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126화 (126/150)

#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용(3) >

“······.”

“······.”

- ······.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지금의 상황을, 율리아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야 당연하다. 알베니우스는 엘븐에서 만나자고 했고 자연스레 만날 것이라 했다.

그게 이루어졌다. 예언이라기보다는 종말의 정세와 인간들의 반목을 알고 한 예측에 가깝다.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예측보다는 엘븐이 의도했다는 게 옳았기에. 엘프들이, 세계수가 종말을 앞두고 인간들을 반목시키고 의도적으로 불화의 씨앗을 심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 목적이 그녀를 품에 넣기 위해서라면 더욱 더.

- 불만이 많은 표정이구나.

- 이해한단다. 알베니우스의 방법이 어린 하이엘프에게는 조금 많이 과격하긴 했지.

“잠깐만, 세계수. 너도 동의해놓고 이제 와서 내 탓을 한다고?”

- 나는 하이엘프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

참새가 장난스래 웃는다. 알베니우스가 헛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그건 서로 싸운다기보다는 그저 다정해보일 뿐이다.

“처음뵙는 어머니 나무님. 한 가지만 여쭈어 봐도 될까요?”

- 그래. 내게 궁금한 게 참 많을 거야. 무엇을 알고 싶니?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나요?”

연합이 율리아를 엘븐으로 보내기까지 엄청난 피해가 있었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엘프들이 나섰다면 그 피해는 확실하게 줄일 수 있었다. 알베니우스가 나섰다면 반드시 마왕을 처치할 수도 있었다.

- 그래야만 했단다.

“어째서죠? 저를 통해 주도권을 잡는 게 인간들의 목숨보다 중요했나요?”

- 마음이 고운 아이구나.

- 하지만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긍정이란다.

“···그게 무슨!”

세계수는 자애롭다. 엘프들과 어울리고 살아 주로 엘프들에게 적용되긴 하지만 사실 세계수의 자애는 종족을 가리지 않는다.

세계수란 그런 존재다. 그녀가 살던 아르반의 세계수 또한 그랬다.

인간들과 엘프들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세계수는 엘프들을 연합에 합류시켰다.

더 많은 피해를 줄이고 종말을 막고자 하는 대의를 위해서.

종말의 군세가 숲까지 당도했을 때, 세계수는 모든 피난민들을 수용하고 그들을 보호했다.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계수란 그런 존재다. 적어도 그녀가 보고 느낀 건 그랬다.

그런데 데이드람의 세계수는 어째서···. 세계수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흔들렸다.

- 그게 옳으니까.

“인간들을 희생시켜서 엘프들이 주도권을 잡는 게 옳다는 건가요?”

“여기서부터는 내가 설명하지.”

탁, 알베니우스가 줄기 위에서 내려왔다.

“율리아 카르센. 이게 뭔지 아나?”

알베니우스가 목걸이 하나를 흔들었다. 끝에 장식이 달린 팬던트였다.

“그걸 왜 저한···?”

율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기시감이라고 해야 되나, 이상하게 팬던트가 낯이 익었다. 그럴 리가 없지만 묘하게 정감이 갔다.

‘율리아.’

아련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수가 없다.

세이드가 실종된 게 벌써 수십년이다. 아무런 말도 없이 불쑥 사라져 죽었다고 생각한지 오래였다. 살아 있다면 그녀에게 아무 말 없이 떠날 이가 아니었으니까.

‘설마 용사?’

하지만 용사가 된 이후, 어쩌면 용사가 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이드는 강자였고 충분히 신의 눈에 들어 용사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설마 이곳에서 세이드의 흔적과 마주할 줄은 몰랐다.

카발론의 황도에서 그녀가 첫 번째로 소환된 용사라고 했던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용사는 한 차원에 한 명이야.’

아르반 또한 그랬다.

‘그냥 비슷해 보이는 팬던트일 거야.’

그게 맞을 거다. 여기에 세이드가 있었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이건 세이드 델름의 팬던트다.”

“······!”

하지만 알베니우스의 다음 말은 그녀의 가정을 무참히 깨부셨다.

“···그게 세이드의 것이라고요?”

우연히 닮은 팬던트를 가지고 있을 수는 있어도 본래 주인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

딸각-

알베니우스가 팬던트를 조작하자 앞면이 열렸다. 그리고 사진이 드러났다. 환하게 웃음짓고 있는, 어린 시절의 율리아였다.

“내가 율리아라는 하이엘프를 안다고 했었지? 나이를 조금 먹어서 긴가민가 했다만, 딱 이 아이가 성장하면 너가 되겠더군.”

