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외전. 소장(진) 김우진(1) >
임시로 만들어진 백색의 공간은 오직 한 명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임시 차원.
남자는 그 사이를 걸었다.
육신의 자유를 구속하고, 통각을 자극하며, 정신을 어지럽히는. 악의로만 가득한 곳.
그 중앙, 그가 있었다. 차원 곳곳에서 뻗어 나온 사슬에 묶여 온 몸이 구속된 인간.
육신은 상처투성이였고 눈을 감고 있었다. 고르게 느껴지는 숨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남자가 무릎을 굽히고 얼굴을 마주했다.
“김우진. 생각보다 더 독한 놈이구나.”
그, 김우진이 눈을 떴다.
“베리안.”
여전히 독기가 죽지 않는 눈은 남자, 베리안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설마 네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못해도 10년이면 두손 두발 다 들을 것이라 생각했거늘.”
“네 생각대로 안 돼서 참 기쁘네.”
퉤, 김우진의 침이 베리안의 얼굴을 때렸다. 베리안은 아무렇지 않게 침을 닦아냈다.
“난 능력 있는 자를 좋아한다. 넌 이미 차고 넘치게 네 자격을 증명했지. 20년의 시간을 버텨냈음은 화룡정점과 같다.”
“20년?”
“···설마 몇 년이 지난지도 모른 거냐?”
“그럼 여기서 내가 시간을 어떻게 알아? 너 바보냐?”
확실히 새하얀 공간은 결코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을만한 공간이 아니다.
“1년마다 오겠다고 했을 텐데.”
“그랬나? 그런 사소한 건 딱히 기억하는 취미가 없어서.”
“과연, 그 태연함 하나 만큼은 신조차 본 받아야 할 정도구나.”
“딱히 너에게 칭찬 받는다고 기쁘지는 않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내 권속이 되어라.”
“지랄하고 있네.”
김우진이 입술을 핥았다. 쩍쩍 갈라지고 메마른 껍질 같이 느껴졌다.
지독한 갈증에 목이 타고, 허기가 몸을 축내며, 온 몸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고, 정신이 조금씩 마모되어 가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우진은 웃었다.
“어쨌든 그러니까 20년이 지났다는 거잖아?”
그럼 뭐해.
“풀어, 이 새끼야.”
* * *
신들의 성지, 백신전.
백신전이 생기고 처음으로 신도, 집행자도 아닌 이가 발을 들였다.
“인간으로서 이곳에 온 것은 네가 처음이다. 평생의 영광으로 알아도 좋다.”
“헛소리 하지 마. 내가 들어오게 해달라고 칼 들고 협박했냐?”
“넌 정말 재미있는 인간이다. 다른 인간이 감히 내게 그 따위 말을 했으면 바로 머리통을 날려버렸을 텐데 너는 그러고 싶지가 않단 말이지.”
베리안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끼익, 거대한 문이 열렸다. 붉은 카펫이 깔리고, 신들이 자리한 대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미중유의 힘이, 시선이 느껴졌다.
신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내뿜고,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압박을 준다.
그렇기에 신이고, 그들이 모였기에 이곳이 백신전이다.
하지만 그런 자들을 둘이나 죽인 게 김우진이다. 꿀릴 것은 하나도 없다.
“저 자가 김우진···.”
“20년을 갇혀 있었다고 들었는데 눈에 독기가 살아있군.”
“바리온이 저놈에게 죽었다고?”
적의와 살의가 가득한 기운의 파도를 천천히 헤쳐 나갔다.
신들의 눈에 이채가 떠오르고 김우진은 세 개의 상석 앞에 섰다.
알비츠.
칼카르.
그리고 베리안.
저들이 이 백신전을 주무르는 주신이자 김우진에게 계약을 제의한 당사자들이다.
“감옥의 소장을 하면 된다고 들었는데 확정된 것 아니었나? 이제 와서 압박 면접이라도 보려고?”
“입 닥쳐라! 어디 감히 주신들께!”
“방자하기 짝이 없군.”
“어디 인간 따위가 감히···!”
터져나오는 분노와 함께 잔잔하게 깔려있던 기운이 폭발하듯 김우진을 찔렀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아니 용사라 할지라도 단숨에 죽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기세였다.
“조용.”
하지만 알비츠가 가볍게 손을 들자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신들에게 주신이 어떤 의미인지,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김우진. 너는 감히 신을 죽이고도 그 죄를 뉘우치지 않고 있다.”
“잘못이 아니니까. 지구에서는 이런 걸 정당방위라고 해.”
“과연 베리안의 말대로다. 죽어서도 입만 둥둥 뜰 놈이구나.”
“듣던 대로 화끈해서 좋군. 어떻게, 나랑 한 판 붙을 생각 없나?”
“아서라, 칼카르. 계약을 맺은 이상, 그것을 이행해야 한다.”
“농담이야, 농담. 내 앞에서 저 따위 말을 지껄이는 놈은 처음이라.”
이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까, 신들과 달리 주신들은 김우진의 태도에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네가 무난하게 20년을 버틸 줄은 몰랐다.”
