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138화 (138/150)

# < 외전. 지구의 종말(8) >

“음, 나쁘지 않은 반응이구나.”

두리쉬마가 패드를 내려 커뮤니티를 살폈다. 그에게 호의적인 글과 댓글들을 살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그래.”

국회의원의 혀를 뽑겠다고 난리치던 타이탄은 박상준에 의해 커뮤니티에 조금씩 적응해 나갔다.

단순히 다른 나라에서 시작하는 게 효과가 있냐는 두리쉬마의 물음에 태블릿을 건네준 덕분이었다.

“그래, 지성체라면 고마운 것에는 고마워할 줄 알아야지.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감히 이 몸을 당연하게 여기다니.”

물론.

“이 벌레 같은 놈이 뭐라고? 매국노? 난 애초에 이 차원의 존재도 아니다!”

콰직-

타블렛의 희생이 조금 많이 필요했다.

“···100개정도 주문해놔야겠네.”

다행히 박상준은 돈이 많았다.

“나도 100개 추가로 주문하겠다.”

킬리언도.

* * *

“두리쉬마님, 그만 보시고 준비하시죠. 시간이 됐습니다.”

박상준이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양반탈을 썼다.

“굳이 내가 가야하는 건가?”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무조건 가셔야 합니다.”

킬리언이 단호하게 외쳤다.

“그래야 저 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이 없지 않겠습니까? 괜히 두리쉬마님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두리쉬마님에게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꽤나 성가시지 않습니까?”

“그럴듯하군.”

그럴 듯한 이유에 두리쉬마가 납득하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에 들어갔다.

“정말 그런 이유입니까?”

“나만 맞을 순 없지···. 자고로 고통은 나누면 줄어든다고 했다.”

“슬픔이 아니라요?”

“고통을 슬픔으로 승화시켰지.”

“순순히 협조할 수도 있잖습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뭐, 마음대로 하세요.”

사실 어느 정도 필요하긴 했다. 모두 차원을 구할 정도로 한 가닥씩 하는 인물들이다 보니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강하다.

자신들의 보금자리니까, 그리고 신들이 요구해서 막고는 있지만 남 밑에 있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거다.

다섯이 있으면 다섯 모두가 대장이 되려고 하는 게 용사니까. 용사들 모두 자신이 특별하다는 자각이 있다.

두리쉬마의 주먹은 그들에게 특효약이 될 것이다.

“가자.”

가면을 쓴 세 사람이 호주로 향했다.

한국과 호주, 미국과 호주, 브라질과 호주, 프랑스와 호주.

거리도 제각각이고 차라리 네 국가 중 한 곳에서 만나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호주를 택한 것은 어떤 용사도 없기 때문이었다. 주도권을 잡기 위한 기싸움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같잖았다.

‘어차피 전부 두리쉬마님한테 한 대씩 맞으면 끝날 것들이.’

그게 아니더라도 그런 사소한 것으로 싸운다는 걸 알면 신께서 가만히 두지 않을 텐데 생각이란 게 없는지.

박상준이 혀를 찼다.

마법을 이용해서 기척과 모습, 흔적을 숨기고 바다를 질주하며 달려가니 호주까지는 금방이었다.

호주, 그레이트샌디 사막 한 가운데. 세 사람이 도착했다.

황량한 사막 위에 덩그러니 놓여진 여섯 개의 의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미 세 명의 선객이 있었다.

“늦었군요.”

어깨까지 내려오는 주황빛 머리카락, 푸른 눈, 그리고 함께 어우러지는 새하얀 피부. 용사들의 만남을 주도한 미국의 용사, 카일리 로퍼였다.

“죄송해요. 준비에 좀 시간이 걸려서요.”

셋은 태연히 빈자리에 앉았다. 용사들의 시선이 꽂혔다.

“저 자가 새로운 용사인가? 크군.”

“한국인이 아닌 것 같은데 왜 한국에 있는 거지?”

무의식에 가까운 혼잣말들 사이로 질문이 날아왔다.