“어떻게···. 어떻게 그걸 당신이 들고 있는 거죠? 설마···?”

“살기 집어넣어라. 세이드를 죽이고 취한 건 아니니까.”

“그렇다면 세이드는 어디 있죠?”

“···만날 수 없는 곳에 있다.”

알베니우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무슨···!”

···그건 죽었다는 거잖아?

“정확하게 말씀해주세요! 대체 어떻게 됐다는 거죠?”

알베니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저을 뿐.

“···아.”

정말로 죽었구나.

단순히 죽었을 수도 있다고 짐작하는 것과 죽었다는 확답을 듣는 건 또 달랐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율리아가 쓰러졌다.

* * *

- 안 죽었다고 하지 않았어?

“죽지 않았어. 차원에 갇혀 있긴 하지만 멀쩡히 잘 살아 있지.”

- 그런데 왜 그렇게?

“세이드가 그랬거든. 혹시 만나게 되면 자기가 이런 상황인 걸 알려주지 말라고. 걱정할 거라고.”

- 걱정을 하지 말라고 아예 죽었다고 하는 건 더 문제 아니야?

“죽었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얘 혼자서 착각하고 쓰러진 거지.”

- 뭐, 이런···.

참새가 이마를 짚었다.

- 알베니우스, 당신도 참 희한한 드래곤이야.

“신들에게 오랫동안 쫓기다 보면 다 이렇게 돼.”

- 그건 너무 비약이 아닐까?

알베니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대화의 주제를 돌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마왕이라고 불리는 놈, 꽤나 강해. 김우진이 처치한 사룡만큼은 아니지만 이대로 있으면 율리아는 반드시 죽어.”

지금의 율리아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그녀가 죽으면 신들은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차원을 포기하거나, 글라크처럼 또 다른 용사를 소환하거나.

“둘 다 내게는 좋지 않아.”

차원을 포기하면 멸망한다. 그렇다고 용사를 계속 소환하다보면 그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원치 않았고 베스트는 율리아 선에서 종말을 끝내는 거다.

알베니우스가 율리아에게 손을 내민 것은 그래서였다.

그는 함부로 나설 수 없었고 데이드람의 세계수 덕분에 얻은 비교적 안전한 은신처가 멸망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하이엘프 용사가 등장했으니 최고의 상황이었다.

“하이엘프인게 다행이지. 하이엘프들은 네 말을 잘 듣잖아?”

엘프들과 세계수의 관계를 알기 때문에 비밀 엄수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더불어 하이엘프이기에 가능성을 보았다.

- 어떻게 하려고?

- 열매를 준다고 해도 그 김우진이라는 용사처럼은 못할 텐데?

“김우진 때와는 사정이 조금 달라.”

당시 김우진은 정령왕의 핵을 취한 상태였다. 정령왕은 반신의 존재였고 풍부한 신의 힘을 가지고 있어 그것을 일깨워주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하이엘프 율리아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 하이엘프가 특별한 종족이긴 하지만 태생부터 우주의 힘을 타고난 차원룡 같은 존재는 아니었고, 정령왕을 먹은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세계수의 열매라면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세계수 또한 반신의 존재. 그 열매에는 미약하게나마 신의 힘이 깃들어 있다.

“천 년 열매는 몇 년이나 남았다고 했지?”

- 아직 오 년은 더 있어야 해.

본래 세계수는 백 년에 한 번 열매를 맺지만 만년을 살아온 세계수는 그 주기가 천년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열매가 품은 힘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쉽네. 5년이면 인류가 멸망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라는 게.”

그 열매였다면 보다 확실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다만, 일반적인 세계수의 열매도 귀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 힘을 일깨워준다면 율리아는 충분히 마왕을 이길 수 있다.

세계수와의 궁합이 그 어떤 자들보다 좋은 하이엘프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데이드람의 마왕이 강하다 한들 글라크의 사룡에 비하면 떨어지기 때문이다.

“열매 줘봐.”

- 지금 바로 하게?

“어떤 저항도 없는 편이 좋아. 기절해 있을 때, 열매를 흡수시키고 네가 품어서 최대한 육체에 안착하게 하는 게 낫지.”

- 일어나면 깜짝 놀라겠네. 근데 세이드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로 그렇게 끝낼 거야?

“···난 세이드의 마지막 전언을 지키려고 하는 거야.”

- 그냥 다른 좋은 변명이 안 떠오르는 거지?

“······.”

알베니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 * *

“으음.”

율리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코앞에는 참새 한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세계수의 정령이다.

