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용(2) >
“···알베니우스? 희망전도사?”
“아니면 일타 강사? 족집게처럼 네게 필요한 부분들을 콕콕 찝어주마.”
“그러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
“너 광룡한테 졌다며? 그것도 상처 하나 못 입히고 압도적으로.”
“···하나도 못 입히지는 않았어요!”
“그럼 생채기 정도?”
“당신은 누군데 저를 모욕하는 거죠?”
“말했잖아. 알베니우스라고.”
“정체를 묻는 거예요. 전 당신 같은 자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어요.”
“당연하지. 내가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저보다 강해 보이는데 왜 나서지 않았죠? 그랬으면 광룡한테···.”
패배하지 않았을 텐데.
율리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
“한 번 들어본 듯 한 익숙한 말이야. 그랬으면 광룡을 잡았을 거라고?”
“···네. 대체 왜 방관하신 거죠?”
“그럼 반대로 묻지. 내가 왜 나서야 하지?”
“종말을 막아야하니까요. 그게 당연하잖아요.”
“내가 왜 종말을 막아야 하지?”
“저랑 지금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요?”
“내가? 너랑?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
알베니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세상이 망하면 당신도 터전이 사라져요. 그 이유만으로는 부족한가요?”
“미안하지만 난 이 차원의 존재가 아니라 해당 사항이 없어.”
“···뭐라고요?”
율리아가 눈을 껌뻑였다.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대화가 아니었다.
이 차원의 존재가 아니라고? 그럼 용사? 하지만 용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신? 아니, 저런 신이 존재할 리가. 애초에 신이 나설 수 있다면 굳이 용사들을 이용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이곳이 종말을 맞이하지 않길 바라기는 해. 친구가 있으니까. 그래서 널 찾아온 거기도 하고.”
“···무슨 뜻이죠?”
“하이엘프 용사, 난 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러 왔다.”
“제 이름은 율리아 카르센이에요.”
“그래, 율리아 카르센, 잠깐만, 율리아? 이름이 얼굴보다 더 낯이 익은데.”
“절 아시나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뭐죠? 그런 애매한 대답은?”
“밑밥을 깔아두는 거지. 이 세상에 무조건이란 건 없거든.”
율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가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심각한 그녀와 달리 진지하지 않아 보였다.
종말이라는 엄청난 일을 앞두고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유일한 희망이라며 치켜 받는 용사인 자신이 광룡에게 참패를 당했는데.
‘용사 따위는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는 걸지도.’
일단 그녀보다 강한 건 확실하다. 대화를 나누고 있음에도 도저히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그 증거다.
상대가 입을 다물고 그녀가 눈을 감으면 아예 존재감 자체가 없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너에게 제안을, 희망을 주러왔어.”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광룡과 싸울 마음이 생기셨다는 건가요?”
“아쉽게도 난 싸울 수 없어. 직접적으로 내가 드러나면 안 되거든. 이 대화도 기시감이 있단 말이지.”
알베니우스가 턱을 긁적였다.
“그게 무슨 뜻이죠?”
“자세하게 말해줄 수는 없어. 당장은. 하지만 너를 가르쳐 줄 수는 있지.”
“···저를 가르친다고요?”
“광룡을 잡을 수 있도록. 그 조건은 이후에 내게 협력하는 것. 어때?”
“···당신에게 배우면 광룡을 이길 수는 있고요?”
“장담하지. 넌 영웅이 될 거야. 광룡의 목을 벤 영웅.”
“······.”
고민은 길지 않았다. 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지, 왜 돕는지 모른다. 하지만 광룡에게 압도적인 패배를 당한 그녀다.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서광이 보인다면 그것을 따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설사 그 끝의 요구 조건이 파멸이라고 한들, 따라가지 않으면 지금 당장 파멸하니까.
“···좋아요.”
“꽤나 결연한데. 너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거야. 아니, 오히려 네가 내가 생각한 율리아가 맞다면 오히려 환영하겠지.”
“당신이 아는 율리아가 대체 누군데요?”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받아들인 걸로 알고 이만 가보지.”
“간다고요? 절 가르쳐 준다면서요?”
“지금 여기서는 아니야. 걱정 마.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그냥 흘러가는 흐름을 거부하지 말고 따라와.
“엘븐에서 보자.”
“···엘븐?”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다. 거기가 대체 어딘 줄 알고 보자는 거지?
“어딘지는 알려주셔야죠!”
