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133화 (133/150)

# < 외전. 지구의 종말(3) >

어둠이 짜고 치는 듯 한 연극에 분노했다니.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다.

그리고 결코 좋지 못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 연극 좀 했다고 선전포고를 날렸다는 겁니까?”

두리쉬마는 경고장이라고 했지만 김우진이 보기에는 아니었다. 이건 선전포고다. 김우진이 만들어놓은 같잖은 판을 뒤집어버리겠다는 광기.

“새로운 어둠의 사도라는 놈, 정체가 뭡니까?”

“고대 종족이다. 나와 비슷한.”

“두리쉬마님과 알베니우스님 빼고 고대종들은 다 멸종한 거 아니었습니까?”

구 백신전에 의해.

“생존자가 있었다.”

“뭡니까?”

“차원룡.”

“···그 말은.”

“그래.”

두리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룡의 생존자는 알베니우스 하나가 아니었다. 그리고 어둠의 사도가 되어 백신전을 무너트리기 위해 돌아왔다. 짐작이 가나?”

신들에게 종족이 말살당한 생존자의 분노를.

“저는 모릅니다만, 두리쉬마님은 알고 계시겠죠.”

“알다마다. 놈은 마치 처음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저와 처음 만났을 때를 말하는 겁니까?”

“아니, 훨씬 이전이다.”

타이탄들은 차원룡보다 훨씬 먼저 신들의 공격을 받았다. 두리쉬마가 인내하며 분노를 곱씹은 시간은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길었다.

“그때의 내 심정을 표현하자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두리쉬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백신전은 물론 세상 전체를 몰살시키고 싶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다른 사람들은 죄가 없잖습니까.”

“그런 건 의미가 없다. 지금의 우주 자체가 백신전이 의도하고, 백신전이 만들어 놓은 질서 아래 있으니까. 백신전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었다. 아카식 레코드까지도.”

그야 말로 분노의 화신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잖습니까?”

“시간은 많은 것을 잊게 해주지. 망각은 인간만의 특권이 아니다.”

신도, 드래곤도 모두 기억을 망각하고 무뎌진다. 단지, 인간에 비하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두리쉬마는 그 긴 시간을 지내왔다.

“···갑자기 궁금해서 그런데 혹시 몇 살이십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가?”

“아,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놈도 분명히 단순히 너와 백신전을 노리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백신전의 신들.

신들의 개, 집행자.

그들의 선택을 받은 용사.

백신전이 짜 놓은 판 아래서 삶을 영위하는 피조물들.

그리고 백신전을 백신전으로 만든 아카식 레코드까지.

“···완전 미친 새끼군요?”

“종족이 몰살당했는데 뒤를 생각할 만한 여유가 있을 리가 없지.”

두리쉬마처럼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두리쉬마와 놈이 다른 점이라면 생각보다 빨리 놈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하아, 빌어먹을.”

김우진이 이마를 짚었다.

* * *

청명한 하늘.

바람도 구름도 없다.

─!

거대한 백룡의 날개짓에 폭풍이 일어난다. 아슬아슬한 저공비행에 새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고 부러진 나무들이 휘날렸다.

────!

백룡이 포효했다. 드래곤 피어에 몬스터들이 기절했다.

날개가 더욱 힘차게 펄럭였고 거체가 하늘 위로 올라갔다. 인간의 도시가 개미보다 작게 보일 때 쯤, 속도가 더 올라갔다.

그렇게 차원 전체를 한 바퀴 돌고난 뒤, 인적이 드문 산속에 지어진 거대한 저택 안에 안착했다.

번쩍, 새하얀 빛이 감싸고 남자, 알베니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고하셨습니다.”

드래곤 레어를 수호하는 가디언 집사가 수건을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도 즐거우셨습니까?”

“그래. 매일 매일 해도 질리지가 않네. 그 동안 어떻게 참았지, 나?”

