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외전. 소장(진) 김우진(3) >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는 검은 액체.
단순한 액체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다. 인간들은 마물이라고 했지만 딱히 마기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마물이라기보다는 몬스터에 가깝다.
배척받지만 엄연히 차원의 일원인 몬스터와 어둠의 파편인 마물은 완전히 다른 존재다.
어둠에 쉽게 물들어 종말이 일어나면 마물들과 함께 움직이는 탓에 인간들은 동급으로 여기지만.
“어, 어떻게···?”
“이런 상태에서 말을 하네? 구강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 거야?”
김우진이 도플갱어의 몸을 반으로 찢었다.
“사, 살려줘···!”
그럼에도 육성이 나오고 살아있었다. 가공할 정도의 생명력이다.
“변신도 할 수 있다는 거지?”
꽤 재미있는 능력이었다. 도플갱어라는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는 지구의 소설에서나 보았지, 실제로 존재할 줄은 몰랐다.
“변할 때는 겉모습만? 아니면 그 사람의 힘도 어느 정도?”
“······.”
“아, 너무 찢어놨나.”
김우진이 갈라진 두 육체를 서로에게 붙였다. 양 육체에서 뻗어 나온 가는 촉수들이 서로를 이어붙이기 시작했다.
“신기하네? 어떻게 되먹은 몸이야?”
화륵, 김우진이 작은 불꽃을 만들었다.
“이것도 재생 되냐?”
끼에에에에엑! 도플갱어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사, 살려! 살려주십시오! 제발! 너무, 너무 아픕니다!”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검은 액체들에 김우진이 불꽃을 꺼트렸다. 설마 이렇게까지 격렬한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재생해 봐.”
“하, 하겠습니다!”
도플갱어가 필사적으로 몸을 수복했다. 하지만 시커멓게 타버린 자국과 상처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게 끝이야?”
“이, 이게 최선입니다!”
“불에는 약하다는 건···응?”
도플갱어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던 김우진이 뒤늦게 구경꾼들이 있었음을 인지했다.
“뭐야, 니들 아직도 안 갔어?”
“그, 그게···.”
“곱게 보내줄 때 가. 어디 가서 날 봤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고.”
“무, 물론입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용병들이 번개처럼 사라졌다.
* * *
그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냥 괴물, 마물, 도플갱어 등, 그를 지칭하는 단어들은 많았지만 이름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었다.
“이름.”
그래서 답할 이름도 없었다.
“이름이 뭐냐고 묻잖아.”
“···어, 없다.”
“없다?”
“어, 없습니다···!”
공포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인류에게 박해받는 몬스터로서 오랜 시간을 살아남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변신과 모방, 그리고 기감 파악이었다.
상대의 수준을 파악하는 것. 강자를 알아봐야지만 도망치고 오래 살 수 있다.
오랫동안 그를 살려준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결코 그 따위 감당할 수 없는 진짜 괴물이라고.
저항해서는 안 된다. 감히 도망쳐서도 안 된다.
남자가 손아귀의 힘을 느슨하게 풀었음에도 오히려 스스로의 힘으로 붙어 있는 이유였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불탄 상처의 고통을 참으며, 그저 바들바들 떨며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뿐이었다.
“이름도 없어?”
“마물이라던지, 괴물, 도플갱어로는 불렸습니다만, 딱히 이름은···.”
“그래, 그럴 수 있지. 안내해.”
“예?”
“네가 머물고 있는 거처가 있을 것 아니야. 안내하라고.”
“예, 예···!”
남자가 그를 바닥에 내던졌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욱신거렸으나 신음을 참아냈다.
“저···.”
“왜?”
“혹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서 가도 되겠습니까? 이 모습은 아무래도 속도가 조금···.”
“마음대로 해.”
“예.”
그의 시커먼 동체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형태를 갖추고, 색과 옷을 모방한다.
“아까 그 토하던 놈이군.”
“예, 그렇습니다.”
남자, 김우진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턱을 긁적였다. 어떻게 된 매커니즘인지 분위기 자체가 바뀌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아.”
“저···그게···존귀하신 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누구도 제가 변신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건 너보다 수준 떨어지는 놈들한테나 그런 거고.”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왼쪽 팔은 아까 불꽃 때문인가?”
“예.”
반쯤 타버린 왼팔은 쉽게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플갱어의 거처는 숲 한 칸에 마련된 동굴이었다.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과는 반대로 가구나 식탁, 편의도구 등, 인간의 손길이 닿은 것들이 다소 있었다.
“네가 만든 거냐?”
“아닙니다. 제가 직접 인간들의 도시에 내려가 구입하기도 하고, 수족처럼 부리는 인간이 하나 있습니다. 그 인간에게 부탁해서 구해온 것들입니다.”
