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130화 (130/150)

#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룡(7) >

알베니우스가 샴페인을 건넸다.

“수고 많았어. 이제 데이드람은 종말을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감사해요. 알베니우스님 덕분이에요.”

“그런데 생각보다 더 오래 걸렸는데 무슨 일 있었나?”

“···아뇨. 아무것도요.”

율리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알베니우스의 장담에도 불안이 도져 뻘 짓을 하고 다녔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다 이야기해주시는 거죠?”

“그러려고 온 거니까.”

알베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무형의 기막이 주변을 감쌌다.

“힘을 막 써도 되요? 신들에게 쫓기고 계신 것 아니었어요?”

“내가 너한테 신들한테 쫓긴다고 말 했었나?”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반 년 동안 그걸 눈치 못 채면 멍청이에요.”

“하긴.”

알베니우스가 픽 웃었다.

“이 정도는 상관없어. 이 정도 수준으로 들킬 거였다면 진즉에 신들에게 잡혀가 죽었겠지.”

“신들도 전지전능하지는 않네요.”

“대충 짐작하고 있잖아?”

알베니우스가 얼마 남지 않은 술잔을 마저 비웠다. 테라스에 몸을 기대고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네가 가장 묻고 싶은 게 뭐지?”

“알베니우스님이 늘 말씀하시던 김우진이란 분이요. 그분 살아 있다고 하셨죠?”

“그래.”

“신을 죽였고요.”

“신‘들’을 죽였지.”

“···예상보다 더 대단하신 분이네요. 그분이 어디 계신지 알고 싶어요.”

“감옥.”

“네?”

알베니우스는 오래 전부터 신들이 만들고 운영해온 감옥, 연옥에 대해 이야기했다.

“···힘을 포기 하지 않으면 용사들을 감옥에 가둔다고요? 실컷 이용해 먹고 토사구팽한다는 건가요?”

“그래. 정확해.”

“어떻게 신이라는 자들이 그럴 수 있죠?”

“신이니까 그럴 수 있지. 놈들은 모든 게 자기들 마음대로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할 종족들을 사전에 쓸어버리기도 했다.

“그럼 그분을 만나지는 못하겠군요.”

“당분간은 그렇겠지.”

“당분간은 이라면?”

“짐작하겠지만 나는 신들과 같은 우주 아래 살 수 없는 몸이야. 놈들이 망하던, 내가 망하던 둘 중 하나가 끝장나야 하지.”

물론 알베니우스가 끝장날 가능성이 현저히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당하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그래서 나는 백신전을 무너트리기로 했다. 데이드람의 세계수는 나와 뜻을 함께하기로 했고.”

지난 40년 동안 틈틈이 신들에게 증오와 분노를 가진 자들을 모아왔다.

“김우진. 그분을 감옥에서 구출하시려는 거군요?”

“구···출···이라고 해야 할지···.”

알베니우스가 턱을 긁적였다.

“김우진이 연옥의 소장이거든.”

“···네?”

율리아가 정확한 사정을 이해하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 * *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신들과 거래를 하셨다는 거군요.”

자신이 구한 글라크라는 차원을 구하기 위해서.

“그래.”

“진짜 영웅이네요.”

“영웅이지.”

어떤 심정으로 그런 짓을 했던, 김우진이 한 행동은 차원의 모두를 살리고 자신을 희생하는 일이었다.

“신들도 악질이네요. 전직 용사에게 용사들의 관리를 맡기다니.”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는 이기적인 놈들이지.”

이야기의 흐름은 알베니우스의 목표까지 이어졌다.

“해서 가장 중요한 건 김우진을 이쪽으로 끌어들이고 연옥을 없애버리는 거다.”

김우진은 최초로 신을 죽인 신살자다. 그가 함께하는 것과 그러지 않는 것은 꽤 차이가 크다.

실질적인 무력으로던, 상징성으로던.

그리고 연옥은 신들의 오만과 욕심의 결정체. 그곳을 부수고 용사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 최우선 목표다.

“방법은 있나요?”

“신이 아닌 자가 연옥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야. 용사가 되어 차원을 구한 뒤, 힘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

“죄수로 들어가는 거군요.”

“그래. 이미 염두에 둔 자가 있다.”

“발라크님이군요?”

엘븐에서 만나본 엘프들 중 가장 강했던 자. 그건 다른 말로 용사가 될 가능성이 높은 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맞아.”

“하지만 죄수로 들어가는데 연옥을 부술 수 있을까요? 아, 김우진이라는 분을 알베니우스님의 이름을 대고 설득하면 되겠군요.”

“그건 안 돼.”

“왜요?”

“김우진은 지난 20년 동안 격리 차원에서 고문을 받았으니까.”

알베니우스는 김우진을 믿는다. 40년 전의 김우진을. 신들의 고문을 받은 김우진까지 믿지는 못한다.

