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룡(6) >
광룡의 숨결.
율리아는 그 절망적인 상황을 기억한다.
마기로 점철된 독무가 쏟아졌고 그녀의 바람은 독기를 몰아낼만큼 충분히 거세지 못했다.
숨결은 그대로 그녀를, 그녀를 넘어 연합군을 직격했다.
오러가 녹아내렸다. 갑옷이 부식되었다. 정령의 가호가 박살나고, 검이 녹슬었다. 많은 전력들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악몽과도 같은 공격이었다.
아니, 그녀에게 지금의 트라우마와 지금의 강박을 심어준 원인, 그 자체였다.
그녀를 패배하게 만든 결정적 한 방.
검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베니우스님은 말했다.
‘지금의 너라면 광룡을 잡을 수 있어. 장담하지. 놈보다 상위종인 차원룡의 말을 믿어.’
종말을 막을 수 있다고.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한 번에 딱딱 고쳐질 수는 없다.
패배는 진한 상처를 남겼고 율리아는 아물지 않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했다.
‘다른 확인은 다 했어.’
이번이 마지막이다. 실전을 통한 진짜 확인. 미루고 싶어도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다.
오러를 두르고, 바람을 감싼다.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며 진공을 만든다.
그리고.
휘두른다.
─!
압축되고 억제되던 바람이 일거에 폭발한다. 폭풍을 넘어 광풍이 되어 용의 숨결과 부딪힌다.
─────!
고막이 찢어질듯한 굉음이.
흔들리는 대지가.
해소되지 못한 충격파가.
일거에 터져 나온다.
“큭!”
“모두 이쪽으로!”
마법사가 방어 마법진 마력을, 성자가 가호를 두른다. 율리아를 제외한 일행들이 그 뒤에 몸을 숨긴다.
그리고 모든 것을 휩쓸던 폭풍이 거쳤을 때.
“···어?”
“응?”
“······?”
광룡의 숨결은 소멸해 있었다.
흔적도 없이.
* * *
“······?”
광룡, 발바르가 닥쳐온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분명히 숨결을 토해냈고 하이엘프가 검을 휘둘렀다.
바람이 불었고 숨결과 충돌했다.
그래, 거기까지는 이해했다.
그렇다면 결과도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숨결은 바람을 밀어내고 그대로 하이엘프 용사를, 그 뒤에 있는 인간들을 덮쳐야만 했다.
그런데 어째서 숨결이 중간에 사라졌을까.
“통했어요···!”
하이엘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희에 차 온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는 용사.
“통했다고요!”
“흥, 고작 간신히 한 번 막아냈다고 너무 기뻐하지 마라!”
그제야 이 모든 현상이 하이엘프에게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조금 당황했을지언정,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저 숨결을 한 번 막아냈을 뿐이다. 숨결이 드래곤들의 권능이었지만 상대는 용사였다. 신이 힘을 내려주었기에 전력을 다하면 한 번쯤은 막아낼 수도 있다.
괜히 용사가 종말의 대적자가 아니니까.
하지만 결국 한 번에 불과할 것이다. 그녀가 조금 더 강하다면 모를까, 이미 잠들기 전에 그 수준을 확인했다. 조금 더 강해졌을지언정, 한두 번 막아내는 게 고작일 거다.
“하지만 나는 열 번도 넘게 쏠 수 있다!”
본래는 연속으로 한두 번이면 마력이 바닥나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어둠의 가호를 받은 그는 일반적인 드래곤들과는 달랐다.
“죽어라!”
───!
다시 한 번 숨결을 토해냈다.
하이엘프가 검을 휘둘렀다.
“···어?”
“······.”
“그래, 두 번! 두 번이 최선이겠지! 이제 네게 남은 건 죽음뿐이다!”
──!
또 다시 숨결이 공간을 격하고 날아갔다. 이전보다 더욱 마력을 집중시켜 더 거대하고 독했다.
하지만.
서걱-
발바르의 눈이 커졌다.
이번에는 확실히 보았다. 하이엘프가 검을 휘두르니 바람이 불었다. 극도로 압축된 칼날 같은 바람이 그대로 숨결을 반토막 내버린다.
거센 광풍들이 힘을 잃은 잔재들은 저 멀리 날려버린다.
드래곤의 권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다!”
다시 한 번.
또 한 번.
마지막으로 한 번.
진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쿨럭···!”
발바르가 무릎을 꿇었다. 드래곤 하트를 완전히 쥐어짠 나머지 마나 역류가 일어났다. 온 몸의 마력이 통제를 잃고 날뛰기 시작했다.
드래곤이기에 결국 수복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에게는 그 정도로 여유로운 시간이 없다는 거였다.