“그래서 의뢰를 넣어서 사람들을 꼬이게 하는 건가?”
“그게···.”
“다 알고 있으니까 괜히 수 쓰지 말고.”
“···예. 제가 직접 변신해서 의뢰를 넣기도 하고 제 수족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꼬리가 걸리면?”
“다른 곳으로 옮깁니다.”
“그러다가도 잡히면?”
“아직까지 그런 경우는···.”
없었다 이거군.
확실히 쓸만한 능력이다.
“변신에 제약 같은 건 있나?”
“접촉하고 이해한 상대에 대해서만 가능합니다.”
“접촉은 이해했는데 이해라면?”
“머리카락이나 살점, 피 같은 걸 먹으면 좋고, 마나를 흡수해도 좋습니다. 그 양과 질이 뛰어날수록 변신의 효과도 상승합니다.”
“그럼 변신하면 변신한 당사자의 능력도 쓸 수 있다는 건가?”
“진짜에 비하면 조약하지만 조금은···.”
그 말에 김우진이 반색했다. 이거 완전 열화판이긴 하지만 권능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과연, 왜 도플갱어가 전설속의 존재라고 불리는지 알겠다. 이 도플갱어의 능력이 훨씬 뛰어났다면 어쩌면 김우진조차 눈치 채지 못했을 거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존재함에도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다.
“커피 있냐?”
“있습니다.”
도플갱어가 커피를 내왔다. 김우진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금 재생이 됐네?”
“아, 네, 그렇습니다.”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던 왼팔이 아주 조금 다시 자라나 있었다.
톡톡, 김우진이 팔걸이를 두들겼다. 비록 미약하지만 특별히 제거하지 않는 이상, 그의 불꽃에는 언제나 우주의 힘이 깃들어 있다.
우주의 힘은 일반적인 마나와는 격이 다른 기운이었다. 아무리 조금이라고 한들 생각보다 빠르게 그걸 이겨내고 재생이 된다라.
모든 도플갱어가 그런지, 아니면 이 도플갱어가 특별한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특별했다.
“야.”
“예, 예!”
“혹시 나라도 변할 수 있냐?”
“격이 높으신 분은 어렵습니다.”
김우진이 손가락에 피를 냈다. 커피를 다 먹고 빈 잔에 피를 쏟아냈다.
“먹어.”
“···예.”
도플갱어가 피를 섭취했다. 그리고 발작을 일으켰다.
“크허어어어억!”
“뭐야, 무슨 일이야!”
“제,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그의 육신이 인간의 형태를 잃어버리고 다시 슬라임처럼 변했다. 그리고 수백 줄기로 갈라져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너, 너무···!”
김우진은 말없이 그것을 기다렸다. 자신 쪽으로 날아드는 촉수를 쳐내며 직접 새로운 잔에 커피를 리필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허억, 허억···!”
끊임없이 파괴와 재생을 반복한 도플갱어가 간신히 안정을 되찾았다.
“어때?”
“주, 죽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살았지.”
“대, 대체 뭐하시는 분이십니까? 어떻게 이런···?”
“변신이나 해봐.”
“불가능합니다.”
“납득이 되게.”
“격이 너무 높으십니다. 고작 피 한 컵 먹고 복사해내기에는···.”
“피가 더 있으면 된다는 거네.”
김우진이 피가 가득한 잔을 건넸다. 잔잔한 수면 위에 작은 불꽃이 맺혀 있었다.
“먹어.”
“······.”
이번에는 이주일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도플갱어는 김우진의 외형을 복제할 수 있었다.
아직 불꽃을 흉내내지는 못하지만 외형만으로는 거의 완벽하다.
그 시점에서 김우진은 도플갱어를 놔줄 생각을 버렸다.
‘신들과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나도 보험 하나 정도는 들어주는 게 좋겠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꽤나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주기적으로 피와 마나를 먹여주면 차차 나아지겠지.
“···야.”
“예···!”
“너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
거부권은 없었다.
* * *
도플갱어에게 3주를 썼기에 남은 시간은 일주일밖에 없었다.
김우진은 그 동안 도플갱어와 함께 대륙 여행을 떠났다. 대단할 건 없었다. 그저 구원 받은 차원이 어떻게 되었는지, 인류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평온하네.”
몬스터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지구와는 비교가 불가능하지만 차원은 평온했다.
이들은 일상을 되찾았다. 밭에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부터, 도시의 상인, 왕국의 귀족들까지.
더 이상 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김우진은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피해는 더 컸으나 글라크 또한 이렇게 살아가고 있겠지.
그렇게 약속된 한 달이 지났다.
“김우진, 데리러 왔다. 그놈은 뭐지?”
“감옥의 소장이 될 거면 나도 수족이 있어야 할 것 아니야.”