차원룡이 백신전에 의해 박멸당하고 난 뒤, 알베니우스의 삶은 도주와 은신의 연속이었다. 당연히 본체는 꿈도 꾸지 못했고 억압 속에서 불만이 쌓여갔다.

그래서일까. 제약이 풀리니 하루도 빼먹지 않고 본체로 차원을 누볐다.

인간들이 존재하는 차원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즐거웠다. 그가 본래 살아가던 곳에도 인간들은 있었으니까.

“별일 없지?”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김우진?”

“아닙니다. 항상 찾아오시던 분들이 아니라 처음 보는 분입니다만, 알베니우스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처음 보는데 나를 알고 있다고?”

누구지?

알베니우스의 인간관계는 좁았다. 쫓기는 기간만 만 년이 넘었으니 당연했다.

백신전이나 거기에 연관된 이들이 아니면 굳이 알베니우스를 찾을 자들은 없다. 애초에 알베니우스가 어느 차원에 머물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다.

“알베니우스님이 외출중이라고 해도 기다리겠다고 해서 일단은 접객실로 안내해드렸습니다.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름은?”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안 밝히는 놈을 그냥 들여보내줬다고?”

“죄송합니다. 제 수준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가디언이 고개를 숙였다.

‘다른 차원의 존재인가?’

가디언은 용사나 집행자가 아닌 일개 피조물이지만 적어도 이 차원의 최강자 수준이었다. 가디언을 아득히 뛰어넘었다면 신이나 집행자다.

하지만 김우진 휘하의 신과 집행자들이 굳이 알베니우스를 찾아올 이유가 있을까?

묘한 불길함이 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가보지.”

“예.”

집무실과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알베니우스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기척이다.

생명체라면 누구나 기척을 낸다. 그런데 집무실 내부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둘 중 하나다. 사람이 없거나, 있음에도 알베니우스가 알아 채지 못했거나.

전자는 말이 되지 않는다. 권속 계약이 되어 있는 가디언이 그를 속일 리가 없으니까.

‘내가 파악하지 못해?’

등골이 서늘해졌다.

‘적인가?’

아군이라면 굳이 힘을 숨길 이유가 없다. 그리고 알베니우스보다 강한 아군 중에 가디언이 모르는 이는 없다.

‘도망쳐?’

하지만 늦었다. 그의 기감을 완벽하게 속이는 자를 상대로 과연 도망칠 수 있을까. 차라리 정원에서 방문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바로 튀어야 했다.

‘제기랄, 누구지? 나한테 악감정을 가진 놈이 있나?’

한 걸음, 한 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하지만 결국 돌리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내 뒤에는 김우진이 있어. 어떤 놈이든 김우진을 상대로 간 큰 행동을 할 놈은 없겠지.’

든든한 뒷배를 상기하며.

“왔구나, 알베니우스.”

“······?”

그의 예상대로 집무실에는 사람이 있었다.

가디언이 내준 다과와 차를 음미하고 있는 남자. 그와 같은 새하얀 머리에 황금의 눈을 가진 남자였다.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이군. 이 만 년, 아니, 삼 만 년 만인가?”

모르겠군. 너무 오래 돼서.

“하긴, 우리에게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

“못 본 사이에 벙어리가 되었나?”

“···프로니우스?”

“그래, 나다.”

“···어떻게? 난 네가 죽은 줄 알았는데?”

“나도 내가 죽을 줄 알았다.”

운이 좋았지.

“이런 저런 일이 있었지만 간신히 신들의 눈을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정말로 프로니우스라고?”

“그 누구도 나를 흉내 내지는 못 해.”

광오했으나 차원룡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살아 있었다면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나는 숨어 있었다. 너처럼. 처음에는 모두 죽어버린 줄 알았어. 내가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차원룡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종말 차원에 숨었고 벌레처럼 숨죽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견디다 못해 하위 차원에 들어갔을 때, 네 소문을 들었다.”

