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외전. 지구의 종말(9) >
“···뭐라고?”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돌아버린 건가요?”
용사들이 발끈했다.
“당신이 강하다는 건 압니다.”
카일리 로퍼가 담담히 중얼거렸다.
21세기 정보화 시대다.
스마트폰이 카메라가 되고 인터넷만 되면 어디든지 세계의 일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도 눈과 귀가 있었고 용사들에 대한 전투 장면들은 거의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올라오고 있다.
수많은 용사들이 특별하지만 두리쉬마는 그 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맨 주먹으로 모든 것을 으깨버리는 압도적인 힘은 이 자리의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서 강짜를 부리는 것에 숙이고 받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그들 또한 하나의 차원을 구한 전적이 있는 용사였으니.
“하지만 우리 또한 용사입니다. 당신은 조금 더 동종업계에 대한 존중이 필요합니다.”
“존중이라.”
두리쉬마가 턱을 긁적였다.
“거기에는 어폐가 있다.”
“무슨 뜻이죠?”
“일단 말했다시피 나는 용사가 아니다.”
“···이해할 수 없군요. 용사가 아닌데 어찌.”
“그걸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지. 그리고 두 번째.”
두리쉬마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떤 말이 나올지 예상한 킬리언이 함께 웃었다.
“나는 나보다 약한 놈의 말은 듣지 않는다.”
“···뭐라고요?”
“너희 셋 모두 다.”
내게 무언가 요구를 하고 싶다면.
“나를 이겨봐라.”
그럼 너희들이 바라는 모든 걸 해줄 테니까.
“쫄린다면 셋이 한꺼번에 덤벼도 좋다. 이놈들은 날 돕지 않을 테니.”
“···오만하군요.”
“아니, 나는 오만한 게 아니라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거다.”
그럴 힘이 있는 자는 오만한 게 아니라 그게 당연한 것이니.
“그러니까 지금 우리 셋이 한꺼번에 덤벼도 이길 자신이 있다?”
“그래.”
니콜라 뒤리스가 검을 뽑았다.
“다들 이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참을 건가? 용사라는 작자들이?”
“···난 평화주의자인데 어쩔 수 없지. 도발에는 또 응해주는 스타일이라.”
브루노 모라가 천천히 마나를 끌어 모았다.
“···좋아요. 그렇게 자신하신다면 한 번 증명해보시죠.”
하지만 후회하지 마세요.
“저는 적당히라는 걸 모르니까.”
무거운 중력이 두리쉬마를 찍어 눌렀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두리쉬마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니콜라가 오러를 두르며 돌진하고.
─!
마법 번개들이 두리쉬마를 덮치고, 중력이 가중되는 것으로.
그리고 박상준과 킬리언이 거리를 벌리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말도 안 돼.”
“···미친 괴물 같으니.”
“와, 진짜 세네. 형님으로 모셔도 될까요?”
카일리 로퍼의 중력 권능은 두리쉬마를 붙잡아 두지 못했다.
브루노 모라의 마법들은 두리쉬마에게 치명타라고 할 만한 것을 입히지 못했으며.
니콜라 뒤리스의 검이 오러와 함께 부러졌다.
압도적인 전투는 아니었다.
카일리 로퍼의 권능은 두리쉬마의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하지는 못해도 움직임을 더디게 만들었다.
브루노 모라의 마법들은 치명타는 아니었으나 두리쉬마에게 충분한 타격을 주었으며.
니콜라 뒤리스의 검은 그 빈틈을 찌르기에 충분히 날카로웠다.
모든 건 다 한 끝 차이였으나 한 끝 차이라고 해서 승패가 결정 나지 않는 건 아니다.
결국 그들은 쓰러졌고 두리쉬마는 굳건히 서 있다.
결과가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모든 일의 과정은 중요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더 하고 싶은 놈 있나? 얼마든지 받아주겠다.”
“······.”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카일리의 말끝이 파르르 떨렸다.
“혹시 신이나 집행자이십니까?”
“아니다.”
“···그럼 대체?”
신이나 집행자가 아님에도 용사들 셋을 압도하다니. 이런 게 가능한 일인가?
“알고 싶다며 날 이겨라.”
“······.”
“너희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다. 다시 도전해서 나를 이기고 원하는 걸 쟁취하거나.”
아니면.
“내게 복종하거나.”
“···대체 어째서 이런 짓을 하시는 겁니까?”
“종말을 막기 위해서다.”
“그런 거라면 서로 잘 협력해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지. 네놈들이 서로 이권을 위해서 아귀다툼을 벌이면 내가 귀찮아진다. 이게 깔끔하다.”
“······.”
“자, 선택해라.”
첫 번째냐, 두 번째냐.
