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외전. 지구의 종말(1) >
박상준은 용사다.
스포츠카에 치여 이세계로 전송되었고 신을 만나 용사로 발탁되었다.
“차원, 델라임이 너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
델라임에는 자신의 백성들을 통째로 제물로 바쳐 악마의 힘을 손에 넣은 미친 왕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마왕이라 불렀고 마왕은 언데드와 마물 군단을 이용해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다.
그 전장의 한복판에 용사 박상준이 떨어졌다.
“용사님! 부디 마왕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해주십시오!”
왕국들이 연합한 연합군은 박상준을 극진히 대접하며 기반을 다져주었다.
검술, 마법, 정령술 등 모든 것을 배웠고 그의 재능은 창술에서 빛을 발했다.
박상준은 번개 속성에 극한의 친화력이 있었다. 창술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 두 가지를 조합하고 용사 버프까지 받아 몇 년 만에 대륙 최강의 반열에 올랐고 종말을 막기 위한 대서시시가 시작되었다.
정말 고생 많이 했다. 죽을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동료들과 함께였기에, 용사라는 자부심 덕분에 버텨냈다.
그리고 종말을 막아냈다.
“너에게는 네 가지 선택지가 있다.”
“힘을 포기하고 지구로 귀환하거나.”
“그냥 지구로 귀환하거나.”
“힘을 포기하고 델라임에 남거나.”
“그냥 남거나.”
신은 그에게 네 가지 제안을 했지만 그가 보기에는 사실 상 두 가지였다.
“힘을 포기하지 않으면 제게 무슨 불이익이 있습니까?”
“없다. 네게 약속된 보상은 그대로 갈 것이니. 하지만 세계의 한계 이상으로 힘을 사용한다면 그에 따른 불이익이 갈 것이다. 용사의 힘은 일반적이지 않고, 남용할 경우 세상에 혼란을 야기하니까.”
“세계선의 한계라면?”
“델라임이라면 대륙 최고의 기사 수준까지. 지구라면 최고의 이종격투기 선수 수준까지.”
“아하, 이해했습니다. 근데 그러면 용사의 힘은 그냥 장식 아닙니까?”
“어쩔 수 없다. 어떻게 하겠느냐.”
“힘을 포기하지 않고 지구로 귀환하겠습니다.”
힘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건 똑같지만 그래도 용사의 힘은 그가 이곳에서 용사로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였다.
단순히 장식용 트로피로 전락한다고 해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았다.
“네 선택을 존중한다. 지구로 돌아가면 곧장 로또를 사라. 번호는 1, 3, 11, 28, 39, 40이다. 그리고 그 다음 주 번호는 22, 36, 37, 41, 44, 45다. 혹시 모를 혼란을 피하기 위해 한주에 하나씩 사도록. 그리고 그걸로 사야할 주식은 동화전자이며 3만원 아래로 떨어지면 바로 사고 11만원 이상이 되면 다 팔아라. 그 다음에는 미국 주식 중에 리얼 망고라는 종목을 9$ 아래에 사서···.”
신이 알려주는 지식들을 모두 실행할 경우 박상준은 수천억 대의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세상 하나를 구한 것치고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결코 작지 않은 대가다.
그리고 이것을 택한 것 또한 박상준이었다.
델라임에 남으면 왕이 될 수 있지만 지구의 문명이 그리워 귀환을 택했으니까.
“용사님,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예요.”
“세상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델라임 인류들의 환대를 받으며, 그렇게 그는 지구로 돌아와 수천억의 자산가가 되었다. 평생 병에 걸리지 않는, 이종격투기 챔피언이 될 만한 몸을 손에 넣었다.
“격투기 선수가 되도 재밌을 것 같은데.”
무언가를 가졌다면 써보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다. 박상준은 곧장 이종격투기 세계에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한국을 재패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챔피언에게 도전하는 자리에서.
“어?”
“어?”
전직 용사들은 옥타곤 위에서 서로를 인지했다.
“당신···.”
“당신도···?”
Ready, Fight!
대화는 짧았다. 래프리가 경기 시작을 선언했고 서로의 주먹을 터치하는 즉시 경기가 시작되었다.
후욱-
가벼운 잽들이 서로를 교차하며 먼저 탐색한다.
하지만 곧 움직임이 빨라진다.
─!
─!
주먹이 서로의 피부를 스친다. 뒤이어 불어오는 풍압이 긴장감을 더한다.
박상준이 위빙으로 상대의 주먹을 피하며 카운터를 날린다. 챔피언의 목이 급격히 꺾이면서 주먹이 허공을 가른다. 곧 바로 이어지는 반격. 카운터의 카운터가 나왔지만 박상준은 당황하지 않고 허리를 뒤로 재치며 피해낸다.
와아아아아아!
상준박! 상준박!
킬리언 패럴!
킬리언! 죽여 버려!