‘내가 왜···?’

주변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어머니 나무의 내부?”

- 그렇단다.

참새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 몸 상태는 어떻니?

“···좋아요. 살면서 지금보다 좋은 적이 없을 정도로.”

몸이 가볍다. 감각이 곤두서고 마력이 넘쳐난다. 한 단계 진화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 열매를 먹였단다. 알베니우스가 네가 잘 흡수하도록 도와줬고.

“···알베니우스.”

뒤늦게 자신이 왜 기절했었는지 깨달은 율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알베니우스님을 뵙고 싶어요.”

- 얼마든지.

가지들이 움직여 그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세계수의 그늘에 기대 차를 마시고 있던 알베니우스가 그녀를 반겼다.

“일어났군. 와서 앉아.”

“···그건 뭔가요? 처음 보는 차인데.”

“커피. 마실래?”

“네.”

꽤 쓴 차였다. 율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쓰면 설탕이나 물을 타서 먹어도 돼.”

“아뇨, 괜찮아요.”

“묻고 싶은 게 많지?”

“네.”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거라면 다 대답해주지.”

“한 차원의 용사는 한 명 뿐이라고 들었어요. 어떻게 세이드를 만난 거죠?”

“한 차원의 용사는 한 명 뿐이라. 일단 그것부터 어폐가 있어. 그렇다고 데이드람의 용사가 너 말고 더 있다는 건 아니지만. 모든 용사가 다르듯, 모든 차원의 사정도 달라.”

“용사가 여럿일 수도 있다는 건가요?”

“그래. 실제로 그런 차원이 있었지. 그리고 세이드는 거기에서 만났다.”

“···다른 차원에서 세이드를 만났다고요?”

“글라크라는 차원이야. 사룡에 의해 대륙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갔던 곳이지.”

그나저나 사룡과 광룡이라. 그때랑 참 엇비슷해.

“세이드는 용사로 소환되었고 그곳에서 마지막까지 싸웠다.”

“······.”

율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세이드가 어떤 용사의 삶을 살았는지, 팬던트를 어떻게 건네 받았는지. 알베니우스의 정체, 그리고 알베니우스가 그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난 네가 종말을 막길 원해. 세계수가 뽑히길 원치 않거든.”

“저도 마찬가지에요. 하지만 도무지 이길 자신이 없어요.”

“지금까지는 그랬겠지. 하지만 이제는 괜찮아. 말했잖아? 희망전도사라고. 난 이미 너 같이 가망 없는 놈 하나를 가망 있게 키운 전력이 있거든. 그리고 놈은 가능성이 0에 가깝던 글라크의 종말을 막아냈지.”

알베니우스가 가슴을 폈다.

“배우기만 하면···잠깐만요. 글라크?”

“그래, 세이드가 있던 차원이다. 놈은 세이드의 동료였다.”

“······!”

“그분은 살아계신가요?”

“멀쩡히 살아 있더군.”

“끝이 이상한데요?”

“못 만난지 꽤 됐거든.”

“그럼 그분은 세이드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지.”

“만나게 해주세요!”

“종말이 우선이다.”

율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알베니우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배우기만 하면 가능은 한 건가요?”

“당연히 아니지. 너도 느끼고 있을 텐데? 네가 잠든 사이 네게 세계수의 열매를 먹였다.”

“···역시. 세계수의 열매였군요.”

“세계수의 열매에는 미약하게나마 우주의 힘, 그러니까 네가 용사의 힘이라 불리는 것이 들어 있다. 나는 네가 보다 원활하게 그것을 채득하고 사용할 수 있게 도와줄 거다.”

나만 믿어라.

“너는 반드시 종말을 막게 될 테니.”

“···그런데 왜 직접 나서시지는 않는 거죠?”

“···그럴 상황이 아니니까.”

“쫓기기라도 하시는 건가요? 하지만 알베니우스님 같은 강자를 누가 쫓을 수 있다는 거죠?”

“···이 대화도 기시감이 들어.”

전반적인 흐름 자체가 상당히 엇비슷했다. 마주치자마자 검부터 휘둘렀던 매운맛이냐, 그나마 대화로 진행시키는 순한맛이냐의 차이일 뿐.

대답하기도 귀찮았다.

이럴 때, 김우진이 뭐라고 했더라.

그래.

“난 나보다 약한 녀석의 말은 듣지 않는다.”

“···네?”

“대답을 듣고 싶다면 광룡을 처치한 후에 다시 물어라. 왜 나서지 못하는지도, 세이드의 동료에 대해서도 알려줄 테니.”

분명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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