그가 강하다고 해도 정신력은 결국 인간이었다. 드래곤들도 견디기 힘든 고문을 그가 무난히 버텨냈을까?

물론 최초로 신을 죽인 특별한 인간인 만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다. 신들을 상대하는 일인 만큼 사소한 변수도 조심하는 게 좋다.

“김우진을 설득해 아군으로 만드는 게 목표이긴 하지만 섣불리 다가갈 수는 없어. 김우진이 신들의 개가 되었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이해했어요. 하지만 그런 대단한 분이 신들에게 넘어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일이지.”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놈은 애초에 의심이 많아. 설사 신에게 넘어가지 않았다고 해도 섣불리 내 이름을 대면 오히려 의심부터 할 거다.”

“그러면 그걸 해결할 방법은요?”

“세계수의 씨앗.”

“씨앗이요?”

“씨앗을 연옥에 심게 만들어서 데이드람의 세계수를 통해 연락을 하는 거지. 그리고 내가 직접 설득하는 게 가장 베스트야.”

“그럴 듯 하네요.”

“아무렴, 누가 세운 계획인데.”

알베니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세계수가 자라는 시간을 고려하면 무척이나 오래 걸리겠지만 애초에 신들을 상대하는 일이다.

아직 준비도 완벽하지 않아서 그것까지 시간과 함께 고려했다.

“근데 씨앗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을까요?”

“공간에 관련해서는 신들보다 내가 우위야. 신들도 속일 수 있는 아공간을 만드는 게 가능해. 물론 하고 나면 몇 달은 앓아누워야겠지만 주신 급이 아니고서야 눈치 채지 못할 거야.”

음, 율리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그거 제가 가도 될까요?”

“뭐?”

“아니, 그게 훨씬 빠르잖아요. 굳이 발라크님이 용사가 되고 종말을 막는 걸기다리는 것보다. 언제 될지, 기약이 없는 일이잖아요? 그에 비해 저는 이미 차원을 구했고 곧 신들이 저를 만나러 오겠죠. 얼마나 걸릴까요?”

“···통상적으로 나흘 뒤에 오긴 한다만.”

“그럼 내일이네요. 어머니 나무의 씨앗을 심고 자라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만···. 위험한 일이야.”

“살면서 위험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전 그분을 직접 만나서 묻고 싶어요. 세이드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그리고 세이드의 복수도 하고 싶고요.”

진짜 가족을 잃고, 유일한 가족이었던 세이드까지 신에게 잃었다. 그녀의 분노는 정당했다.

“들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신들의 개가 되었던, 그렇지 않던 영웅이었던 분이니 한 번은 봐주시지 않을까요?”

“그렇게 너그러운 놈은 아니야.”

“그럼 최선을 다해서 조심해봐야죠.”

“···이건 계획 밖인데. 괜히 세이드 때문에 너한테 사소한 것까지 주절거렸군.”

“물어본 것도, 자원하는 것도 전데요, 뭐.”

잠시 고민하던 알베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혼자 판단할 문제는 아니야. 세계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올 테니 연회를 즐기고 있어라.”

“얼마든지요.”

“금방 다시 오지.”

알베니우스가 사라졌다.

기막이 사라졌는지 음악과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아름다운 밤이네요.”

율리아가 당분간 보지 못할 환할 보름달을 한참 동안 구경했다.

* * *

새하얀 공간.

율리아는 이곳이 어디인지 눈치 챘다. 이미 한 번 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신을 뵈어요.”

고개를 숙였다. 오연하게 서 있던 신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율리아를 선택하고 데이드람으로 보냈던 신이다.

“훌륭하군. 그대는 너무도 훌륭하게 종말을 막고 세상을 구했다. 그대는 영웅이다.”

“감사합니다.”

“해서 그대에게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신이 세 개의 손가락을 폈다.

“세 가지요?”

“하나는 힘을 포기하고 합당한 대가를 받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

“힘을 포기하라고요?”

“끝까지 들어라.”

“···네. 죄송해요.”

“두 번째는 힘을 포기하지 않고 대가 없이 그대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나를 섬겨볼 생각이 없느냐?”

율리아가 마른 침을 삼켰다.

‘저게 그거구나.’

알베니우스는 신들이 능력이 뛰어난 용사들을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녀 수준이라면 능히 제안이 올 것이라고도.

하지만 율리아가 택할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니요. 저는 본래의 차원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너무 지쳤거든요.”

“그렇군. 네 의견을 존중하마.”

다행히 신은 담담히 수긍했다.

“허면 너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힘을 포기하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거나.

힘을 포기하지 않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거나.

“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가요?”

“그래. 넌 세계를 구한 영웅이다. 그 정도의 선택지 정도는 얼마든지.”

율리아가 잠시 고민했다. 고민하는 척을 했다.

호의로 가득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알베니우스의 말대로라면 두 번째를 고르는 순간이 시작이라고 했다.