누구도 맞지 않았지만 눈으로 쉽게 따라갈 수 없는 수준 높은 공방에 관객들의 환호성이 커진다.
잠깐의 여유. 박상준과 킬리언은 서로를 보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동질감일까, 아니면 호승심일까.
‘오랜만이야.’
비슷한 수준의 상대와 싸워보는 건. 절로 피가 끓어올랐다.
다시금 주먹이 교차했다. 피하고 날리고, 피하고 날리고. 종이 한 장 차이로 서로에게 닿지 않는 공방이 계속되었다.
속도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더 빨라졌다.
‘어쩌면 조금 따분했을지도.’
용사가 되어 차원을 구하기 위해 지겹게 싸워왔다. 다치기도 많이 다쳤고 죽을 뻔한 적도 많았다.
그래서 평화로운 지구의 삶을 소망했다. 하지만 이미 용사로서의 경험은 그의 몸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수천억의 자산을 가지고 편히 쉴 수 있음에도 굳이 이종격투기 선수가 되었다. 전력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전장이 그리웠다는 반증.
어쩌면 그에게 평온한 일상은 너무 멀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애써 부정하던 진실을 깨달은 순간, 박상준을 제약하던 리미트가 조금씩 풀려갔다.
‘힘을 쓰지 말라고 했지만 같은 용사를 상대로라면 괜찮지 않을까?’
답답한 갈증이 일었다.
고작 이 정도 수준이 아니라 전력으로 날뛰고 싶었다.
왜 참아야 하지?
자신도, 상대도 이 정도로는 절대 만족하지 못하는데.
주먹이 아니라 창을 들고, 공기가 아니라 오러를 가르며, 힘을 제약하지 않고 모든 것을 폭발시켜야 한다.
우드득, 근육이 팽창하고 피가 빠르게 돈다. 간만에 만난 적수에 아드레날린이 폭주했다.
그 순간, 챔피언과 눈이 마주쳤다.
‘너도 마찬가지였구나.’
‘야, 너도?’
‘나도.’
평온한 삶을 바라면서도 이미 용사로서 살아온 삶이 길기에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모순. 그리고 힘을 드러내고 싶은 갈증.
‘이 정도는 괜찮잖아.’
그래, 이 정도는 괜찮을 거다. 민간인이 아니라 같은 용사를 상대로 하는 거니까.
아마도.
파직-
미약한 번개가 박상준의 주먹에 맺혔다. 이에 호응하듯, 챔피언의 주먹에 오러가 뭉글거렸다.
지구에서는 허락되지 않은 그 힘이 서로를 향해 날아가는 순간.
─!
그들의 세상이 뒤집어졌다.
* * *
와아아아아-
옥타곤 위에는 챔피언과 도전자가 피 튀기는 난타전을 벌인다. 서로의 주먹을 모두 피하던 이전과는 다르지만 이것도 이것대로 즐거웠다.
사람들의 함성이 더욱 열기를 더해간다.
그리고 관객석에 앉아 한 명의 관중으로 있던 김우진은 이마를 짚었다.
“뭐야, 저 또라이 새끼들은.”
“호승심이 동한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용사가 용사랑 싸울 일은 거의 없잖아요?”
“그렇다고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사고를 쳐?”
충돌하기 직전,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가 반응해 둘을 연옥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신의 더미들이 그들을 대신했다.
인간들은 결코 눈치 채지 못할 찰나, 덕분에 경기는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저 새끼들, 이름이 뭐야?”
“챔피언쪽은 킬리언 패럴이에요. 구한 차원은 세트라. 용사로서 세트라에서 지낸 시간은 15년이요. 본래 나이는 49이지만 본인의 희망대로 모두가 지구를 떠나기 전의 34살로 인식해요.”
“반대는?”
“도전자쪽은 박상준이에요. 구한 차원은 델라임. 용사로서 지낸 시간은 16년이고요. 나이는 본인 희망대로 떠나기 전인 28살.”
“신이랑 맺은 계약이 우스워 보였나?”
“그렇다기 보다는 서로 흥을 못 이긴 것 같던데요.”
“그럴 거면 그냥 따로 만나서 하라고. 왜 공개적인 자리에서 지랄인데.”
“어디서 하던 연옥으로 끌려가는 건 똑같지 않나요?”
“적어도 숨기려는 노력이라도 하잖아. 저건 그냥 대놓고 엿 먹으라는 거고.”
김우진이 팔걸이를 두들겼다.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본 이상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지구에 귀환한 용사가 몇이지?”
“방금 사라진 둘을 포함하면 다섯이죠.”
“용사로 활약하고 있는 놈들은?”
“21명이죠.”
“빌어먹게도 많네.”
“신들이 지구를 선호하거든요. 용사가 되도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게 빨라서요.”
