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외전. 소장(진) 김우진(4) >
“명색이 신이라는 새끼들이 종이를 쓰네.”
권능 같은 거 없나?
크로시스가 떠나고 김우진은 그 자리에서 서류들을 정독했다.
“앞으로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란 말이지.”
칙칙하다. 몇 년만 있어도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아무래도 인테리어부터 싹 다 갈아엎어야겠어.”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아, 그리고.”
“예.”
“넌 오늘부터 부소장이야.”
“잘못 들었습니다?”
“더미가 오면 정령들을 집어넣어서 교도관으로 만들 거야. 네가 교도관들을 관리해.”
“제가 말입니까?”
“그러면 아무 것도 안 하려고 했어?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일을 해야지.”
“예···.”
지난 한 달 동안 같이 지내본 도플갱어는 굳이 자신의 종족을 밝혀 김우진의 화를 돋구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죄수들을 살펴야 하는데···.”
김우진이 죄수들의 인적사항이 적힌 서류를 펼쳤다.
“드세다고 했지.”
김우진을 조롱하기 위해 꺼낸 말이지만 틀린 말은 아닐 거다.
여기에 갇힌 이들은 모두 차원을 구한 용사들이자 영웅이다. 세상을 구했다는, 세계 최강이라는 자부심이 없을 리가 없다.
“데르카인? 이놈은 조금만 더 채우면 300년이네. 최장기수? 와, 진짜 독한 놈이네.”
“50년짜리 엘프도 있고···.”
“거인에, 다크엘프에, 인간에···. 진짜 별에 별 놈이 다 있네.”
그런 상황에서 하루아침에 죄수로 추락했으니 악과 깡이 남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이런 경우에는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분위기와 위압감 조성도. 그러니 혼자서 죄수를 만나러 가지는 않겠다.
어차피 그가 직접 공표하지 않는 이상, 죄수들은 소장이 바뀌었다는 사실은 모를 테니까.
“불쌍하긴 하군.”
열심히 차원의 종말을 막았는데 신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격이니까.
그렇다고 무작정 사정을 봐줄 수는 없다. 김우진에게도 김우진 나름의 사정이 있으니까.
“딱히 정해진 일과는 없고.”
크로시스 놈은 죄수들을 말 그대로 방치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죄수들이 자발적으로 나가게 만들겠다는 놈이 이런 꼴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지만 지금의 김우진 입장에서야 나쁘지 않았다.
“일단은 감옥 좀 돌아다니면서 시설들 좀 파악해 보자. 따라와.”
“예.”
사흘이 지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죄수들을 소장님께 인도할 호송대의 장, 펠런입니다.”
“집행자지?”
“예.”
“새로운 죄수가 들어온 건가?”
“아닙니다. 소장님께서 전 소장님께 부탁하신 것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호송관들이 아공간을 열어 거대한 짐 더미들을 꺼냈다.
“말씀하신 인체 더미 정확히 50개입니다.”
김우진이 더미들을 확인했다. 얕은 수는 안 부렸는지 전부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확인 하셨으면 여기 서명 부탁드립니다.”
“굳이?”
“신들께서 반드시 서명을 받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까탈스럽긴.”
서명을 받은 호송대장이 서류를 챙기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때는 새로운 죄수를 데리고 왔을 때가 되겠군요.”
“만약 출소자가 나오면 네가 데리러 오는 건가?”
“예. 집무실에 있는 통신구로 연락하시면 최대한 빠르게 오겠습니다.”
“집행자인데 인간에게 존댓말을 잘도 하는군.”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앞으로 서로 오래 볼 것 같은데 괜히 미움을 살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들보다 낫네.”
“칭찬 감사드립니다.”
호송대가 떠났다. 김우진은 50개의 더미들을 나란히 세워놓았다.
“이제 여기다가 정령을 집어 넣으시는 겁니까?”
“그래. 이론상으로는.”
“이론상이라면?”
“한 번도 소환해본 적이 없거든.”
정령왕의 핵을 섭취한지는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정령을 소환한 적은 없었다. 신들과 싸우다가 바로 격리 차원에 갇혔으니 당연했다.
‘어떻게하는 거더라.’
방법을 모르지는 않는다. 글라크에 있던 정령술사들이 정령을 소환하는 걸 지켜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런 정석적인 방법을 쓸 필요는 없다.