“그런데 그 가면은 언제까지 쓰고 있을 거지?”

검은 머리에 푸른 눈에 덥수룩한 수염의 남자, 프랑스의 용사, 니콜라 뒤리스였다.

“문제 있습니까?”

“서로 간에 대화를 하자고 나온 자리에 가면을 쓰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나?”

“그럼 그쪽도 쓰시면 됩니다.”

“뭐라고?”

“저희는 얼굴이 드러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사생활을 빼앗기고 싶지 않거든요. 저희가 가면을 쓰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벗길 생각을 하지 말고 다 함께 쓰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 자리에는 우리밖에 없어. 우리를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매사에 조심하는 게 제 철칙이라.”

박상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니콜라가 인상을 구겼다.

“서로 견제하는 건 거기까지 하죠. 가면을 쓰던 말던 우리는 지구를 지켜야 하고, 종말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서로 협력해야죠.”

카일리 로퍼가 그들을 중재했다. 험악해지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일단 서로 직접 보는 건 처음인 분들도 있을 테니 자기소개부터 하도록 하죠. 저부터 할게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일리 로퍼에요. 아시다시피 미국인이고 아르딩이라는 차원을 구했죠. 중력을 다룰 수 있어요.”

다음은 니콜라 뒤리스였다.

“니콜라 뒤리스. 위대한 프랑스고 메르데이나를 구해 영웅이 되었다. 특별한 권능은 딱히 없다. 검을 쓰는 기사다.”

“브루노 모라. 브라질 상파울로 출신이고 상파울로 FC의 열렬한 팬이지. 카로스라는 차원을 구했고.”

따악, 브루노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법진들이 떠올랐다.

“보시다시피 마법사.”

“저는 그냥 박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한국인입니다. 델라임이라는 차원을 구했고 창과 번개를 다룹니다.”

“이름은 말하지 않을 건가요?”

“정체가 드러나는 걸 원치 않는다니까요?”

“킬리언. 미국인이고 아른이라는 차원을 구했다. 특기는 강체술이다.”

“···미국인?”

“미국인이 왜 한국에서?”

용사들이 의문을 표했으나 킬리언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앉았다. 카일리의 시선이 각시탈에 꽂혔다.

“내 차례인가.”

그리고 그 때, 두리쉬마가 일어났다.

“내 이름은 두리쉬마다. 딱히 구한 차원은 없고···.”

순간, 두리쉬마가 기세를 폭발시켰다.

“큭···!”

“이게 무슨!”

“뭐하는 짓이에요!”

용사들이 신음을 내뱉었다.

“앞으로는 네놈들이 한국으로 와라. 감히 이 몸에게 오라 마라 지껄이지 말고.”

그가 선언했다.

“뒤지기 싫으면.”

* * *

얼마 전에는 두리쉬마가, 오늘은 알베니우스가 김우진의 집을 방문했다.

얼마 전에는 두리쉬마에게 용무가, 오늘은 알베니우스에게 용무가 있기 때문이다.

달그락, 김우진이 냉장고에서 칠링한 잔을 꺼내고 쉐이커에 술들을 부어 흔들었다.

“저는 지금의 판이 깨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특히, 지구의 평화가. 그래서 프로니우스가 지구에 종말을 일으켰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방법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용사들이 그랬고, 지구를 중심으로 집행자들을 이용해 감시망을 형성한 것이 그렇다.

“하지만 퀵 배송 사태를 보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필요하다는 걸요.”

검은 검으로 막아야하고 총은 총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리고 차원룡은 차원룡으로 막아야 한다.

아무리 신이라고 할지라도 전체적인 평균이 비슷하다면 공간 마법에 대한 권능은 결코 그들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놈의 평균은 아무리 못해도 주신급 이상이다.

“하지만 저희에게는 알베니우스님이 계시죠.”

김우진이 잔을 건넸다.

“···난 프로니우스한테 상대가 되지 않아.”

“상대가 되지 않으면 되게 만들면 되죠. 제가 누군지 잊으셨습니까?”

