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외전. 하이엘프와 차원용(1) >
용사가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적어도 율리아 카르센에게는 기꺼운 일이었다.
오래 전, 그녀의 차원에도 종말이 찾아왔다. 많은 것을 앗아갔고 그 중에는 그녀의 부모도 있었다.
용사와 영웅들의 분투로 종말은 끝이 났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은, 죽어버린 동족들을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율리아는 강해져야만 했다.
남은 마물들을 처치하며 조금이라도 분노를 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세이드.”
잃어버린 부모님들을 대신해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해주던 호위 또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기에 더욱 그랬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더욱 마물들에게 집착했다.
“···용사가 되겠어요.”
그런 상황에서 번개를 맞았다.
그것이 신의 부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율리아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더 많은 마물들을 죽일 수 있다.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
그거면 충분했다. 어차피 아르반에 그녀가 기댈 공간은 없었다.
하이엘프, 율리아 카르센은 그렇게 용사가 되어 데이드람에 소환되었다.
* * *
“하이엘프 용사라니!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신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으니! 데이드람은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몇 번이나 뒤집히는 느낌 끝에 도착한 율리아가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황족과 귀족들,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는 기사와 병사들로 보이는 인간들이었다.
신의 신탁을 받아 용사가 올 것이라 예견된 땅에 미리 마중을 나왔다.
“어···. 안녕하세요?”
격렬한 환대에 율리아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용사님. 데이드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카발론 제국의 1황자, 노이드 카발론입니다.”
“율리아 카르센이에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국의 황도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음.”
율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용사는 처음이었고 솔직히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랐다.
‘아르반을 구한 용사는 어떻게 했더라···?’
인간들이 마중을 나왔고 그들이 데려가 성심성의껏 가르쳤다고 들었다. 아르반의 용사는 재능은 넘치나 그 바탕은 되어 있지 않은 평범한 용사였다.
때문에 성장하는데 제법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고 대륙의 피해는 제법 컸었지.
딱히 용사를 탓하는 건 아니다. 그가 최선을 다한 영웅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고 감사하고 있으니까.
그냥 조금 아쉬울 뿐이다. 처음부터 강했던 용사가 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그리고 다행스럽게 그녀는 스스로가 선망하던 용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부탁드려요.”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용사님을 모셔라!”
“예!”
율리아는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황도로 향했다.
‘너무 부담스러운데.’
그 정도가 심해 율리아에게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아르반도 이랬다고 들었다.
이해는 갔다. 상식적으로 신의 신탁을 받고 종말을 막기 위해 내려온 용사를 허투루 대접하겠다는 멍청한 인간은 없을 테니까.
용사는 단순한 강자가 아니라 신의 힘을 받은 사도이자 희망이다. 용사가 없으면 종말을 막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만큼 인류는 언제나 용사를 신줏단지 모시듯이 모신다.
“오오, 용사여. 만나서 반갑네. 짐은 제국의 황제, 발로인 카발론이네.”
“율리아 카르센이에요.”
제국의 황제는 50쯤으로 보이는 중년이었다. 딱히 수준급의 기사나 마법사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배자로서의 위엄이 느껴졌다.
“피곤할 텐데 오늘은 쉬고 내일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떤가?”
“배려에 감사드려요.”
율리아는 황궁의 별궁으로 안내되었다. 더 없이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곳이었다.
“언제든지 필요한 게 있으시면 바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녀를 안내해준 기사와 시종이 사라졌다. 하지만 율리아는 시종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부담스러운데.’
하지만 그것이 이곳의 법도라면 따르는 게 맞다. 율리아가 침대에 누웠다. 높고 화려한 천장이 보였다.
‘이제부터 여기서 살아야 해.’
단순히 사는 게 아니라 차원을 종말로부터 구해야한다.
‘잘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해야만 한다. 그것이 용사로서 그녀가 짊어져야 할 사명이니까.
보답이기도 하다. 그녀의 차원을 구해준 용사에 대한 보답. 그가 그랬듯이, 그녀도 이들을 구하는 거다.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
미약한 바람이 손끝을 타고 일렁였다.
“···어?”
그녀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어떻게 한 거지?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았다. 손을 펴고 바람을 상상했다.
휘이이이이-
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손 위에서. 작은 회오리가 용솟음쳤다.
“이게···.”
권능이구나.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본래 그녀에게 정령도 없이 바람을 다루는 능력 같은 건 없었으니까.
‘네 재능이 출중하니 능히 용사로서의 권능 또한 각성할 거다.’
‘권능이요?’
‘용사의 힘을 받아 잠재능력이 각성하는 것을 뜻한다. 그건 일반적인 마법이나 오러와는 한 차원 다른 힘이다.’
‘아하. 그럼 바로 가능한 건가요?’
‘재능이 없다면 아예 각성하지 못할 수도, 재능이 있다 해도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걱정 마라. 하이엘프가 권능을 각성하지 못한 적은 없으니. 시간의 문제다.’
