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121화 (121/150)

# < 외전. 소장(진) 김우진(2) >

신들이 어떤 의도로 한 달이라는 휴가를 주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김우진은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고통 받았고, 연옥이라는 미지의 공간에 들어가기 전에 여유를 가지는 것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 차원이나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된다고?”

“······.”

“묻잖아.”

“···그래.”

베른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계속해서 벌겋게 달아오른 목을 매만졌다.

‘어디로 가볼까.’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지구다.

그의 고향, 용사가 된 순간부터 돌아가기를 소망했던 곳. 지구의 평온한 일상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한 달은 짧다. 앞으로 소장으로 얼마나 묶여 있어야 할지 모르지만 신들의 태도를 보아 결코 짧지 않을 터.

한 방울의 물은 오히려 갈증을 심하게 할 뿐이다. 아예 처음부터 가지 않아야한다.

그렇다면 남는 곳은 하나다.

김우진이 알고, 직접 겪어본 두 개의 차원 중 하나.

그가 지켜낸 차원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정말로 종말에서 벗어난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글라크. 글라크로 가고 싶다.”

“불가하다.”

“정확히 10초 전이랑 말이 달라졌네?”

“···어쩔 수 없다. 글라크는 계약에 묶여 있으니까. 주신께서 차원 자체를 봉인시켰다. 나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

“하지만 신들은 들어갈 수 있을 것 아니야.”

“오직 주신들만이 가능하다. 내 권한 밖이다.”

“하···!”

김우진이 으르렁거리자 베른이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태도를 보아하니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열이 받았다. 다시 가서 글라크를 보고 싶다고 한들 주신놈들이 들어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계약 핑계를 대겠지. 빌어먹을 놈들.

김우진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지구와 글라크를 배제하고 나니 딱히 갈만한 곳이 없었다.

‘그럼 그렇지. 이 새끼들이 순순히 나 좋게 해줄 리가 없지.’

수틀린다고 차원 하나를 멸망시켜보려고 했던 자들이다. 김우진은 다시 한 번 신들에 대한 경각심을 가졌다.

“그럼 그냥 여기 있는 건?”

어차피 갈 곳이 없다면 백신전에 남아 넘쳐나는 우주의 힘을 흡수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신들과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니 만큼, 대비할 수 있는 만큼 대비하는 게 옳았다.

애초에 이놈들과 손을 잡는 다는 건 상상만해도 끔직하고.

“헛소리하지 마라. 감히 인간 따위가 신들의 성역에 발을 들이려 하느냐. 여기까지 오게 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자비를 베풀었음이다.”

“지랄 염병을 해라.”

“···뭐라고?”

“아니, 아무 것도. 이곳도 안 된다, 저곳도 안 된다. 그러면 내가 갈 곳이 없잖아, 갈 곳이!”

“난 한 곳밖에 이야기 하지 않았다!”

“여기에도 있을 수 없다는 게 두 개지, 한 개야?”

“여긴 떠나는 게 아니잖느냐!”

“변명하지 마. 신이라는 새끼가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어?”

“아니···!”

김우진은 고민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종말을 막아낸 차원으로 갈 수도 없다면.

“종말을 구해내고 용사가 사라진 차원으로 나를 안내해. 단, 종말이 끝난 지 20년 안팎의 차원으로.”

비슷한 차원에서 유유자적 쉬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게 곧 글라카의 상황일 테니.

* * *

“여기는 베라푸스라는 차원이다.”

“한 미친 인간이 자신의 왕국 백성 수 백만을 모조리 제물로 바쳐 종말의 사도가 되었다.”

“제물이 된 백성들은 모두 언데드가 되었고 그 피와 생명력에 이끌린 마물들이 몰려들었다.”

주변의 왕국들을 집어 삼키며 수를 불려나간 죽음의 군단은 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가 나선 다음에야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원래 그런 건가?”

“뭐가 말이지?”