신에게 반역을 한 차원룡이 있다!

“알베니우스라는 차원룡이 말이지.”

“어느 차원?”

“부르데이크.”

한때 알베니우스의 은신처였던 곳이었다. 제법 오랜 시간 숨으며 도망칠 때 입었던 상처를 회복할 수 있었지만 끈질긴 신들의 추적자들에게 걸려 결국 격전을 벌이고 다시 도망쳤던 곳이다.

“나는 너를 찾고 싶었다. 너를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내 처지가 그럴 수가 없더군.”

신들에게 쫓기는 건 알베니우스만이 아니었다. 알베니우스와는 다르게 그는 완벽하게 은폐했지만 다시 나타나는 순간, 신들의 추적이 시작되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힘을 기르기로 했다. 복수를 위해서.”

비루하게 도망치다 언젠가 잡혀서 죽는 것과 종족을 말살한 신들에게 복수하는 것.

선택지는 애초부터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마침내 신들을 말살할 힘을 손에 넣었다.”

“뭐라고?”

프로니우스가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가자, 알베니우스. 같이 우리 동족들을 찢어죽이고 평화에 찌든 벌레들을 쓸어버리는 거다.”

“······.”

“어서 잡아라.”

“구석에 처박혀 있어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학살을 주도하던 주신들은 모두 죽었다. 세상은 바뀌었어.”

“알고 있다. 확신을 가진 뒤에 가장 먼저 한 것은 돌아가는 판도를 알아보는 것이었으니까.”

“그걸 알면서 복수를 하겠다고?”

“오히려 묻고 싶군.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 학살을 주신들만 행했나? 신들만 행했나? 아니.”

프로니우스가 으르렁거렸다.

“주신과 신, 그리고 집행자까지! 백신전의 모든 일원들이 하나가 되어 우리를 죽였다. 울부짖는 내 어머니를, 저항하는 내 아버지를! 네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놈들도 반드시 똑같은 고통을 맛보아야만 한다.”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진득한 살기에 알베니우스가 숨을 삼켰다.

“···그때의 백신전과 지금의 백신전은 다르다.”

“상관없다. 백신전이라는 이름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은 내게 같으니.”

“···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말했잖느냐. 종말 차원에 있었다고.”

감춰져 있던 기운이 일거에 방출되었다. 숨이 막힐 정도의 지독한 마기였다.

“···너 설마!”

“그래. 난 어둠의 사도가 되었다. 어둠의 뜻을 받아 이 세상을 멸망시킬 거다.”

신들이 우리의 종족을 멸망시켰으니 저들의 세상이 멸망해야 공평하지 않느냐.

“그건 미친 짓이다···!”

“내 손을 잡지 않겠다는 거군.”

프로니우스의 표정이 굳었다.

“어째서지?”

“어째서라니, 그야 당연한 것 아니야!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미친 소리를 누가 받아들인다는 거지?”

“신들에게 동족들이 멸망했다. 동족들이 없는 세상에 미련이라도 있다는 건가?”

“···너 완전히 미쳤구나?”

“내가 널 잘못 봤군.”

콰득, 의자 팔걸이가 악력을 견디지 못하고 박살났다.

“신들에게 쫓기다가 정이라도 든 거냐?”

“그때의 주도자들은 다 죽었다. 더 이상의 복수는 무의미해.”

“내 실수군. 신들에게 물들어 종족을 잊어버린 멍청한 두리쉬마와 똑같은 놈이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다니.”

“···뭐?”

“왜, 내 입에서 두리쉬마의 이름이 나온 게 의외인가?”

콱-

거친 손아귀가 알베니우스의 목을 움켜쥐었다. 큭, 비명이 터져 나왔으나 거대한 힘 앞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어둠께서 정녕 모르셨을 것이라고 보는 거냐? 스스로를 절대신이라 치켜세우는 버러지 김우진과 두리쉬마의 연극은 이미 모두 들통 났다.”

