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128화 (128/150)

#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용(5) >

“···저는 여기서 나가야겠습니다. 이건 미친 짓이에요!”

광룡을 제외한 모든 마물들을 고작 네 명이서 전멸시키겠다니.

미친 짓이었다.

“나도 마법사, 네 의견에 동의해.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야.”

하지만 그 미친 짓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럴 듯하게 들릴 수도 있는 법이다. 특히, 어지간한 마물들을 전부 일격에 썰고 다니는 하이엘프라면 더욱 더.

“···하지만 용사님이 한다니까 또 그렇게까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단 말이야.”

소란에 일어난 왕국 제일의 기사가 용사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북부 대부분이 광룡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마물들의 단위가 다릅니다. 최소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입니다! 단 칼에 다 죽인다고 해도 수백만번의 칼질이 필요하다고요!”

“그렇긴 하지만 어중간한 놈들은 또 수십마리씩 한 번에 쓸어버리잖아.”

“···그건.”

“거기에 우리가 도와주면 더 빠를 테고.”

“······.”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딱히 옳은 말도 아니었다.

“성자님. 정말로 성자님도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만 이상한 거 아니죠?”

“용사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신의 빛이 함께하시니, 결국 모두 옳게 될 겁니다. 그것이 마땅한 이치입니다.”

“······.”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저는 처음 봤을 때부터 성자님이 싫었습니다.”

애초에 신이라는 미지의 존재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고 의탁하는 성자와 진리를 탐구하는 대마법사는 그 궤가 달랐다.

“감정에 치우쳐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계시는군요. 마법사란 항상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까? 냉철하게 현실을 보십시오.”

마법사의 이니시에서 성자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아예 불가능할 것 같으십니까?”

“······.”

에드먼드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광룡이 아니라면 율리아가 쓰러지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피해를 줄이고자, 보다 확실하게 하고자 하는 건 좋지만 솔직히 마물들을 상대로 하는 실험은 무의미했다. 율리아는 이미 마물 수준에서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용사님은 고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잠시 방황하고 있으니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봐주는 것도 동료로서 할 수 있는 있지 않습니까?”

“저 눈을 보세요! 저게 어떻게 용사의 눈입니까! 그냥 돌아버린 광인이지!”

“용사님한테 광인이라니. 말이 좀 심한 거 아니야?”

“맞아요. 그러면 저도 상처 받아요.”

“···당신들은 다 미쳤어.”

결국 마법사도 동료들의 설득에 수용하고 말았다.

“감사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볼게요.”

그리고 다음 날, 용사 일행은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했다. 조용히 오염된 대지의 동태를 살피고 실력을 확인하려는 이전과는 달랐다.

마물의 전멸. 완전한 몰살.

온갖 어그로를 끌며 의도적인 혈로를 그리는 고난의 시작이었다.

* * *

수백만에 달하는 모든 마물들을 고작 넷이서 토벌하겠다는 건 사실 미친 짓이다. 그걸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기약 없는 미래에 기댄다.

누군가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누군가는 용사님이니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

누군가는 용사가 가는 길이 곧 신의 뜻이기에.

누군가는 그저 동료들의 등쌀에 밀려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각자의 생각이야 어떻던 같은 목표를 설정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은 같다.

마물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인다.

콰득-

율리아의 검이 거대한 지네 형상의 마물의 목을 갈랐다. 뚝 떨어지는 머리. 의지를 잃은 육신이 힘없이 쓰러진다.

하지만 마물들에게는 학습이란 게 없다. 다른 마물의 죽음에도 배우는 것 없이 무지성으로 달려든다. 수백, 수천, 수만.

율리아가 숨을 고른다. 기운을 담는다.

─!

명장이 만든 검이 거대한 마력을 받아 검명을 일으킨다. 검을 휘두른다. 광풍이 분다.

콰콰콰콰-

태산과 같은 용이 발톱을 할퀴듯, 거대한 상흔이 대지에 새겨진다. 그 사이에 존재하던 모든 마물들이 갈려나간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마물들은 순식간에 빈자리를 메우고 연이어 마법이 떨어진다.

────!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불의 비가 폭발을 일으킨다. 수십 줄기의 낙뢰가 연쇄 작용을 일으키며 마물들을 튀겨버린다.