“종말 말이야. 들어보면 뭔가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되는 게 아니라 그냥 복수심에 미친 놈 하나가 등장하면 되는 거 아니야?”

글라크의 사룡이 그랬고 베라푸스의 왕이 그랬다.

“틀리다. 종말은 세상의 법칙이다. 새롭게 태어나는 차원이 있듯이, 죽음을 맞이하는 차원이 있는 거다. 어둠은 그 때에 맞춰 적당한 인물을 종말의 사도로 삼는 거고.”

“사룡이나 미친 왕이 아니었어도 결국 다른 놈이 했을 거다?”

“그게 균형이니까.”

“그렇다면 그걸 막는 게 의미가 있나? 당연한 균형이잖아. 종말이 이루어지게 놔둬야 하는 거 아니야?”

“종말이라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거다.”

그대로 멸망하는 것 또한 균형의 일부다. 하지만 저항하고 또 저항한 끝에 종말을 막고 유예 기간을 가지는 것 또한 균형이다.

“종말은 아무런 피해 없이 막을 수 없다. 죽음과 피, 생명력은 그대로 노쇠한 차원의 힘이 된다. 죽어간 자들로 인해 차원의 수명이 연장되는 거다.”

“인간에게 차원이 필요한 것만이 아니라 차원에게도 인간이 필요하다는 거군.”

하지만 다른 방법이 전혀 없을 리는 없다.

김우진은 베른의 말에서 그 맹점을 찾았다. 고작 피조물의 생명력과 피가 차원의 동력이 될 수 있다면 우주의 힘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이 일반유라면 신들은 고급유겠지. 그럼에도 그러지 않는 이유는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럼 여기는 종말이 끝난 지 얼마나 됐지?”

“15년이다.”

“적당하군.”

김우진의 시선이 저 아래를 향했다. 드넓은 대지는 절반 가까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마기에 오염된 대지는 어떻게 되는 거지?”

“자연스레 정화될 거다. 조금 오래 걸리겠지만. 신을 섬기는 신도들의 믿음이 충만하면 더 단축될 거고.”

“안 믿으면 정화를 안 시켜주겠다는 말이군.”

“···나도 참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안 참으면?”

김우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진득한 살기가 베른과 집행자들을 덮쳤다.

“안 참으면 어쩔 건데?”

일단 신이니까 약하지는 않다. 하지만 김우진이 죽인 두 명의 신보다 강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자신이 없었다. 질 자신이.

“묻잖아.”

“······.”

베른이 입술을 깨물고 그를 노려보았으나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신이 움직이지 않으니 집행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차원을 옮기고 싶으면 집행자를 통해 나를 불러라.”

“뭐야, 네가 가이드 해주는 거 아니었어?”

“나는 신이다. 내가 하찮은 인간의 가이드나 하고 있을 것 같더냐.”

“주신이 시켰잖아.”

“그러니까 집행자를 붙여놓는 거다. 더 붙어 있다가는 주신의 명을 어기고 네놈을 죽일 것 같으니까.”

“죽을 것 같으니까가 아니고?”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놈.”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베른이 집행자 하나만을 남겨 둔 채 사라졌다.

“······.”

“······.”

“야.”

“···예, 예!”

“베른하고 연락 되냐?”

“무, 물론입니다. 모든 집행자는 모시는 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렀을 때 바로 튀어오지 않으면 그 잘난 주신한테 어떻게 이야기할지 알아서 잘 판단하라고 해.”

“예, 전하겠습니다!”

“내가 널 부를 만한 수단은?”

“예? 갑자기 그게 무슨···.”

“계속 널 달고 다닐 수는 없잖아.”

“이, 이거. 이 반지에 언제든 마나를 주입하시면 차원 내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반지를 받아든 김우진이 손을 휘저었다. 집행자가 사라졌다.

“어디보자. 이제 뭘 해야 할까.”

딱히 정해진 것도,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정한 것도 없었다.

“일단 좀 자자.”