‘정령왕은 모든 정령들을 다스리는 지고한 존재네.’
‘존재 자체만으로도 군림하며 의지만으로 정령들에게 명령을 내리지.’
‘그래서 정령왕의 계약자는 같은 속성의 모든 정령들을 계약할 수 있는 거네.’
‘왕의 계약자는 곧 모든 정령의 계약자거든.’
언젠가 정령왕과 합일하여 사룡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힌, 그러함으로서 모두에게 시간을 주고 김우진에게 정수를 내어줘 뒷일을 맡긴 하이엘프가 했던 말이었다.
지금의 김우진은 정령왕, 그 자체였다.
그러니 굳이 정령술사들의 방식을 따를 필요가 없다. 의지만 있다면 정령들은 언제든 그의 명령에 따를 테니.
‘나와라.’
불꽃의 정령을 떠올렸다.
이왕이면 보다 강한 놈들로.
그래도 용사들을 관리하는 감옥이니만큼 최상급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상급 정도는 나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
심장의 마력이 쭉 빠져 나가면서 백 여 개의 불꽃들이 그 앞에 떠올랐다.
느껴지는 기운이 전부 상급 정령 이상이었다.
그들이 김우진 앞에 정연하게 정렬했다.
- 정령왕님을 뵙습니다.
- 뵙습니다!
흡사 충성스러운 군인 같은 모습에 김우진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
- 새로운 정령왕님이 탄생하고, 언제 불러주실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장 강렬한 열기가 느껴지는 정령이 앞으로 나섰다.
“이름이?”
- 최상급 불의 정령, 알무스입니다!
“그래, 알무스. 내가 너희들을 저기 안에 넣으려고 하는데 될까?”
- 신들이 사용하는 더미군요.
- 정령들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 들어가.”
- 예!
- 들어가라!
정령들이 일제히 더미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50개의 더미들이 일제히 눈을 떴다.
그들이 다시 김우진 앞에 정렬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연옥의 교도관들이다. 나는 소장이고 이놈은 부소장이다. 내가 뭐라고?”
“소장님이십니다!”
“이놈은?”
“부소장님이십니다!”
“부소장의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해라. 내가 없으면 부소장이 너희 대장이다.”
“예, 소장님!”
“부소장을 따라 나가서 너희들이 근무할 곳이 어떤 곳인지 살펴 봐. 아, 죄수들하고는 아직 접촉하지 말고.”
“예!”
“따라와라.”
부소장이 교도관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김우진이 생각에 잠겼다.
일이 차차 진행되는 걸 보니 이제 진자로 기약 없이 썩어야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처음 용사가 되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하필 소환된 차원이 이미 수백의 용사를 잡아먹은 최악의 차원이란 것도.
알베니우스를 만날지도.
신들과 싸우게 될지도.
격리 차원에서 20년을 버틸지도.
용사들을 가두는 감옥의 소장이 될지도.
어쨌든 여기까지 왔다.
불가능할 거라는 종말을 막고.
최초로 신을 죽이고.
20년의 고난을 견디며.
살기 위해 발악해놓고 여기까지 와서 삶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누가 이기나 해보자.”
반드시 50명을 채워서 연옥을 나간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 * *
“내가 생각해봤거든?”
어떤 만남이 죄수들과의 최고의 만남일까. 확실하게 기선을 제압할 수 있을까.
여러 방법들을 고민해봤다.
“결론은 나오셨습니까?”
“탈옥 시키자.”
“예? 무엇을 말입니까?”
“당연히 죄수지.”
“···예?”
이제 조금 김우진에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던 도플갱어의 눈이 커졌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전 소장이 그랬잖아. 여기 죄수들이 드세서 관리하기 쉽지 않을 거라고.”
자고로 드센 놈들을 상대로는 초장에 기세를 잡아 놔야한다. 감히 함부로 뻗댈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머릿속에 때려 박아줘야지만 꼬리를 만다.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죄수도 아닌 죄수들을 후드려 팰 수는 없잖아? 그래도 진짜 죄수도 아닌데. 그러니까 명분을 만들자고.”
명분이 없다면 만들면 그만.
“비상 신호 전부 켜고 시스템다운 시켜서 감옥 문 전부 개방시켜.”
그럼 가릴 수 있다.
“드센 놈인지, 아닌지. 드센 놈은 탈옥을 하겠고 아닌 놈은 가만히 있겠지.”