김우진을 위해 마련된 임시 차원은 육체를, 정신을 갉아 먹는 극한의 고문실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김우진은 끝끝내 20년을 인고해냈다.
덕분에 계획자체는 틀어졌지만 주신들은 김우진에 대한 생각을 달리했다.
신을 둘이나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정신력도 신과 필적한다.
“대놓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조건으로 걸었다는 말을 잘도 하는군.”
김우진이 코웃음쳤다. 어찌 되었든 그는 그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냈다.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 우리를 위해 일할 생각은 없느냐?”
“아까 대답했던 것 같은데. 좆까라고.”
“입이 험하군.”
“일개 관리자한테 존칭을 해줄 필요가 있을까?”
“관리자?”
“너희도 전부 아카식 레코드에게 선택을 받았을 뿐이라며?”
콰직-
테이블이 부서졌다. 이전과는 다른 압력이 김우진을 찍어 눌렀다. 김우진이 터져 나오는 핏물을 억지로 삼켰다.
“자비에도 한계가 있다. 선을 넘지 마라, 김우진.”
“죽일 수는 있고? 이제 와서 계약대로 하지 못하겠다는 건가?”
“···하.”
“정말 끝까지 입은 산 놈이군!”
“관리자라. 어처구니가 없구나.”
주신들은 제각각의 반응을 보였으나 공통된 사항이 있다면 분노였다. 김우진은 계약이 아니었다면 방금 자신이 죽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신의 말은 무겁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 그게 네가 그 따위 말을 지껄이고도 아직 대화를 할 수 있는 이유다.”
“심연이란 곳이 그렇게 무서운 곳인가 봐?”
“한 마디도 지려고 하지를 않는군.”
“져줄까?”
“필요 없다.”
“그만 해라. 쓸데없이 시간 낭비 그만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지.”
알비츠가 김우진과 베리안의 말을 끊어냈다.
“김우진, 우리는 네게 아주 자그마한 호의를 베풀고자 한다.”
“호의?”
“한 달. 한 달의 여유를 주마. 연옥의 소장이 되기 전에 마음 놓고 마지막 휴가를 즐겨라.”
뜬금없는 호의에 김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무슨 생각일까 고민해보았지만 뚜렷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의심하지 마라. 그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은 네게 주는 순수한 호의니까. 우리는 뛰어난 자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차원을 아예 멸망시키려고 들어?”
“그 자들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으니까.”
알비츠가 담담히 말했다.
“그들에게는 자격이 없었고 너에게는 자격이 있다. 거부하고자 한다면 거부해도 된다. 하지만 한 번 연옥의 소장이 되면 네가 명시한 잠깐의 휴가를 제외하고 언제 연옥을 벗어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연옥의 죄수들은 그렇게 자주 오지 않거든.
“어떻게 할 테냐. 아, 의심이 많은 인간이라고 했나. 신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건데 결코 네게 해를 입히는 일은 없을 거다.”
“···좋아. 보내준다면 가야지.”
어차피 이렇다 할 선택지도 없었다.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도망치려면 도망쳐도 좋다. 그 대가는 온전히 네가 감당할 테니.”
“엿 먹어.”
베리안의 첨언에 김우진이 중지를 들어올렸다. 신들의 표정이 발작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갔지만 주신들의 눈치로 인해 분노를 삭혔다.
“베른.”
“예, 주신이시여.”
베리안의 부름에 푸른 머리의 남자가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네가 김우진을 안내해줘라. 한 달 동안 따라다니면서 원하는 차원으로 옮겨주어라.”
“예?”
“두 번 말해야 알아듣느냐?”
“···아닙니다.”
“덕분에 신이 되지 않았느냐. 신이 되어서 보은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서 되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따라와라.”
베른이 집행자들과 함께 김우진을 데리고 사라졌다.
“회의는 여기까지다. 모두 나가도록.”
“예.”
대전에는 오직 세 명의 주신만이 남았다. 잠시간의 침묵, 먼저 입을 연 것은 베리안이었다.
“이제 모두 알았겠지. 김우진은 한 번 쓰고 버릴 패로는 아깝다. 신이랍시고 뻗대고 있으나 한참 부족한 저것들 보다 훌륭하다.”
“동감이다. 고작 인간 주제에 내 호승심을 자극할 줄이야.”
“···인정하지. 솔직히 난 베리안 네가 미친 줄 알았다. 신을 둘이나 죽인 반역자 놈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가자니.”
하지만 김우진을 직접 보고 나니 왜 베리안이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깨달았다.
아까웠다. 김우진의 잠재력은, 재능은, 능력은 결코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는 수준이었다.
“놈을 우리들의 권속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네 의견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놈이 그럴지는 의문이군.”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게 있다.
말투, 행동, 그리고 눈동자. 눈은 마음의 창이다. 사람의 감정은 눈에 그대로 깃든다.
“우리를 당장 찢어 죽이고 싶어 안달났더군.”
“그래, 아주 건방진 놈이다.”