참새들이 지저귀는 숲속에서,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지난 20년 동안 숙면이란 걸 취해본 적이 없으니까.

김우진이 인근의 숲속으로 들어가 나무 가지 위에 자리를 잡았다.

기분 좋은 정적이 흘렀다.

“······.”

하지만 그 정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 * *

네 명의 용병들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숲을 질주했다.

“허억, 허억···!”

“더 빨리! 더 빨리 뛰어!”

“제기랄, 그러니까 이딴 의뢰는 받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진짜 괴물이 있을 줄 누가 알았냐고! 보상이 짭짤해서 너도 수긍 했잖아!”

“대장이 하도 해야 한다고 하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우웩···!”

“넌 또 뭐야! 빨리 일어나! 토할 시간이 어딨어! 이러다 다 죽어!”

작은 용병대의 대장, 콕스가 아침에 먹은 것을 쏟아내는 부하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불안하게 숲 너머를 끊임없이 살폈다.

역시 이딴 수상쩍은 의뢰는 받는 게 아니었다.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종말은 대륙의 절반을 쓸어버린 뒤에야 끝이 났고 인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당연히 치안은 개판이 되었고 몬스터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콕스는 용병이 되었다. 용병의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며 그 예상은 적중했다.

도시와 도시를 이동하는 게 힘들어진 만큼 호위 병력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귀족들이야 기사와 병사들을 이용하겠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이나 상인들은 용병 길드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일거리는 넘쳐났고 콕스와 그의 용병대는 꽤나 많은 돈을 벌었다.

“그 여자, 애초부터 뭔가 이상했어···!”

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 용병대의 명성이 쌓이면서 많은 사람들이 용병대에게 의뢰서를 접수했다.

콕스는 그중 고르고 골라 의뢰를 수행하는데 어제 아침, 구미가 당기는 의뢰서를 발견했다.

흔하디흔한 호송 의뢰였다.

하지만 보상이 평범한 호송 임무치고는 지나치게 많았고 조건이 하나 있었다.

엘라임 숲을 지나갈 것.

“엘라임 숲? 우리보고 전부 뒤지라는 소립니까?”

직접 만난 의뢰인은 중년의 귀부인이었다. 온 몸에 치장한 금붙이들이 척 보기에도 돈이 많은 졸부의 느낌.

“시간이 생명이라서요. 도리스 시에 사는 친구한테 최대한 빨리 그걸 가져다 줘야 하는데 엘라임 숲을 우회하면 족히 일주일이 더 걸리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엘라임 숲은 위험한 곳입니다.”

엘라임 숲에 존재하는 몬스터는 기껏해야 고블린 정도지만 엘라임 숲의 악명은 그 이상이다.

간단하다. 엘라임 숲으로 들어간 이들 중 돌아오지 못한 자들이 많고, 몇몇은 아예 미쳐버렸기 때문이다.

마녀가 산다느니, 정체 모를 마물이 있다느니,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보았다느니 말이 많았다.

“그거 다 헛소문이라고 밝혀지지 않았나요?”

얼마 전, 엘라임 숲의 정체 모를 마물을 토벌하기 위해 백 단위의 대형 용병단이 움직인 적이 있었다. 몇날 며칠 동안 숲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마물의 흔적은 조금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밝혀진 바로는 마물이 원인이 아니었다.

엘라임 숲에 달맞이 꽃이라는 식충 식물이 자라나는데 꽃가루에 환각 성분이 있다. 바람에 날려 꽃가루를 접촉한 이들이 환각을 보았다고 결론이 나왔다.

“단순한 헛소문이라기에는 당한 용병들이 꽤 있어서 말이죠. 그걸 아니까 당신도 보수를 넉넉하게 준비한 것 아닙니까?”

“돈을 두 배로 드릴게요. 선금으로 절반, 도착해서 또 절반. 그런 만약 때문에 기회를 놓치시겠어요?”