성자의 기도로 신성한 빛이 깃들고 난장판이 된 마물들 사이로 용사와 기사가 질주한다.

전투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때까지 계속된다. 마물에게는 공포가 없기에 한쪽이 죽어야지만 끝난다. 그리고 먼저 전멸한 쪽은 마물들이었다.

“허억, 허억···. 이대로 가다간 분명히 죽습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마지막 한 방울의 마력까지 쥐어짠 마법사가 탈진하여 주저앉았다.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급하게 포션을 삼켰다.

“벌써 밤이 되가네. 빨리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마물들이 더 몰려오겠어. 찝찝해 죽겠네. 나 클린 마법 좀.”

마물들의 피를 뒤집어써 혈인이 된 기사가 몸을 털었다.

“마력이 하나도 없어서 당장은 안 됩니다.”

“제가 조금 도와드리겠습니다.”

성자의 가호가 마법사의 몸에 깃들었다. 마력의 수복이 더 빨라졌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죠. 피 냄새를 맡은 다른 마물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예.”

대충 클린 마법으로 피와 냄새를 지운 일행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투의 흔적을 쫓아온 마물들이 들이닥쳤다.

“이대로는 진짜 안 됩니다.”

일행은 오염된 대지 외곽에 굴을 파 은신처를 마련했다. 마법으로 모든 흔적을 최대한 지우고 주변에 알람 마법을 설치했다.

간신히 회복했던 모든 마력을 사용해 탈진한 에드먼드가 외쳤다.

“이번에도 위태로웠던 게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는 마력 탈진 상태에서 억지로 마법을 쓰다가 역류할 뻔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고 데이지님은 부상의 빈도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성자님, 성자님도 멀쩡하지는 않잖습니까!”

“···솔직히 조금 버겁기는 합니다. 허나, 신께서 내려주신 고행이시니 믿음으로 헤쳐나간다면···.”

“믿음 찾다가 다 죽게 생겼으니 문제 아닙니까.”

“나는 괜찮은데. 큰 부상은 아직 없고···.”

“아직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데이지님도 이대로 가다간 큰 부상을 입을 거라는 걸 아시기 때문이잖습니까.”

“······.”

데이지가 입을 다물고 율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지나친 강행군이긴 했다. 지난 한 달동안 무려 백에 가까운 크고 작은 전투를 겪었고 수십만에 달하는 마물들을 토벌했다.

단, 네 명으로 이루어낸 성과. 율리아의 지분이 무척이나 크긴 하지만 그게 다른 일행들이 아무런 활약도 하지 않았거나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이제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직, 아직 부족해요. 겨우 이 정도로는 광룡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어요.”

율리아가 피 묻은 검을 닦으며 담담히 중얼거렸다.

“이건 미친 짓입니다. 이러다 저희 다 죽어요! 전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습니다! 아직 결혼도 못했다고요!”

“그럼 그냥 둘이서 하면 되겠네요.”

“예?”

“응?”

기사와 마법사가 서로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하고 하고 싶다는 건 아닙니다.”

“두 분이서 호흡 좋았잖아요.”

“호흡이 좋았다고 해서 연인이 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호흡만 좋은 게 아니니까요. 서로한테 눈웃음 짓고, 손도 잡고, 부끄러워하고 그러는 거 다 봤거든요. 정든 것 아니었어요?”

“저기 용사님? 아무래도 용사님도 상태가 좀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전 멀쩡해요. 얼마 전에 마물로···.”

“잠깐만, 용사님!”

성자가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신성한 빛이 율리아를 감쌌다.

“···아.”

썩은 생선 눈알 같던 동공에 생기가 돌아왔다.

“···죄송해요. 조금 피곤해서 말이 헛 나왔네요.”

“아니야,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용사님.”

“그래도 방금 말한 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며칠 전에 에드먼드님이 마물의···.”

“그것보다! 아무래도 이대로 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싶은데.”

“맞습니다! 이대로는 절대 안 됩니다. 후퇴했다가 재정비를 하던 해야 합니다. 무조건.”

“저도 이번에는 이 두 분과 의견이 같습니다. 신께서 이끄시는 고행 또한 좋지만 자칫 용사님이 여기서 스러지시면 이 대륙에는 미래가 없어집니다.”

“음.”

율리아가 천천히 일행들을 살폈다.

