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4. 새로운 신도들 >
무슨 짓을 해도 꺼지지 않던 백염은 오염된 땅과 멀쩡한 땅의 경계에서 멈추고 스스로 사그라들었다.
“···땅이?”
“정화되었다! 땅이 정화됐어!”
그리고 인류는 불꽃이 사라진 자리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 챘다.
시커멓게 죽어버린 대지가 잿더미로 변했으나 생명력이 느껴졌다. 검게 물들었던 토양이 본래의 색을 되찾고 있었다.
“기적이다···! 기적이야!”
“김우진 용사님이 우리를 보우하신다!”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김우진을 찾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신들에게 버림받은 그들이 다시 신을 찾아 섬길 이유가 없으니까. 신들 대신 의지할 존재가 필요했고 김우진이 더 없이 적합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을 희생해 글라크를 구한 위대한 영웅이니까.
그의 이야기는 부풀리고 부풀려 이미 전설이 되었다. 신들에게 탄압당해 끌려갔지만 언젠가 돌아온다는 신화까지 있을 지경이었으니.
인류가 갑작스러운 기적에 난리가 났을 때, 각국의 수뇌부들은 다른 의미로 뒤집어졌다.
“김우진이 돌아왔다고? 정말로?”
“그게 말이 되는 건가? 신들에게 잡혀간 김우진이 어떻게···.”
“···저 불꽃이 진짜 김우진의 권능이라고? 대륙 전체를 뒤덮은 화마가?”
“땅을 정화? 신이 아니고서야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김우진을 만나봐야겠다!”
“김우진은 지금 어디 있나!”
백염으로 인한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는 그 정체와 목적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김우진이 드러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왕들이 일제히 무거운 엉덩이를 때고 김우진을 만나고자 하는 것도.
왕들의 행렬이 이그라실로 몰려들었다.
* * *
“그래, 튀는 걸로 하자.”
“어딜 마음대로.”
“회포도 다 풀었고 너나 다른 용사들의 앞으로의 일도 끝냈으니 더 있을 이유가 없잖아?”
40여년의 시간은 무척이나 길었다. 부외자 같던 용사들이 뿌리를 내리고 가족을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
살아남은 용사들은 전부 가족을 만들었고 이곳의 일원이 되었다. 그들은 원한다면 본래의 세계로 돌려보내주겠다는 김우진의 호의를 거절했다.
세이드도 마찬가지였다.
“너도 돌아갈 생각은 없다며.”
“넬리아를 두고 갈 수는 없다.”
“율리아는? 딸 같다며?”
“율리아는 신이 되었으니 차원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지 않느냐.”
정론이다.
그리고 솔직히 어느 정도는 이렇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40여년은 인간에게 특히 길지만 다른 이종족이라고 결코 짧은 건 아니니까.
드래곤이나 타이탄 같이 수천 년, 수만 년을 살아가는 놈들이 아니고서야.
“뭐,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해. 그러니까 이번 만남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을 기약하···.”
“그러니까 넌 못 간다니까? 천하의 김우진이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지?”
세이드가 도망치려는 김우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렇게 일을 내놓고 널 찾아오는 손님들이 가득한데 도망치겠다니. 신으로서 책임감이 이렇게까지 없을 수 있나?”
“응. 난 신이 아니거든.”
신의 정의는 아카식 레코드에게 선택 받아 힘을 부여받은 자다.
그리고 김우진은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선택 받은 자들을 포식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메마른 가뭄에 비가 오면 그냥 ‘와, 드디어 비가 온다!’하고 기뻐하고 말지 누가 비를 뿌려줬는지 찾아오지는 않잖아?”
“그거랑은 경우가 다르다.”
“너 많이 변했다? 왜 이렇게까지 날 붙잡아두려는 건데?”
“다른 자들도 아니고 왕들이 오고 있다.”
“왕들 좀 모인다고 뭐가 달라져?”
“넬리아가 곤란해진다.”
“···아하?”
“······.”
“그러니까 네 연애 사업을 위해서 내가 희생해라?”
“그런 말이 아니라···.”
번쩍-
“크윽!”
새하얀 빛이 세이드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세이드가 비명을 지르며 주춤거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김우진은 없었다.
“···음. 저도 이만 가볼게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세이드. 다음에 또 봐요!”
율리아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다 사라졌다.
“···제기랄.”
홀로 남은 세이드가 허탈하게 웃었다.