“···그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시간은 금이니까요. 그게 최대한 빨리 제 친구에게 도착하는 게 참 중요하거든요. 그래도 안하시겠다면 다른 용병단을 찾아보는 수밖에요.”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놈의 돈이 뭔지. 동료들도 불안하다고 했지만 의뢰금을 보고 납득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거다. 스무 명의 용병대 중 그의 곁에 남은 건 고작 셋이다. 나머지는 죽거나 숲을 헤매고 있겠지.

빌어먹을. 역시 헛소문을 그냥 헛소문으로 치부하면 안 됐는데.

“대, 대장!”

“살았다!”

그때, 상처투성이의 용병 둘이 수풀을 헤치고 나타났다.

“머레이? 알렌?”

“맙소사, 머레이! 알렌! 너희들 살아 있었구나!”

“잠깐만!”

콕스가 검을 치켜세웠다.

“거기서 기다려.”

“왜, 왜 그래, 대장?”

“너희도 봤잖아? 이 숲에 산다는 그 마물의 정체가 뭔지···!”

“마, 맞아!”

“너희들이 머레이와 알렌이 맞다는 증거를 내밀어 봐.”

“내가 머레이라서 머레이인데 증거가 어디 있어!”

“나도!”

“고향이 어디야!”

콕스의 채근에 두 용병이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벤덴부르크.”

“도리아.”

“몇 살에 용병이 됐지?”

“21살.”

“26살.”

“나랑 어떻게 만났어?”

“검은 꽃 용병단에서 활동하다가 용병단이 망하고 루덴 지역에서 대장과 처음 만났지.”

“대장이 루덴에 있는 ‘바람에 날리는 화살’ 술집에서 술 먹고 난동 부릴 때 시비가 붙어서 처음 만났어.”

“···맞나?”

“맞다니까!”

“어떻게 우릴 의심해? 함께한 세월이 10년인데!”

“잠깐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콕스가 곰곰이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알 수가 없는, 용병들과 그만의 이야기 거리들.

“너희···.”

“재미있는 짓거리를 하네.”

불쑥,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콕스와 용병들이 목소리의 행방을 찾았다. 나무 위였다. 언제부터인지 검은 머리의 남자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어느 틈에?’

아무리 도망치는 와중이라고 해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다니?

콕스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자가 아까 그 마물?’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콕스가 검의 방향을 돌리려했다.

“나라면 그런 짓 안 해.”

나직한 경고가 아니었다면 그랬을 거다.

“오래 살고 싶으면.”

“······.”

목소리에 담긴 미중유의 힘은 그가 저항하기에는 너무 거대했다. 온 몸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누, 누구십니까?”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자는 그 마물 따위가 아니었다. 격이 달랐다.

“그냥 시끄러워서 일어난 사람?”

탁, 남자가 가볍게 착지했다. 천천히 그의 일행들을 훑더니 입꼬리가 비틀렸다.

“재미있는 놈이 있네.”

“예?”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남자의 손이 누군가의 머리를 잡아챘다. 그대로 바닥에 내리 찍었다.

───!

토를 하던 용병이 영문도 모른 채 땅바닥에 머리가 쳐박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몸을 꿈틀거렸다.

“이게 무슨 짓···!”

콕스가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그의 부하 용병이어야 할 놈이, 방금까지 그가 등을 두드려주던 놈이, 검은 액체로 변해 구렁이처럼 기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히, 히익···!”

“얀델이 마물이 됐다!”

“멍청아! 아까 그 놈이 얀델로 변한 거잖아!”

콕스가 멍하니 자신의 손을 확인했다. 용병들이 기겁하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신기하네.”

콰득, 남자의 손이 검은 구렁이를 낚아챘다. 아니, 저건 구렁이보다는 슬라임에 가까웠다.

─!

──!

놈이 고막이 찢어지는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발버둥쳤다.

“네가 말로만 듣던 도플갱어냐?”

남자가 눈이 짙은 흥미를 띠었다.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 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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