모든 용사들이 두 번째를 선택했다.
“바로 이거야. 역시 고통을 나누니 즐거움이 되는군.”
“킬리언님, 방금 되게 간사해보였습니다.”
“내 롤 모델로 삼겠다.”
“예?”
“역시 세상에는 힘이면 안 되는 일이 없어.”
힘으로 안 된다면 그저 힘이 부족할 뿐이다.
두리쉬마가 그것을 보여줬다. 그를 바라보는 킬리언의 눈에 열망이 깃들었다.
* * *
“세상은 불공평하다. 썩어버린 게 틀림없어.”
어떻게 운동을 하면 그렇게 강해질 수 있냐는 킬리언의 물음에 두리쉬마는 타고 났다고 이야기했다.
“근육도 역시 재능이다. 나 같은 범재는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갈 수 없었어.”
“그 발언은 논란이 좀 될 것 같은데요.”
“딱히 신경 안 쓴다.”
두리쉬마는 다섯 용사들을 모두 규합했다.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용사들은 이제 두리쉬마의 명령을 따를 수족이 되었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한국에 있는 내 집에서 한다. 이의 있나?”
“없습니다.”
“공개적으로 오지 마라. 괜히 내 얼굴이 팔리는 걸 원치 않으니까.”
“예.”
“그리고 앞으로 각자 영역을 보다 확실하게 할당한다. 각자···.”
몇 가지 사항들을 알려준 두리쉬마가 회담을 파했다.
“연락 잘 받아라. 괜히 번거롭게 만들지 말고.”
“예!”
“예써!”
용사들이 각자의 나라로 사라졌다.
“우리도 가자.”
“예!”
마지막 용사들이 떠났다. 마법과 권능으로 복구된 사막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처음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했다.
* * *
현재의 백신전은 구 백신전과는 다르다.
백신전을 이루는 많은 이들이 물갈이가 되었고 그 원인은 죽음이다.
더 이상 신들에게는 죽음이 낯설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다르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신의 죽음에는 직간접적으로 김우진이 연관되어 있었다. 오직 김우진과 그 측근들만이 신을 죽일 수 있다.
그런데 처음으로 외부에 의해 신이 죽었다.
그것도 백신전의 경계 태세가 날선 고슴도치와 같은 상황에서.
신들의 경각심이 더욱 커졌다.
무엇보다 신들은 불안해했다.
아무리 말단이라고 한들 신은 신. 그런 신이 고작 몇 분을 버티지 못하고 지원이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다.
과연 어떤 신이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까. 그 자가 자신에게 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도 없었다.
“지금의 경계태세를 유지한다. 번복은 없다.”
하지만 신들이 불안해한다고 경계 태세를 줄이고 다시 신들을 백신전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프로니우스가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신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 김우진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명색이 신이라는 것들이, 태초부터 우주를 지배해왔다는 것들이 신 하나가 죽었다고 지레 겁을 먹어? 그렇다면 이제 종말을 막지 않을 거냐?”
“······.”
“한심한 것들.”
김우진이 혀를 찼다. 몇몇 신들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한심한 것들은 아니다. 일단은 그의 말대로 태초부터 우주를 지배해온 지배자들이니까.
단지, 해답이 없는 함정에 서서 무의미한 희생을 하기 싫을 뿐이다. 적절한 광명을 보여준다면 더 이상 추태를 보이지도 않을 거다.
“방법은 있다.”
때문에 김우진은 당근을 던졌다.
“그러니까···.”
“오. 그 방법이라면 확실히···!”
“알베니우스의 공간 권능은 백신전의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가 새롭게 신이 됐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역시 절대신님이십니다!”
그리고 신들이 환호했다.
* * *
대회의가 끝났다.
“넌 안 가냐?”
모든 신들이 떠난 자리, 김우진과 율리아만 남았다.
“정말이에요? 알베니우스님이 차원문을 바로 열 수 있다는 게?”
“아마도.”
“···대답이 되에에에에에에게 모호하네요?”
“언젠가는 되겠지. 신이 된 것도 맞고, 공간의 권능이 강화된 것도 맞으니까.”
신들을 안심시킨 달콤한 속삭임들은 전부 진실이었다.
“사기네요.”
“난 애초에 당장 된다고 한 적이 없어.”
“···지금 몇 분 걸리는데요?”
“지구에서 연옥까지 2분.”
“···생각보다 되게 빠르네요? 이제 막 신이 되셨는데 그 거리를 2분만에 끝내요?”
지구와 연옥 사이에는 족히 수십 개의 차원들이 존재했다.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말했잖아. 알베니우스가 생각보다 능력이 있다고.”
겉보기에 좀 허술하고 푼수 같아서 그렇지 오랜 시간 신들을 상대로 도주해온 능력자다.