가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떠나서 그 고초를 겪고도 마음이 꺾이지 않았다. 그런데 회유를 한다 한들 넘어올까?
“네가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안다. 하지만 굳이 권속으로 들여야만 부려먹을 수 있는 건 아니지.”
“계약을 이야기하는 거냐?”
“그래. 어차피 연옥을 관리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신들에게 있어 연옥은 귀양지나 다름 없었고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으니까. 김우진을 연옥의 소장으로 평생 박아놓을 수 있다면 좋지 않으냐.”
“확실히.”
신들은 누리는 것에는 익숙하나 의무에는 익숙하지 않다. 연옥의 소장 자리는 신들이 돌아가면서 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가고 싶어하지 않는 자리였다.
거기에 김우진을 영원토록 박아둘 수 있다면 결코 나쁘지 않았다.
“필요할 때마다 계약을 적당히 어기게 만들면 된다. 죄수들이 탈옥했을 경우, 출소시켜야 하는 죄수들이 두 배씩 늘어난다고 명시되어 있으니.”
그러다 보면 결국 김우진도 백신전에 항복할 수밖에 없을 거다.
“20년간 버틴 놈이?”
“고작 20년이다. 인간에게는 긴 시간일지 몰라도 우리에게 20년은 찰나지.”
연옥의 소장직을 20년이 아니라 200년, 2000년을 맡아도 과연 처음의 그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만.”
정신은 풍화되고 마모되어 자신이 왜 여기에 갇혀 있는지도 모르게 될 거다. 그리고는 결국 유일한 동아줄을 잡아당기겠지.
“확실히. 저 정도의 인간이라면 나는 2천년이 아니라 200만년도 기다릴 수 있다. 관리자라는 언사는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지만. 권속이 되면 제대로 교육시켜주지.”
칼카르가 살의를 드러냈다.
“알비츠, 너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 김우진이 오래 버틴다고 한들, 우리로서는 손해 볼 것도 없으니. 감히 신을 관리자라고 칭한 놈에게 아주 적절한 징벌이다.”
끝까지 저항을 하던, 그렇지 않던 시간이라는 감옥은 놈에게 자신이 저지른 죄를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 거다.
그렇게 김우진에 대한 처우가 결정되었다.
* * *
백신전이라는 차원은 확실히 남달랐다.
바로 우주가 보이고 저 멀리 새하얀 기둥이 보인다. 저게 아마 알베니우스가 말했던 아카식 레코드라는 거겠지.
아카식 레코드에 가깝기 때문일까, 차원 전체에 우주의 힘이 넘쳐났다. 그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차오르는 폐부는, 김우진으로 하여금 계속 여기 있고 싶은 충동감이 들게 만들었다.
‘안 돼.’
어쩌면 이것 또한 백신전의 수작일지도 모른다. 김우진이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고 개가 되기를 바라는.
결코 넘어가지 않을 거다.
미욕을 떨쳐낸 김우진이 앞서 걸어가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이.”
대답은 없었다.
“베른이라고 했었나?”
“···경고다. 감히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그렇게 발작버튼처럼 바로 튀어 오르면 더 눌러지고 싶어지잖아.”
베른이 걸음을 멈췄다.
“김우진.”
“그래.”
“네놈이 과거에 어떤 짓을 했던, 어떤 성격이던 난 전혀 관심이 없다.”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 내 덕분에 신이 됐다며? 주신이 개소리를 할 리는 없잖아?”
콰악, 거친 손아귀가 김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닥쳐라. 감히 주신을 모욕하지 마라. 주신의 명이 아니면 넌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었다.”
“할 수는 있고?”
김우진이 웃었다. 눈이 마주쳤다. 베른이 몸을 움츠렸다.
“백신전이라면 신도 백 명일테고, 당연히 공석이 없으면 새로운 신도 없을 테지. 그러니까 베리안 놈의 말대로라면 넌 내가 신을 죽여서 그 자리를 먹은 거잖아?”
“헛소리···!”
“그럼 씨발놈아.”
김우진이 베른의 손등을 붙잡았다. 우드득, 뼈와 근육이 뒤틀렸다. 베른이 신음을 토해냈다.
“베른님!”
“가만히 있어. 조금만 더 움직이면 이새끼 목 꺾인다.”
집행자들이 무기를 빼어들었으나 날선 경고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절을 하고 풀코스로 대접을 해도 모자란데 왜 겁먹은 개처럼 짖어대고 지랄이야. 상황파악이 안 돼?”
김우진이 손을 풀었다. 베른이 자신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았다.
김우진 구겨진 옷을 펴고 생긋 웃었다.
“그리고 어차피 계약 때문에 우리 둘 다 서로 못 죽여.”
그러니까.
“얌전히 여행이나 다니자고. 지금은 네가 내 가이드잖아? 이 개새끼야? 아, 이건 실수.”
김우진이 휘파람을 불며 앞서나갔다.
“···괜찮으십니까?”
“손 치워.”
“예, 예···!”
뿌득, 베른의 눈이 김우진의 등에서 고정되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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