절대신이라고 불리는 게 오글거려 싫어할 뿐, 김우진은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보고 신이 되라고?”

“어둠의 사도와 맞서려면 빛의 사도가 되어야죠.”

“나는 이미 한 번 거절했는데. 그 이후에는 소식이 없어. 누구보다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사실 그게 제일 문제다. 덕분에 아카식 레코드는 다시는 김우진과 알베니우스에게 신이 될 것이냐는 제안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우진은 신들을 잡아먹고 스스로 더 위대해졌지만 알베니우스는 아니었다.

“그건 제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아카식 레코드라도 설득하려고?”

“예.”

“···그게 되는 건가?”

“관념적인 의지라는 게 그렇다고 의지가 아예 없는 건 또 아니라서요. 그 방향성이 같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아카식 레코드는 그저 맹목적으로 균형을 맞추고 우주를 수호하기 위해 움직인다.

거기에 특별히 뭐 할 것도 없다.

아카식 레코드는 우주의 기록이자 도서관이고 이미 지금의 상황이 어떤지 알고 있다.

거기에 알베니우스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왜 필요한지 추가로 새겨 넣으면 그만이다.

그럼 알아서 알베니우스가 우주의 평화와 균형을 위해 필요하다가 판단하겠지.

평소라면 어림도 없지만 위기의 상황이기에 가능한 방법이다.

“좋아, 백 번 양보해서 네 말대로 된다고 치자.”

하지만 모든 난관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아직 가장 큰 문제가 남아있다.

“백신전은 이미 정원이 찾잖아?”

우주가 생기고 아카식 레코드가 자신의 대리인으로 신들을 선택하기 시작하면서 단 한 번도 백 명이 넘은 적이 없다.

그래서 백신전이고, 그래서 신들이 더 특별하다. 유한하기에 그 가치가 더 빛을 낸다.

“사실 그건 이미 해결 됐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알베니우스님을 부른 것이기도 하고요.”

“해결 돼?”

“이틀 전, 신이 한 명 죽었습니다.”

“······!”

콰직, 김우진이 들고 있던 칵테일 잔이 산산조각 났다. 칵테일이 그의 손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프로니우스, 그 개새끼 손에.”

* * *

방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니, 방심하고 있었다.

프로니우스가 공간 부분에서는 독보적인 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지구로 마물들을 퀵배송 하는 것에서 그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상, 그 놈이 무슨 짓을 할 수 있겠느냐고 여겼다.

이런 저런 대비를 해놓았지만 대부분 지구에 한정되었다. 놈이 무슨 짓을 하면 지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기에.

함정에 빠졌다. 놈이 만든 판에서 인형 마냥 그대로 움직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그의 실책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명하자면 변명할 거리가 아예 없지는 않다.

“공간 권능이었습니다.”

우주는 넓고 백신전의 커버하는 영역도 넓다.

김우진은 영역의 방어를 명령했고 신들은 흩어져 있었다. 프로니우스는 그 빈틈을 노렸다.

“신 앞에 직통으로 통로를 딱, 열었다고 하더군요.”

아무리 퍼져 있다고 해도 신들이고 백신전이다. 서로 유기적으로 연락하고 도움을 줄 수단은 당연히 있었다.

문제는 프로니우스의 권능이 그 모든 것을 앞섰다는 것.

“다른 신들이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몇 분입니다.”

하지만 프로니우스와 마주친 신은 그 몇 분을 버티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해당 신이 김우진 사태로 인해 새롭게 신이 된 말단에 가까운 자라서.

예상치 못한 기습이라서.

프로니우스가 생각보다 더 강해서.

“정확히 나한테 바라는 게 뭐지? 내가 신이 된다고 해도 놈을 이길 수는 없어.”

“그런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제가 알베니우스님에게 바라는 건 단 한 가지.”

김우진이 손가락 하나를 폈다.

“놈이 또 다시 통로를 열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10초.”

아니, 30초 만에.

“그저 통로를 열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그 뒤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언제나 그렇듯, 결국 대장을 잡으면 끝나는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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