“···전부 할 것 같습니다만.”
“그럼 전부 드센 놈인 거고. 교정이 필요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응. 간편하잖아.”
“···그러다 진짜로 탈옥하면 큰일 아닙니까?”
“못 해.”
“예?”
“못한다고. 이놈들이 아무리 한 가닥 하던 용사들이라고 해도 차원 이동은 아예 격이 다르거든.”
연옥은 작은 차원이다. 때문에 차원의 끝까지는 갈 수 있을지언정, 결코 차원의 장벽을 넘어갈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게 있어도 마찬가지야.”
정말 만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공간 마법에 특화된 용사가 있다고 치자. 실제로 수감된 죄수들 중 하나는 다크엘프고 공간 마법에 권능이 있다고 나와 있으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신이 권한을 가지고 장벽을 넘는 것과 용사가 장벽을 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열쇠를 가지고 현관을 넘는 것과 열쇠 없이 현관을 넘는 것 정도의 차이다.
“도구를 가지고 이것저것 지랄을 해야겠지. 그게 빨리 끝날까?”
“아니겠죠.”
“그러니까. 그런 놈이 있다고 해도 그 전에 다 잡을 수 있어.”
“···알겠습니다. 그런데 한 명도 탈출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한 명도?”
“예. 함정이라고 생각하고 가만히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확실히 가능성이 있어.”
산전수전 다 겪은 용사들이니 의심이 많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불을 지르자.”
그러니 의심을 완전히 지워줄 포인트를 하나 추가한다.
“···예?”
“연옥 전체를 불태우는 거야.”
“···혹시 미치셨습니까?”
“내가 너무 풀어줬나?”
“아,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잖아. 어차피 리모델링하려면 한 번은 싹 밀어야 돼. 겸사 겸사 불장난이나 하자고.”
건물과 시스템이 무너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신이 만든 게 그 정도로 나약할 리가 없으니. 이미 어느 정도 확인은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지금 부탁하는 것 같아?”
“······.”
“교도관들.”
“예, 소장님!”
“잘 들었지?”
“예, 들었습니다!”
“불 지르고, 시스템다운 시키고, 비상종 울리고, 감방 문 다 열고, 최대한 혼란스럽다는 뜻이 악을 지르며 뛰어다녀.”
“예!”
“만약 죄수들이 도망치면 적당히 막는 척하다 놓아주고. 패배해서 기절해도 좋아. 더미 구하려고 다시 신들한테 아쉬운 소리 하기 싫으니까 몸을 아껴. 하지만 너무 티 나게 나가떨어지지는 말고.”
“예!”
“출발.”
“출발!”
신의 더미를 얻게 된 불의 정령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잠시 후.
애애애애애앵-
사이렌이 맹렬히 울리기 시작했다.
교도관들이 의미 없이 사방에서 뛰어다니며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시스템이 다운된 연옥의 등들이 모두 꺼지고 감옥의 문이 개방되었다.
그리고 붉은 불꽃이 연옥 전체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김우진은 느긋하게 집무실에 설치된 감시 시스템으로 각 방의 상황을 살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죄수들은 당황했다. 처음에는 누구도 열린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교도관들의 소란이 들려오자 차츰 몸이 쏠리더니 문 밖에서 서로 시선을 부딪혔다.
그리고 전투가 벌어졌다.
순식간에 작동 모의를 한 죄수들이 교도관들을 기습했다. 죄수들이 구속구로 제약을 받고 있어도 모두 차원을 구한 용사였다. 그들은 유기적인 합동술로 몇 없는 교도관들을 눕히고 탈옥을 계시했다.
“드워프들은 저 데르카인이라는 놈을 따르고 있고···.”
“엘프는 시에나 올름.”
김우진은 빠르게 각 종족의 리더들을 파악했다. 저들을 잡으면 죄수들을 통제하는 게 한결 편해지겠지.
“죄수들이 모두 탈옥했습니다.”
“모두?”
“예.”
“그럼 전부 드센 놈들이네.”
빡세게 교정할 필요가 있겠어.
희망을 주었다 뺏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하긴 했다. 하지만 역시 김우진은 스스로의 사정이 제일 중요했다.
“그럼 탈옥수들을 잡으러 가볼까.”
김우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연옥의 소장으로서 첫 업무 시작이다.
소장(진) 김우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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