“너도 느끼고 있잖아? 존재한다는 걸.”
알베니우스가 사라졌다.
* * *
“엘븐에서 사신을 보냈소.”
연합군의 첫 원정은 실패했고 용사 또한 패배했으나,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연합은 제국의 황도에 모여 앞으로의 대책 회의를 시작했다.
무너진 왕국의 난민들의 처우, 마물들의 동태, 2차 연합군 결성 등 여러 가지 안건이 논의 되었지만 가장 큰 떡밥은 이것이었다.
“다들 한 번 읽어보시오.”
엘븐의 서신이 차례 차례 돌아갔다.
“···이런 건방진 놈들이!”
“우리를 감히 무엇으로 보고···!”
“노골적이군요.”
“연합을 결성하자고 그렇게 대화를 요청해도 묵묵부답이더니 이러려고 그랬던 건가?”
전권을 쥐고 제도에 온 각국의 대표들은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서신이 율리아에게까지 당도했을 때, 율리아는 어째서 이들이 화를 내는지 이해했다.
“용사님을 보내야지만 협력하겠다니. 용사님이 무슨 물건도 아니고 너무 오만방자한 것 아닙니까!”
“아무리 엘븐이 강대하다 한들, 우리가 없이 종말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흔한 정치 싸움이었다.
‘엘븐?’
하지만 율리아의 눈에는 그 내용보다 엘븐이라는 이름이 더 들어왔다.
알베니우스라는 자가 말했던 곳이 분명 엘븐이었다.
“엘븐이 어디죠?”
“크흠, 그게···.”
“엘프들의 왕국입니다. 용사님.”
마르덴 왕국의 대표, 돌베스 후작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율리아가 하이엘프인지라 엘븐을 함부로 이야기할 수가 없던 탓이다.
“데이드람에도 엘프들의 왕국이 있었군요? 그들은 왜 처음부터 합류하지 않았죠?”
“연합을 창설할 때, 함께 하고자 사실을 여러 번 보냈습니다만, 끝까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랬군요.”
사실 엘프들이 있다는 것쯤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이엘프였고 데이드람에 소환되자마자 이 땅에 세계수가 뿌리를 내렸음을 본능적으로 느꼈으니까.
어째서 엘프들이 합류하지 않았는지 의문이었으나 대충 예상해 넘겼다. 그녀가 있던 차원에서도 엘프와 인간은 잘 섞이지 못했다.
충돌이 있었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힘을 합쳤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여겨 괜히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자 했다.
알베니우스라는 자의 전언이 아니었다면.
‘흘러가는 대로?’
이 서신에 적힌 대로 진행된다는 건가? 그녀를 엘븐으로 보내라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자가 허언을 할 리는 없을 테고.
“왜 묵묵부답이었을지 궁금하네요. 종말을 막는데 인간과 엘프가 따로이지는 않을 텐데.”
“맞습니다.”
어쨌든 흘러가는대로 따라오라 했으니 굳이 그녀가 나설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엘븐의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입니다. 광룡의 힘이 생각보다 강한 바, 이대로는 가능성이 낮지 않습니까?”
‘이름이···.’
아르칸 왕국의 1왕자, 볼프 아르칸이었다.
“서신에는 용사님이 하이엘프인 이상, 엘븐에 방법이 있다고 써 있습니다. 이걸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용사님을···음, 그런 걸 수도 있지 않소?”
귀족 하나가 율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삼켰다. 허나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물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만, 저들에게는 세계수가 있습니다. 세계수와 하이엘프의 관계를 아시지 않습니까? 또한 엘프들이 이런 상황에서 의미없는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아무 진실일 겁니다.”
[용사님을 엘븐으로 보내신다면 보다 원활히 광룡을 막을 방법이 있습니다.]
서신에 적힌 내용 중 일부였다. 율리아가 광룡에게 패배한 상황이기에 연합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율리아를 보낸다는 건 용사에 대한 통제권을 넘긴다는 거다. 율리아를 가지고 있는 자가 율리아가 자리에 있기에 대놓고 말하지 못할 뿐.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종말을 막는데 종족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감사합니다.”
“엘븐의 엘프들이 용사님의 마음을 조금 배워야 하는데···.”
회의는 더욱 길어졌다.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자기들이 제일 안전하다고 버티는 것 아닙니까! 치졸한 놈들!”
“치졸하지만 영리하긴 합니다. 타이밍도 절묘해요.”