“···뭐, 됐다. 감옥의 인원들을 어떻게 채우던, 그건 네 마음이니.”
베른이 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김우진은 전혀 다른 곳에 서 있었다.
청명한 하늘, 쨍쨍한 태양,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 저 멀리 보이는 높은 벽과 건물, 그리고 농후한 밀도의 마나까지.
“여기가 앞으로 네가 있어야 할 곳, 연옥이다.”
“마나 밀도가 생각 이상인데?”
“아무렴, 신들이 만든 감옥이 인간 따위가 만든 곳들과 같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그냥 들어가면 되나?”
“들어가서 현재의 소장에게 임무를 인수인계 받으면 된다.”
“넌 같이 안 가고?”
“여기까지 데려다주는 것으로 난 할 일을 다했다.”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베른이 사라졌다.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가자.”
“예.”
가까이 다가가자 문이 열렸다.
“크로시스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문을 지키던 집행자들이 김우진을 안내했다.
내부는 평범했다. 딱히 아름답지도, 무언가 대단한 게 있지도 않았다. 텅 빈 공터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거대한 건물 하나가 전부.
“여기 소장의 미적 감각이 거지 같다는 건 알겠네.”
소장의 모욕에 집행자들이 움찔거렸지만 그뿐이었다.
잠시 후, 김우진은 소장실로 안내되었다.
“동행은 같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소장님이 독대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예.”
소장의 집무실도 평범했다. 책상과 의자, 몇 개의 책장. 그게 전부였다. 김우진은 소파에 앉아 티타임을 즐기던 소장과 눈이 마주쳤다.
소장이 빙그레 웃었다.
“반가워. 네가 김우진이지?”
“맞아.”
“말투가 건방지지만 뭐, 무슨 상관이야. 최초로 신을 죽인 인간에 나를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게 해준 은인인데.”
소장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위대한 백신전의 신이자, 연옥의 소장, 크로시스야.”
“김우진.”
“사람 무안하게.”
“딱히 네놈들과 악수를 할 정도로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뭐, 좋아. 나도 인수인계만 끝내고 여길 벗어나면 그걸로 족하니까.”
크로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곳, 연옥이 뭐하는 곳인지는 이미 들었다고 알고 있는데.”
“이용할 대로 이용해 놓고 말을 안 듣는 용사들을 토사구팽하는 곳.”
“틀려. 감히 주제를 모르고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탐하는 욕심 많은 자들을 뉘우치게 하는 곳이지.”
“그건 네 생각이고.”
“신의 뜻이 곧 세상의 뜻이지.”
뭐, 어떻게 생각하던 상관은 없어.
“어차피 네가 해야 할 일이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이곳의 죄수들이 자발적으로 힘을 포기하고 출소하게 하는 것.”
크로시스가 본격적인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사실 별로 할 것도 없어. 모든 감옥은 독방으로 이루어져있고 우리가 만든 시스템으로 관리되지.”
“현재 죄수는 34명이야. 인간, 엘프, 드워프, 수인, 거인까지. 아주 다양하지.”
“간수들은 50명. 모두 집행자들이야.”
“각 독방에는 징벌방이라는 시스템이 있어.”
“죄수들을 구속하는 건 구속구라고 주신께서 만드신 것이지. 효과가 아주 탁월해서 절대 풀릴 일은 없을 거야.”
크로시스가 두터운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세세한 것들은 직접 확인해보고.”
“간수들은 그대로 두고 가는 건가?”
“그래. 한 명 데려온 것 같지만 둘이서는 감옥을 관리할 수가 없잖아?”
“어떻게 믿고?”
“다른 대책은 있고?”
“신들이 유희를 떠날 때 쓰는 더미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알베니우스한테 들었다. 이번에 주신의 명령으로 베른이 어쩔 수 없이 직접 김우진을 안내했지만 사실 신은 하위 차원에 내려가는 것 자체를 꺼린다고 했다.
제약 때문에 전능감이 사라지니까. 때문에 가끔 직접 나서야 할 때 더미를 쓴다. 일종의 분신 같은 거다.
“그걸 넘겨. 간수 수대로.”
“그걸 넘긴다고 해서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는···아.”
크로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정령왕의 정수를 흡수했다고 했었지? 좋아, 이해했어. 주신들게 여쭤보지. 아마 허락해 주실 거야.”
하지만 괜찮겠어?
크로시스의 입가가 비틀렸다.
“집행자들이 아니면 여기 죄수들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신의 뜻을 거역하고 반기를 든 반골들이라 좀 드세거든. 그깟 정령들로는 조금 힘들 텐데?”
“그건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지.”
“하긴, 이제 내 손을 떠났지.”
그가 과장된 모션으로 손을 털었다.
잠시 후, 그가 집행자들과 연옥을 함께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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