그녀를 이곳으로 보낸 신이 했던 말이었다.
하이엘프는 종족 자체가 특별하다고 그랬나.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녀의 차원에서도 하이엘프는 몇 없었고 항상 우수했으며 모든 엘프들의 존중을 받았으니까.
바람 정령과의 친화력이 유독 높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다루게 될 수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빠른 건가, 느린 건가?’
시간이 걸린다고 했는데 그녀가 용사의 힘을 받고 데이드람에 온지는 고작 5시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그리고 늦던, 빠르던 당장은 중요치 않았다. 각성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래서 힘을 사용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앞섰으니까.
“저기요.”
“예, 뭐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물었다.
“여기 연무장을 이용할 수 있을까요?”
“용사님을 위해 마련된 개인 연무장이 있습니다. 안내해드릴까요?”
“네. 부탁드려요.”
연무장은 개인 연무장이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거대했다. 주변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시야를 막고 있었으나 뻥 뚫린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훈련이 끝나면 나오시면 됩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시종을 내보낸 율리아가 연무장의 중앙에 섰다. 검을 뽑기보다 천천히 손을 앞으로 뻗었다.
바람이 그녀의 손짓에 따라 움직였다. 딱히 마나를 움직이지도, 정령이나 마법을 이용하지도 않았다.
“신기하네···.”
스스로 행하고 있으면서도 현실감이 없다. 아무리 하이엘프라고 한들 정령이나 마법도 없이 바람을 이렇게까지 다룰 수 있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 그래서 권능이다.
“이거면 좀 더···.”
조금 더 익숙해지고 발전시켜야겠지만 종말을 막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게 용사가 된 첫날이 지나갔다.
* * *
“···제가 가르쳐드릴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법은···배우지 않으시고 권능을 더욱 발전시키시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제국은 용사를 위한 교육 매커니즘을 준비한 상태였다. 대륙 각지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들을 수배해 용사 전용 교사로 대기시켜 놓았다.
하지만 큰 의미가 없었다.
율리아의 검술은 대륙 제1기사이자 제국의 근위 기사단장을 뛰어 넘은지 오래였다.
마법에는 재능이 있으나 마법 보다는 권능을 익히는 게 더 효과적이었으며.
궁술을 비롯한 각종 무기술 또한 율리아가 한 걸음 위에 있었다.
완성형 용사, 그게 바로 율리아였다.
“···정말 완벽하군.”
“용사라면 당연히 그래야죠.”
“무척이나 든든하네.”
별 다른 준비가 필요 없음을 느낀 제국은 곧장 대륙 각지에 사신을 보내 왕족과 귀족들을 비롯한 귀빈들을 황궁으로 초청하고 연회를 열었다.
“차원을 구원해주기 위해 신께서 보내주신 용사님이십니다!”
율리아라는 용사를 세상에 확실하게 각인시키며 인류 연합을 발족시키기 위함이었다.
“종말을 막기 위해서 인류는 반드시 하나로 뭉쳐야 해요. 반목한다면 자멸을 향해 달려갈 뿐이에요.”
“물론 그건 용사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제국이 연합의 수장이 되는 건···.”
“우리 아르칸 왕국 또한 반대합니다. 제국의 폭거에 멸망한 왕국들이 몇 개 인지 아십니까? 저들이 수장이 된다면 자국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다른 나라의 병력을 사지로 밀어 넣을 겁니다!”
“아르칸 왕국이라고 뭐 다른지 아시오? 10년 전에 당신들에게 뒤통수를 맞고 멸망한 도리아 왕국을 벌써 잊었소이까!”
하지만 인간이 위기의 상황에서도 하나로 뭉치는 걸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각국이 쌓아온 업보와 이해관계들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신의 신탁, 종말이라는 거대한 위기 앞에 어쩔 수 없이 가장 세력이 강대한, 그리고 용사를 선점한 제국이 수장이 되기는 했지만 연합은 시작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저희는 광룡, 발바르를 죽여야 합니다.”
광룡, 발바르는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돌아버린 고룡이었다.
동족들을 죽이고 삼키며 힘을 기르더니 인간 세상에 강림했다.
광룡은 수십만의 마물들을 소환했고 주변 다섯 개의 왕국들이 일제히 무너졌다. 대륙 북부는 순식간에 죽음의 땅이 되었다.
“인류를 죽일수록 저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방어로 틀어 막기만 했습니다만, 용사님이 오신 이상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들에게 광룡과 마물이란 미지였다. 건곤일척의 승부를 펼칠 전력은 남아있었으나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완벽에 가까운 용사라는 칼이 도착했다. 조금 삐걱대긴 하나 연합이 결성되기까지 했으니 더 미룰 것도 없었다.
“반드시 광룡 발바르를 토벌하여 평화를 되찾겠어요.”
와아아아아!
용사님 만세!
인류 연합 만세!
카발론 제국 만세!
각국의 정예들만 모인 60만의 연합군이 북방으로 진격했다.