“아무리 그래도 기다렸다는 듯이 이러는 건 너무 수상하오!”
엘븐은 대륙 남부 끝자락의 숲에 위치해 있었다. 종말이 북방에서부터 시작했기에 위치상 거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조금 치졸하긴 하네.’
같은 엘프였지만 조금 그랬다.
‘엘프들의 생각인가?’
솔직히 모르겠다. 아르반의 엘프들은 순수하고 정치에 능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알베니우스라는 그 자의 수작일지도 모른다.
‘쉽게 보내줄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정말 알베니우스의 말처럼 되는 걸까?
“하지만 엘프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용사님께는 죄송하지만 우리는 패배했소. 지금의 상황으로는 답이 없단 말이오!”
하지만 의외로 엘븐의 요구를 들어주자는 쪽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대부분 제국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이는 왕국들이었다.
‘제국이 주도권을 쥘 바에는 엘프들이 낫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런 상황에서까지···. 자기 종족의,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건 모두가 같다. 다만, 종말을 앞둔 상황에서까지 이런다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긴 회의의 끝은 결국 ‘엘븐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 협상을 해야 한다.’였다.
연합의 사신들이 엘븐으로 향했다.
하지만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북부 왕국들을 멸망시키고 잠잠하던 마물들이 일제히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 수가 연합군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연합군이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마물들은 생명체의 생명력과 피를 먹습니다.”
“우리가 연합군을 보낸 덕분에 그 시체를 먹고 무럭 무럭 수를 불려나갔다는 거요?”
연합 실패의 대가가 생각 이상으로 컸다. 인류는 마물의 남하를 막는데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는 최전선에서 검을 휘둘렀다.
“용사님이 오셨다!”
“용사님 만세!”
이름 모를, 흉측한, 기괴한, 역겨운 마물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날이 갈수록 그녀의 검은 날카로워졌다. 권능은 더욱 익숙해지고 마물을 사냥함으로서 용사의 힘이 성장했다.
단순한 광풍에 그치던 바람은 폭풍이 되었고 바람과 어우러진 검술을 새롭게 개량해냈다.
희망이 생겼다. 이렇게 막고 막고 또 막다보면 언젠가 광룡을 이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 또한 생겼다.
하지만 시간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크아아악!”
“성벽이 무너졌다! 모두 내성으로 후퇴해라!”
마물의 공세는 날이 갈수록 드세졌고 인류는 끊임없이 밀려났다. 왕국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용사님. 죄송하지만 엘븐으로 가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리고 연합은 결국 할 수밖에 없는 선택을 했다.
* * *
“여기가 엘븐···.”
율리아는 제국의 극진한 호위와 함께 엘븐에 발을 들였다.
우거진 숲, 넘치는 정기, 더욱 진한 어머니 나무의 기운.
더 없이 정겨웠다. 멸망을 맞이하기 전 그녀가 살던 숲처럼 아름답고 푸근했다.
“어서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율리아 카르센 용사님. 저는 어머니 나무를 모시고 있는 필립스라고 합니다.”
필립스는 엘븐의 유일한 하이엘프이자 실질적인 엘븐의 지도자였다.
인간들은 흔히 왕국이라 부르지만 엘븐의 체계는 왕국과는 달랐고 엘프들은 그를 대족장이라 불렀다.
“어머니 나무께서 당신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모시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필립스는 율리아를 세계수로 이끌었다.
“꼭 그래야만 했나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엘프들이 도왔다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을 거예요.”
엘븐에 와서 느꼈다. 이곳의 세계수는 아르반의 세계수 이상으로 거대하고 정기가 넘쳤다. 자연스레 엘프들의 수준 또한 높았다.
“저는 그저 어머니 나무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어머니 나무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는 건가요?”
“궁금하신 부분들은 직접 설명해주실 겁니다.”
율리아는 곧 세계수 앞에 당도했다.
“···보호막?”
세계수를 보호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내부로 발을 들이는 순간 율리아는 깨달았다.
세계수가 아닌 엘프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농후한 정기는 어린 엘프들에게는 너무 과해 오히려 독일 될 수준이었으니까.
- 반갑구나. 다른 차원의 하이엘프야.
어머니 나무의 정령, 작은 참새 하나가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내가 또 만나게 될 거라고 했지?”
그리고 그 참새가 앉은 손가락의 주인이 세계수의 가지 위에 걸터앉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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