이 함정을 파는 거요. 이쪽에서 미끼를 던지는 거죠.”
“함정?”
“함정을 어떻게 판다는 거지?”
“프로니우스가 저희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차원과 공간의 권능이 압도적이기 때문이잖아요?”
“그런데?”
“그런데 저희한테도 이제 알베니우스님이라는 동등한, 동등하지 못해도 적어도 턱 밑까지 쫒아간 존재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역으로 이쪽에서 침공을 하는 거죠.
“최소한의 수비 병력을 제외하고 대규모 군단을 이끌고 종말 차원을 순회하듯 쓸어버리는 거예요.”
마물들이 아무리 숨어 있다고 해도 결국 종말 차원이니 찾다보면 무조건 나오겠죠.
“그러면 놈은 우리의 빈집을 노리겠지. 그럴 때···.”
김우진이 탄성을 내질렀다.
“알베니우스를 이용해 회군하자?”
“맞아요.”
“···내가 보기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맞습니다. 확실히 좋은 방법이에요.”
프로니우스는 알베니우스가 자신의 턱 밑가지 쫓아왔다는 것을 모른다. 그렇기에 알베니우스는 숨겨진 비수다.
딱 한 번, 이용해 먹을 수 있다면 최대한 효율을 뽑아내는 것이 옳다. 그리고 율리아가 말한 한 수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한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소수를 데리고 차원 이동을 하는 것과 군단을 데리고 하는 건 또 달라.”
차원 간의 균열을 열려면 꽤나 막대한 권능이 소모된다. 그것을 장시간 유지하면 유지할수록 더욱 더.
“음, 그것도 그렇네요. 그러면 못하는 걸까요?”
“아니. 그렇다고 불가능은 아니고.”
몇 가지 손만 보면 확실한 한 수가 되겠어.
“만약 놈이 끝까지 숨어 있는다면 마물의 수를 줄이니 그것도 그것대로 나쁘지 않고.”
“그렇다면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은 뒤에 다시 공격할 수도 있겠지. 알베니우스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제 말이 바로 그거예요!”
“좋아, 율리아.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
반격의 실마리를 잡은 김우진이 눈을 번뜩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