단단히 틀어막던 장벽들의 문을 열어 재끼고 위풍당당하게.
* * *
“···맙소사.”
“연합군이 지다니.”
“용사님이 어떻게···!”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소규모로 마주치는 마물들을 토벌하며 거칠게 없을 때까지만 해도.
하지만 문제는 광룡을 만나는 순간 일어났다.
광룡은 자신의 왕궁에서 수백만 마물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고 힘 대 힘의 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율리아는 기사단과 함께 광룡에게 향하는 혈로를 열었고 전투를 시작했다.
인류 연합의 목적은 율리아를 광룡에게 데려다 주는 것, 그리고 율리아가 광룡을 죽일 때까지 버티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물들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았다. 그리고 많았다.
“미, 미친···! 이걸 어떻게 막아!”
시체와 피는 마물에게 힘이 된다. 그래서 추리고 추린 60만 대군이었으나 숫적으로 너무도 불리했다.
마물들은 천천히 연합군을 갉아먹었고 용사만 믿고 있던 연합군은 점차 공포에 잡아먹히기 시작했다.
아니, 자국의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한 정치 싸움이 시작됐다.
“왜 기사단을 보내주지 않는 겁니까! 3군단이 무너졌습니다. 기사단이 지원을 오지 않으면 2군단마저 무너진단 말입니다!”
“마법 지원! 마법 지원을 보내주십시오!”
“방패 병단! 방패 병단은 어디 있느냐!”
“제니아 왕국이 병력을 뒤로 물린다!”
“도망치지 마, 이 개새끼들아!”
“전열을 유지해라! 대열이 무너지면 연합이 무너진다!”
“기사단을 왜 후방으로 빼는 겁니까! 당신들 병력만 사람이고 우리는 아닙니까?”
“이 미친 새끼들이! 아군이 있는데 마법 포격을 퍼부어!”
“마물을 죽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서로 간의 지원이 원활하지 않았고 자국의 병력을 살리기 위해 온갖 더러운 수를 쓰면서 오히려 연합의 피해가 커졌다.
그런 상황에서.
“용사님!”
율리아가 패배했다.
연합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60만 대군은 약 17만의 사상자를 냈다.
대패였다.
* * *
“······.”
율리아가 검을 휘둘렀다.
콰콰콰-
검의 움직임에 따라 바람이 춤을 춘다. 연무장에 설치된 마법진들이 요동친다.
검이 빨라진다. 바람이 거세진다.
더, 더, 더.
율리아가 갈망한다. 마력이 폭주한다.
───!
폭발하듯 터져 나온 광풍은 연무장 자체를 날려버린다.
“허억, 허억···!”
그럼에도 부족하다.
연합군은 패배했다.
광룡은 도망치는 연합군의 등을 물어뜯었고 그대로 남하해 왕국 두 개를 더 멸망시켰다.
뒤늦게 지원군이 합류하면서 왕국 두 개 수준에서 틀어막았지만 그뿐이었다.
인류는 막대한 전력을 잃었고 희망을 잃어버렸다.
“···강했어.”
용사 율리아가 광룡에게 패배했기 때문이다. 용사라는 희망이 꺾여버렸기에.
광룡은 강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싸워왔던 그 어떤 적보다 더.
그녀의 칼날은 광룡의 육체를 꿰뚫기에 충분히 날카롭지 않았다. 바람의 권능은 충분히 거세지 못했다.
꽤 긴 시간 싸웠지만 그녀가 광룡에게 준 건 작은 생채기가 고작이었다. 그 대가로 율리아는 마력 탈진과 한 팔이 부러져 간신히 후퇴했다.
“···어째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패배의 충격이 더 컸다.
콰콰콰-
더욱 큰 문제는 이렇게 검을 휘두르는 것 말고 또렷한 방법이 없다는 것.
검을 더 휘두른다고 광룡을 이길 수 있을까?
권능에 조금 더 능숙해진다고 이길 수 있을까?
확신이 없다.
용사가 되었음에도, 용사의 힘을 각성했음에도.
암울했지만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다. 답답함이 풀려나가지도 않는 무의미한 짓.
그때였다.
“너구나. 이번에 소환되었다는 용사가.”
거의 박살이 난 연무장의 담 위였다.
“과연 하이엘프야. 잠재력이 뛰어나.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분풀이를 해봤자 갑자기 광룡을 잡을 수는 없을 텐데.”
“···당신은 누구시죠? 못 보던 얼굴인데.”
피부가 곤두섰다. 아무리 한심한 스스로에 매몰되어 검을 휘둘렀다고 한들 상대가 지척에 당도할 때까지, 먼저 말을 걸때까지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다니.
강자다.
그녀가 마른 침을 삼켰다.
“황궁의 연무장에 그렇게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건가요?”
“내 맘이지. 근데 음? 얼굴이 조금 낯이 익은데.”
“누구신지 여쭤봤어요.”
“알베니우스.”
은발의 남자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게 희망을 선사해줄 희망 전도사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