멸망 직전의 차원에는 무리지만 조금 여유가 있는 차원에는 지구인을 용사로 삼는 것을 선호하는 신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소장님이나 저를 비롯한 여러 신들이 지구에서 살다보니 자연스레 재능이 많은 자들이 늘어났어요.”
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럼 앞으로 지구에 귀환한 용사들이 훨씬 많아진다는 건데.”
그놈들이 힘을 포기할 리가 없다. 재발 방지를 위해서 확실한 일벌백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옥으로 가자.”
그 개새끼들은 내가 직접 관리한다.
“아직 경기 안 끝났는데요?”
“어차피 더미 싸움이잖아. 누가 이기게 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한국에서 계속 지내다 보니 한국인이 더 친숙해요.”
퍽-
그 순간, 도전자의 더미가 챔피언 더미의 턱을 갈겼다. 극적인 카운터였고 챔피언이 쓰러졌다.
새로운 챔피언이 탄생했다.
“이제 가자.”
“네.”
* * *
“절대신님을 뵙습니다!”
연옥이 새롭게 지어진 이후, 직접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현 연옥의 소장, 백신전 소속의 신, 카르딘이 급하게 나왔다.
“미, 미리 말씀하셨으면 준비를 했을 텐데···.”
“신경 쓰지 마. 갑자기 온 건 나니까. 그리고 절대신이라고 부르지 마.”
“그러면 뭐라고···?”
“소장님이라고 불러.”
“하지만 소장은 저입니다만?”
“······.”
“···소장님!”
잠시 눈치를 보던 카르딘이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김우진이 본론을 꺼냈다.
“방금 전에 죄수 둘 새로 들어왔지?”
“예. 지구 출신의 전직 용사 둘이 왔습니다.”
“그 새끼들 전부 상담실에 집어넣어.”
“예?”
“내가 직접 상담을 좀 해보려고 해.”
“예? 직접 말···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잠시 후, 김우진은 상담실에 들어갔다. 이전의 연옥의 상담실보다 배 이상 컸다. 마음 놓고 싸우기에는 적절한 무대.
내부에는 눈과 귀, 입, 손과 발, 그리고 마나까지 완전히 구속된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두 명의 죄수들이 있었다.
시합을 뛰다가 흥과 호승심을 못 이겨 인생 망친 멍청이들.
김우진의 눈짓에 교도관들이 모든 구속 장치를 풀었다. 죄수들이 상황 파악을 못하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야.”
그리고 김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니들이 그렇게 싸움을 잘해?”
김우진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들어와, 이 씨발놈들아.”
* *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박상준이 팅팅 부은 머리를 깊게 숙였다.
압도적인 패배였다. 무슨 짓을 해도, 어떤 발악을 해도 통하지 않았다. 어른과 아이의, 아니 총 든 어른과 아기의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호승심이고 나발이고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너희들은 신이 우습냐?”
탁탁, 김우진이 탁자를 두들겼다.
“힘을 안 뺏고, 최대한 편의 봐주면 그냥 넙죽 받아 가면 그만이지, 왜 씨발 정도를 모르지?”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계약서 썼어, 안 썼어?”
“썼습니다.”
“저도 썼습니다.”
“그럼 이런 상황이 될 거라는 걸 예상 못했어?”
“······.”
“흥이···.”
“박상준? 말을 하기 전에 그 말을 들었을 때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잘 생각하고 이야기 해.”
“···죄송합니다.”
김우진이 손가락 두 개를 폈다.
“이제 너희한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어. 이대로 연옥에서 평생 썩거나.”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힘은 물론이고 용사행의 대가로 받았던 모든 보상들까지 반납하고 지구로 돌아가는 것.”
“모든 것이라면···?”
“돈, 육체, 그 밖에 용사가 된 후 얻었떤 모든 것. 너희들은 용사로서 소환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거야.”
“그, 그건 너무합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저희가 잘못을 했다지만 모든 걸 다 앗아가는 건···!”
“그럼 계약을 준수 했어야지.”
김우진이 살기를 뿜어냈다. 두 죄수가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지금 내가 장난하는 것 같아? 신들과 맺은 계약이 우스워?”
“하, 하지만···.”
“선택 해.”
두 죄수는 섣불리 선택하지 못했다. 감옥에서 평생 썩는 것도, 단순히 힘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구로 돌아가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다 못 해 돈이라도 조금만 남겨준다면···
“소장님!”
그때, 상담실의 문이 열렸다. 연옥의 진짜 소장, 카이딘이었다.
“무슨 일이야.”
좋지 않은 직감에 김우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교도관들을 시켜도 될 일에 소장인 그가 직접 나섰다? 물론 그에게 잘보이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표정이 그것만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큰일 났습니다!”
“큰일?”
“종말, 종말이 시작됐습니다.”
“그게 뭐가 큰일이라고···.”
“지구! 지구입니다!”
“뭐라고?”
“방금 지구에 종말이 시작되었습니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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