“···말했잖아요.”
내내 방어만을 일삼던 하이엘프가 처음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통한다고요.”
검을 휘두른다. 바람의 칼날이 발바르를 덮친다.
“더 이상 당신이 알던 한심한 하이엘프가 아니에요.”
“크아아악!”
비늘이 일부 뜯겨져 나갔다. 끔찍한 고통에 비명이 절로 튀어 나온다.
“내 힘이! 당신한테!”
율리아가 땅을 박찼다. 그녀의 신형이 바람을 타고 쏘아졌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통한다고.”
서걱-
날개가 잘렸다. 항상 두르고 있던 보호 마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끔찍한 고통에 발바르가 비명을 질렀다.
“대체, 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이엘프가 특별한 종족임은 안다. 용사로 선택 받고 신에게 힘까지 받았으니 더 특별해졌겠지.
하지만 그럼에도다. 그녀가 하이엘프라면 발바르는 드래곤이었다. 모든 종족 위에 군림하는 최상위 포식자. 그런 그가 어둠의 선택을 받아 종말의 사도가 되었다.
이미 한 번 붙어봤고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고작 6개월이라는 차이로 좁혀질 수준이 아니었다.
하물며 지난 6개월간 발바르는 잠에 빠져들었다. 드래곤에게 동면은 힘을 흡수하고 안정화시키는 과정이고 본래 예정보다 빠르게 깨어나긴 했지만 그 또한 반년 전에 비해 강해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대체.
“대체 왜 내가 지느냔 말이다!”
발바르가 역류하는 마나들을 억지로 붙들었다.
숨결이라는 종족의 권능은 더 이상 불가능했지만 다른 건 아니었다.
드래곤에게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단순히 의지를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마나가, 마력이 반응한다. 복잡한 술식도, 마법진도 필요 없다.
─!
낙뢰가 내리친다.
─!
불꽃이 폭발을 일으킨다.
─!
대지가 갈라져 지진이 일어나고.
─!
해일이 일어나 율리아를 덮친다.
그럼에도 그 어떤 것도 그녀에게 닿지 못한다. 그저 검을 휘두르고, 바람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드래곤의 마법은 한낱 마나의 흔적이 되어 소멸한다.
“어떻게요? 간단해요.”
그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뚫고 다가온다. 나직이 속삭인다.
“당신보다 강한 드래곤한테 배웠거든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돼는···!”
“저라도 안 믿을 것 같은 말이긴 하네요.”
뭐, 그게 중요한가요.
“이제는 제가 당신을 이길 수 있다는 게 중요하죠. 당신은 모를 거예요.”
“오, 오지 마···!”
하이엘프가 한 걸음 전진할 때, 발바르도 한 걸음 물러났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얼마나 간절히 이기고 싶었는지.”
“오지 마!”
“얼마나 이 순간을 바라왔는지.”
다시 마법 폭격이 떨어졌다. 하지만 애꿎은 대지만 손상될 뿐, 율리아는 그대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그냥 순수하게 믿을 걸 그랬어요.”
드래곤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는데.
“괜히 죄 없는 동료들을 고생시키고 말았어요. 제 불안 때문에.”
“오지 말라고!”
억지로 숨결을 토해내려던 발바르가 피를 토했다.
그리고 마침내 율리아가 발바르 앞에 섰다. 거대한 드래곤과 작은 하이엘프. 분명히 그 차이는 명확했음에도 크기가 반대로 역전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발바르가 발악하듯 외쳤다.
“나는 위대한 드래곤이다! 고작 하이엘프 따위에게 패배할 리가 없어!”
“현실을 부정하는 건가요? 반년 전의 저를 보는 것 같네요.”
“닥쳐라!”
파캉, 번개가 부서졌다.
“그때 당신이 제게 뭐라고 했죠? 하찮은 하이엘프 주제에 발악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하셨죠.”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릴게요.
“소용없는데 더 발악해서 뭐해요.”
그냥 곱게 가시지.
율리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저승에 가서는 당신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한테 사죄하세요.”
“나, 나는 여기서 죽을 수 없···!”
서걱-
햇빛에 반사된 검이 반짝였다.
길게 뻗어나간 바람의 칼날이 그대로 용의 목을 베었다.
“아···.”
단발마의 비명.
용의 머리가 떨어졌다.
* * *
“···이겼어.”
율리아가 환희했다.
“정말로 제가 이겼···!”
그리고 곧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승리로 인한 고취, 환희가 아니었다. 뒤늦게 들이닥친 부하가 온 몸의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용사님!”
“용사님!”
동료들이 다급히 달려왔다. 마법사가 치유 마법을 발현시키고, 성자가 신성력을 쏟아냈다.