“네가 김우진과 작당 모의하며 백신전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해서 널 찾아왔다.

“동족이라서, 동족이기에, 동족이니까!”

“그 긴 시간 동안 신들에게 억압받고 핍박받은 너라면 나와 같은 감정일 거라고 믿었다!”

“유일하게 이 우주에서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복수의 때를 노리며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진심이라고? 어떻게 고작 몇 년 만에 신들을 용서할 수 있는 거지? 동족이 너에게는 고작 그런 의미였나!”

억겁의 시간 동안 신들에게 핍박 받아온 차원룡이 차곡 차곡 쌓아온 울분과 증오가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미친 새끼. 그렇다고 세상을 전부 멸망시키자고?”

“말했을 텐데 동족이 없는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베니우스의 얼굴이 더욱 심하게 일그러졌다.

잠시 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던 프로니우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고작 지구의 종말을 앞당기는 것 정도로는 약하지.”

“뭐···?”

그가 알베니우스를 바닥에 내던졌다.

“신들은 오만해서 고작 경고장 정도로 여기겠지. 하지만 네가 직접 내 말을 전한다면 확실히 알아들을 거다.”

가라.

“가서 김우진에게 전해라.”

내가.

“차원룡의 진정한 마지막 생존자, 이 프로니우스가.”

백신전을.

“무너트리겠다고.”

프로니우스가 몸을 돌렸다.

“같은 동족이기에 주는 자비는 오늘 널 살려서 보내는 것으로 끝이다. 다음에 만나면 가장 먼저 네 목부터 뜯어주마.”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쿨럭, 쿨럭···!”

알베니우스가 연신 기침을 하며 목을 매만졌다.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김우진, 김우진한테 가야 해.”

이건 절대 알베니우스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

“와.”

“와.”

박상준과 킬리언이 멍하니 티비를 바라보았다.

이종격투기 채널이 틀어진 티비에서는 얼마 전에 있었던 미들급 챔피언 결정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 때죠?”

“저 때다.”

“그런데 도저히 모르겠네요. 기가 막히네.”

“괜히 신이 아닌 거지.”

옥타곤 위에는 챔피언 킬리언과 박상준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서로에게 한 대도 맞추지 못하는 스피드 전이었다면 한 순간을 기점으로 어마어마한 난타전이 되었다.

그 잠깐의 타이밍. 진짜와 더미가 교체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교체된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서로가 당사자라 그 타이밍을 알지 못했다면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거다.

“그나저나 정말 죽다 살아났네요. 돈도 돈이지만 이 몸이랑 이것저것 다 빼앗기며 진짜 꽝이잖아요.”

“그렇지. 그렇다고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썩는 것도 말도 안 되니 한시름 놨다.”

지구의 종말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두 용사는 종말이 일어나서 정말 감사했다.

덕분에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뻔한 것을 막았으니.

“그런데 말이죠.”

“······?”

“종말을 막으면 또 다른 보상을 줄까요?”

킬리언의 얼굴이 구겨졌다. 일그러진 눈빛은 ‘이 새끼, 미친 새낀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아니, 그렇잖아요. 차원의 종말을 구한 용사는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는 것. 그게 상식이잖아요?”

“신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해보시지.”

“···크흠. 그건 좀.”

“괜히 나한테 불똥 튀게 하지 말고 명심해라. 우리는 평범한 용사가 아니다.”

“그러면요?”

“형벌부대다.”

“······.”

“······.”

“저 근데···.”

“또 뭐지?”

“어차피 이제 다시 용사가 되었으니 마음 놓고 싸워 봐도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요?”

“······.”

“······.”

“종말이 며칠 남았지?”

“사흘이죠.”

“사흘 뒤에.”

“훌륭한 판단이네요. 커피 드실래요?”

“에스프레소로 부탁하지.”

한참 후, 둘은 티비를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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