초췌한 안색, 피곤한 눈, 자잘한 상처투성이의 육신과 찢어지고 손상된 장비들.

그녀의 무리한 강행군을 따라오려다 입은 피해들이었다. 이미 그들은 한계에 다다랐다. 여기서 그녀가 억지를 부린다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 터.

‘나 때문에 이분들이 피해를 입게 할 수는 없어.’

알베니우스님도, 어머니 나무님께서도 그랬다.

이길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보내는 거라고.

그럼에도 불안한 건 한 번의 패배가 너무 압도적이었던 탓이다. 그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달라졌다는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 그냥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거다.

“네. 그게 좋겠네요. 감사해요, 제 억지에 따라줘서. 그리고 죄송해요. 바보 같은 짓을 해서.”

“아니, 괜찮아. 좋은 뜻이었잖아?”

“···이제라도 말이 통하시니 다행입니다. 후우.”

“용사님의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신께서도 기꺼워하실 것입니다.”

결정이 내려지자 일행은 빠르게 오염된 대지를 벗어날 준비를 했다. 모든 게 아공간에 들어있어 딱히 챙길 짐은 없었다.

“조금만 휴식을 취하고 가는 걸로 하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는 운기를 통해 소모한 마력을 보충한다. 오염된 대지에는 마나가 희박하기 때문에 챙겨온 영약들의 도움을 받는다.

기사는 칼날에 묻은 피를 닦은 후, 눈을 감고 육체의 긴장상태를 풀어준다.

성자는 신께 기도하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보다 풍부한 신성력을 받는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고 일행은 마침내 밖으로 나간다.

“남쪽으로 일직선으로 내려가는 게 가장 빠릅니다. 조금 돌아가면 마물들을 만나는 빈도가 줄어들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도를 펼친 마법사가 루트를 짜고, 일행은 출발했다. 하려고 했다.

“너희들이구나.”

무겁고 섬뜩한, 소름끼치게 더럽고, 역겹고 혐오감이 피어나는 그런 목소리였다.

기사가 검을 뽑았다.

마법사가 방어 마법진을 활성화 시켰다.

성자가 신성력을 뿜어냈다.

그리고 용사는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내 영역에서, 내 가디언들을 죽이고 다니는 벌레 새끼들이.”

그림자가 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

거대한 동체가 지상과 충돌했다.

굉음과 함께 지진이 난 것처럼 대지가 흔들렸다.

일행들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으나 균형을 잡으며 다시 착지했다.

크르르르-

진한 악취가 흐른다. 괴물의 울음소리가 몸의 긴장을 깨운다.

태산과 같은 거구.

빛마저도 흡수해버리는 짙고 어두운 비늘.

모든 것을 압도하는 특유의 위압감과 그 사이에서 사납게 일렁이는 황금빛 동공.

한 때는 용, 드래곤, 괴물 수많은 이름으로 불렸으나 이제는 그냥 ‘광룡’이라고만 불리는 존재.

어둠의 힘을 받아 미쳐버린, 인류와 대륙을 멸망시키기 위해 강림한 악룡, 데이드람의 적.

광룡, 발바르였다.

“웬 벌레들이 영역에서 설치고 있다고 해서 억지로 깨어났더니. 과연, 네년이었구나.”

일행을 훑던 눈이 한 곳에 멈춘다. 천천히 검을 뽑는 율리아와 마주친다.

“신의 개. 귀가 빠지도록 도망치는 것을 쫒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주었더니. 살았으면 감사하고 찌그러질 것이지. 아직도 주제 파악이 덜 됐나?”

“딱히 당신이 자비를 베풀어주어서 살아난 건 아니에요. 그리고 그때와는 많이 다를 거예요.”

“조금 달라지긴 했군. 나무에게 도와달라고 울면서 빌기라도 했던 모양이지?”

광룡의 입가기 비틀려 올라갔다.

“허나, 그래봤자다.”

광룡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간 크게 고작 넷이라. 차라리 잘 됐군. 네놈들을 모두 죽이면 더 이상 귀찮게 할 것들이 없겠지.”

주제도 모르는 버러지들. 용사라는 게 고작 그 인원으로 내 아가리 속으로 들어오다니.

마나가 모였다.

“죽어라.”

“피해!”

“도망쳐야 합니다!”

“신이시여!”

──────!

독기로 가득한 광룡의 숨결이 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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