신들의 질긴 추격을 모두 벗겨내고 도망칠 정도면 공간 권능에 관해서는 거의 세계관 원탑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단지, 아직 제대로 된 신의 힘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이야.”
만약 적응하고 보다 능숙해지면 그곳이 어디든, 차원문을 여는 걸 10초로 끊는 것도 꿈은 아니다.
“문제는 그 기간이군요. 신들에게 장담하신 30초에 비하면 훨씬 길어요. 물론 신들이 그 몇 분도 못 버틸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도 어떤 신보다 가장 빠르기는 해.”
우주의 중심인 연옥에서 종말 차원들과의 경계까지는 단 5분이 걸렸으니까.
“그리고 갈구면 어떻게든 해내긴 하더라고.”
“갈궈요? 지금 알베니우스님은 연습하고 계신 건가요?”
“맞아. 훌륭한 스승들 밑에서 훈련 중이야.”
“훌륭한 스승들이요?”
율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세상에 공간 권능에 관련해서 알베니우스를 가르칠 만한 자들이 있었나?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으로?
“그래, 엄청 훌륭한 스승들이지.”
프흐, 김우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뭐예요? 혼자만 웃지 말고 저도 같이 알자고요.”
* * *
찰칵-
스톱워치가 멈춘다.
- 실패. 다시.
- 다시!
파랑새와 호랑이 정령이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차원룡을 압박한다.
- 시간 한참 오버!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
- 한심해!
“못 해. 때려 죽여도 지금은 안 돼.”
알베니우스가 거친 숨을 헐떡이며 대자로 누웠다. 쥐어짜다시피한 드래곤 하트에는 더 이상, 어떠한 기운도 남이 있지 않았다.
- 못하는 건 없어!
- 없어!
- 안 하는 거야!
- 안 하는 거야!
찰싹, 릴리의 날개가 알베니우스의 이마를 두드렸다. 나르가 그의 옷을 물고 강제로 일으켜세웠다.
“이것들이 쌍으로···! 나 좀 내버려 둬!”
- 안 돼! 소장이 그랬어! 30초만에 할 수 있을 때까지 갈구라고!
- 맞아!
“갈구라고는 안 했잖아! 그 자리에 나도 있었거든?”
- 받아들이는 건 내 마음이라고 했어.
- 했어!
알베니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악덕도 이런 악덕이 없었다.
- 빨리!
- 빨리!
계속되는 채근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 먹어.
릴리가 영약 하나를 건넸다. 동 난 드래곤 하트를 가득 채우기에는 부족하지만 사막에 단비 정도는 되리라.
“김우진 같은 놈들.”
- 칭찬 고마워!
- 나도 소장 같아? 헤헤.
“···말을 말자.”
설마 내가 이런 짓을 하게 될 줄이야. 알베니우스가 한숨을 쉬었다.
훈련 방법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그가 김우진에게, 그리고 율리아에게 행했던 것을 다시 그에 맞게 조금 개조했을 뿐 큰 틀을 같다.
그는 공간의 권능을 사용하고 두 세계수는 막는다.
다른 곳이라면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세계수에게는 공간 관련의 권능이 아예 없으니까.
하지만 그 장소가 두 세계수가 뿌리를 내린 연옥이라면 이야기는 달리진다. 각각 수십의 신들을 섭취한 그들이 가진 신력은 거의 폭거에 가까운 수준이다.
강제로 알베니우스의 기운을 일그러트리고 흐름을 끊어버리는 것을 피해 권능을 사용하려면 엄청난 정신력과 집중력이 필요했다. 방대한 우주의 기운은 기본 값이고.
김우진과 율리아를 윽박지르며 가르칠 때는 재밌었는데 직접 당해보니 썩 유쾌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선생을 자처하는 것들이 너무 시끄럽고 성가셨다.
“···그래, 다시 해보자.”
알베니우스가 마음을 다잡았다.
결국 이 모든 원인은 신들이지만 그때 일을 주도한 자들은 대부분 죽었다.
그리고 김우진의 주도 아래 새롭게 판이 짜졌다.
때문에 알베니우스는 복수를 잊었다. 증오가 완전히 사라졌다면 거짓이지만 거의 흐릿해졌다.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저 지금의 평화를, 평온을 유지하고 싶을 뿐이다.
그간 쫓겨다니며 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기에.
‘네 심정은 이해해. 그러니 너도 내 심정을 이해해라.’
프로니우스. 그러니 나는 너를 막겠다.
나는 지금이 너무 마음에 들거든.
그리고 너 때문에 이런 좆같은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게 너무 열 받아.
알베니우스가 권능을 발현시켰다.
- 막아!
- 막아!
세계수들의 방해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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