“어디를 다친 거야!”
“그냥 조금 무리해서 그래요.”
알베니우스에게 배웠다고 한들, 상대는 광룡이었다. 그녀가 신이 아닌 이상에야, 그 숨결과 마법을 정면에서 받아내는 게 결코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기껏 잡은 승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광룡이 희망을 가지고 반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김우진이란 분은 이것보다 더 대단한 용을 죽여버렸다는데 대체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진짜 죽을 것 같이 아프···.”
그때, 광룡의 업이 그대로 율리아에게 흡수되었다. 업은 율리아의 격을 한층 상승시켰다.
“···지 않네요.”
그 여파로 육체가 최상의 상태를 찾아가 일부 상처가 회복된 건 덤이었다.
“광룡의 업을 흡수하셨군요. 그래도 아직 부족합니다.”
성자가 일어서려는 율리아를 다시 눕히고 상처를 치유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율리아는 완전히 정상적인 몸 상태를 되찾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신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진짜로 율리아가 광룡을 죽인 거지?”
“···그렇습니다. 그것도 이렇게 쉽게.”
“쉽지는 않았어요. 무리했다니까요? 방금 피 토한 것 잊으셨어요?”
“모든 것은 신의 뜻입니다. 신께서 내리신 가호를 어찌 광룡 따위가 넘볼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졌는데요.”
신의 가호라기보다는 알베니우스와 세계수의 도움이다. 하지만 율리아는 굳이 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신이 결코 아군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인지했기에.
“이겼다···! 이겼어!”
“맞습니다. 종말이 끝났습니다!”
“내가 살았다! 살아남았어!”
그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거의 악다구니를 썼지만 주변에 마물은 없었다.
“넌 정말 최고야, 용사님!”
“감사해요.”
“그런데 이럴 거면 굳이 외곽을 돌면서 확인할 필요도 없었던 것 아니야?”
“아하하···. 그건···.”
데이지의 물음에 율리아가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광룡이 죽었습니다! 종말이 끝났습니다! 저희는 살았고 이 세상은 더 이상 멸망하지 않습니다! 제 삶이 허무하게 끝나지 않게 됐다고요!”
마법사가 폭죽처럼 불꽃 마법을 터트렸다.
“전 처음부터 믿고 있었습니다! 용사님!”
“아니잖아요.”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맞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신의 은총입니다. 용사님을 보내주신 신께 감사드립니다. 신께서 보우하시니 이 땅의 어둠이 물러갔고···.”
성자는 자신의 기쁨을 신에게 바쳤다.
그들이 진정하기까지는 한 시간이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광룡의 머리를 챙겨 위풍당당 귀환했다.
* * *
“용사님이 광룡의 목을 베셨다!”
“종말이 끝났다!”
“단 네 명이서 광룡을 죽였다!”
“율리아 카르센 용사님 만세!”
“에드먼드 프로인 대마법사 만세!”
“데지어 호크네 경 만세!”
“성자 갈라스 콜먼 만세!”
광룡의 머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확실한 승전의 증거였다.
그들이 귀환하는 순간, 인류는 정말로 종말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일행은 연합이 모여 있는 제국의 황도로 돌아왔다.
“맙소사, 설마 그 인원으로 광룡의 목을 베다니···.”
“확인만 해본다고 하지 않았나?”
“엘프들의 자신감이 진짜였군.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어쨌든 그 지긋지긋한 광룡놈이 드디어 죽었군.”
“감사합니다, 용사님. 덕분에 세상이 구원받았습니다.”
연합의 일원들은 그들이 숟가락을 올릴 겨를도 없이 광룡을 처치한 율리아에게 미약한 불만을 가지면서도 종말을 막았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고 기뻐했다.
반 년 전, 율리아가 패배하고 마물 군단이 남하하면서 지하까지 기어들어가던 분위기가 단숨에 반전되었다.
“용사님께서 광룡을 처치하셨다!”
“종말이 끝났다!”
와아아아아아!
연합은 공식적으로 종말의 종식을 선언했고 승전기념일로 정하고 모든 도시에서 축제를 시작했다.
“용사님, 제 아들이···.”
“용사님! 종말을 막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사님!”
“용···!”
율리아는 황제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하고 일행들과 함께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했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집중을 독차지했고 몰려드는 인파에 기겁하며 용사의 힘을 사용해 테라스로 피신했다.
“하아, 역시 이런 건 성미에 맞지 않는데···.”
그리고.
“축하해. 마침내 종말을 막았군.”
“언제 오셨어요?”
“방금.”
“제가 여기로 올 줄은 어떻게 아시고?”
“뻔하지.”
테라스에서 기다리고 있던 알베니우스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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