“···역시 힘을 포기하지는 못하겠어요. 제가 데이드람에 있었다는 증거고, 제 노력이자, 종말을 막기 위해 죽어간 사람들의 노력이에요.”

“이해한다. 아무리 우리가 힘을 내려준다고 한들, 그것을 성장시키고 종말을 막는 것은 너희들의 몫이지. 그 노력과 고난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다시 한 번만 물으마. 정말로 힘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냐?”

“네.”

“좋아. 네 선택을 존중해주마.”

신의 손이 율리아의 머리를 짚었다.

“눈을 감아라.”

“네.”

“다시 눈을 떴을 때, 너는 본래 네가 있어야 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네, 감사했어요.”

“나야 말로.”

그 말을 끝으로.

세상이 뒤집어졌다.

“쯧, 아깝군.”

신의 혀 차는 소리가 스치듯 들려왔다.

율리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것은 아르반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힘은 제약당해 아무런 마나나 용사의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따라와라.”

온 몸이 구속된 채, 그녀는 끌려갔다.

그리고 모든 구속이 해제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율리아 카르센, 맞나?”

검은 머리의 남자가 짜증 가득 담긴 얼굴로 앞에 앉아 있었다.

‘이 자가···.’

김우진.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세이드의 동료.

연옥의 소장.

“네.”

“···대답이 빠르군. 종족은 엘프고.”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당장이라도 입술을 때면 알베니우스에 대해, 세이드에 대해 물을 것 같았다.

하지만 참았다.

지금의 김우진이 알베니우스가 말해주었던 그 영웅, 그대로의 모습일 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으니까.

아직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

욕구를 간신히 억제하고 혀가 가는 대로 말을 뱉어냈다.

“잘못 됐네요.”

“엘프가 아니라고?”

별 의미 없는 트집.

하지만 그 잠깐의 트집 덕분에 율리아는 간신히 스스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정확히는 하이엘프에요.”

그녀가 담담히 대답했다.

“빌어먹을. 나이는?”

“237살이요.”

“어리군.”

“하이엘프치고는 그렇죠.”

“아르반이라는 차원 출신이고.”

“네.”

“데이드람을 구했고.”

“광룡이 미쳐 날뛰던 차원이었어요. 꽤나 힘들었죠.”

당신은 사룡을 막았다면서요?

“여기가 어딘 줄 아나?”

“감옥이요.”

아무렴, 그녀만큼 연옥에 대해 상세히 아는 죄수는 드물 것이다.

“왜 감옥에 오게 되었는지는 알고?”

“대충 짐작은 해요. 질문이 너무 노골적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다.

“그렇다면 대답은?”

“여기 오게 된 걸로 대답이 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출소하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야.”

“하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거고 다른 하나는 시체가 되어 나가는 거군요.”

“그걸 알면서도 거절하겠다고?”

“다른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여기 처음 들어온 놈들은 모두 너와 같은 생각을 해. 그런데 몇 놈이나 탈옥했을 것 같아?”

“불가능하다는 거네요. 그래도 지금은 그렇네요. 아시잖아요? 하이엘프의 시간은 길어요.”

“···망할 엘프놈들.”

김우진이 욕설을 내뱉는다.

신경질적인 표정이 알베니우스의 상세한 설명 그대로라 웃음이 나올 뻔 했다.

“알았다. 1178.”

“1178? 그게 뭐죠?”

“네 죄수번호.”

“아하, 3이 하나도 없는 게 아쉽네요.”

“3?”

“다른 엘프들은 몰라도 저희 차원의 엘프들은 3을 행운의 숫자로 여겼거든요.”

“그렇군.”

알베니우스가 그랬다. 김우진의 나라에서는 3이 행운의 숫자라고. 슬쩍 던져봤는데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데리고 가.”

교도관들이 그녀를 데리고 독방으로 이끌었다.

“얌전히 있어라.”

“···여기가 독방.”

제법 넓었으나 이렇다 할 무언가가 있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계획을 정리했다. 김우진이 신들의 개가 되었는지 아닌지 알아보기, 그리고 세계수의 씨앗을 심게 만들기.

고민하고 있으니 저녁이 나왔다.

“와. 여기 밥이 엄청 맛있네.”

살면서 먹어본 그 무엇보다 맛있었다. 연옥에서의 삶이 마냥 나쁘기만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곧 밤이 되었다.

“이봐. 1178번 엘프.”

열린 배급구 사이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율리아가 고개를 내밀었다.

“저 말인가요? 옆방이신 것 같은데.”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탈옥하고 싶지 않아? 설마 이 개 같은 곳에서 계속 있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아니겠지?”

“아직까지 그런 곳인지는 모르겠네요. 시설 자체는 나쁘지 않아서.”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으음.”

탈옥이라. 딱히 생각은 없지만 일단은 죄수들과 친해지고 연옥의 사정을 파악하는 게 낫겠지.

“방법은 있고요?”

그녀가 생긋 웃었다.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룡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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