도망 못치게 꼭 붙잡아 두고 있겠다고 넬리아에게 호언장담을 했는데.
“···뭐라고 변명하지?”
아니, 굳이 변명할 필요가 있나. 그냥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넬리아니까. 넬리아는 김우진이 얼마나 막나가던 인간인지 잘 아니까.
“아니지.”
그렇게 그냥 무난하게 흘러가게 두고 싶지 않았다.
“신이라서 이곳에 오래 못 있고 상위 차원으로 돌아갔다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본인은 부정했지만 실제로 신이고 은총을 내려 대륙을 정화시켜준 게 맞으니까.
김우진이 진짜 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공표하고 대륙 전체에 퍼진 기적에 대해 설파한다면 신앙이 자라나는 것도 순식간일 거다.
이미 글라크의 사람들에게 있어 김우진은 반신이니까.
절대 김우진이 자신의 동상을 보고 질색하는 모습을 보여서, 자신의 부탁을 저버리고 도망쳐서 그런 게 아니었다.
* * *
백신전은 패배했다.
세 명의 주신은 모두 죽었으며, 수십의 신들이, 수백의 집행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신과 집행자들은 김우진에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다.
“······.”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왕이다.
모든 주신들이 죽은 상황에서 주신들을 대신해 백신전을 통제할 자는 상위 10신들이었다.
그나마도 전부 살아남은 건 고작 7명뿐이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혼란을 수습하고자 했다.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해도 우리 모두를 죽이고 백신전 자체를 없애지는 못할 거네.”
살아남은 일곱 상위 신 중 가장 연장자인 제이드가 회의를 주도했다.
“백신전은 단순한 신들의 집단이 아니네. 아카식 레코드에게 선택을 받은 균형을 유지하는 하나의 기둥이지.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한다면 김우진은 결코 우리를 없애지 못할 거네.”
정론이었다. 김우진에게 백신전이 어떤 짓을 했고, 어떤 분쟁이 있었고, 그로 인해 그에게 어떤 의미로 느껴지든 상관없었다.
신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백신전은 빛으로 대변되는 아카식 레코드의 사도로서 우주의 균형을 이루는 핵심 세력이었다.
그들이 사라지면 거대한 공백이 생긴다. 그리고 그 공백은 결국 김우진이 감당해야만 한다.
김우진이 과연 그걸 감당하려고 할까? 아니면 차라리 백신전을 휘하에 두고 부려먹으려고 할까? 누가 봐도 후자가 더욱 가능성이 높았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김우진은 일반적인 존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네만.”
김우진이 일반적이었다면 애초에 이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거다. 김우진은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괴물이다.
“그래도 일단은 최대한 자비를 구하는 쪽이 낫지 않겠나?”
“저희는 신입니다. 신의 위엄이 있지, 어찌 김우진에게 자비를 구걸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허면 죽을 텐가?”
“······.”
제이드가 혀를 찼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네. 이미 살겠다고 김우진한테 무릎도 꿇어놓고 이제와서 위엄? 그 자리에서 그렇게 말하지 그랬나?”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우리는 졌네. 완벽하게 졌어. 다시 싸워도 승산이 없고 도망도 불가능하네. 절대신에 가까워진 김우진에게서 도망친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그러면 승복해야지. 죽지 않으려면 그 방법밖에 더 있나?”
“하지만···.”
“그게 싫은 자들은 마음대로 하게. 도망치던, 김우진에게 저항하던. 김우진이 살려줄 지는 모르겠군.”
자, 어서 일어나서 나가게.
“김우진에게 자비를 구걸하는 게 싫은 자는 말이야.”
제이드가 그 말을 끝으로 침묵하며 기다려 줬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다시는 이번 일에 대해서 논하지 않는 것으로 알겠네. 이미 살고 싶어서 구걸이란 구걸은 다해놓고 이제와서 고고한 척은.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김우진에게 백신전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게 옳다고 생각···.”
그때였다.
“신이시여!”
십여 명의 집행자들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회의 중에는 함부로 발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큰일 났습니다!”
“큰일?”
“집행자들이 전부 도주했습니다!”
“···뭐라고?”
신들이 순간적으로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집행자란 그들의 권속이었다. 권속이 도주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똑바로 말해라! 집행자들이 도망갔다는 게 무슨 뜻이냐!”
“대, 대부분의 집행자들이 백신전을 벗어났습니다!”
“대부분? 한둘이 아니라?”
“이런 괘씸한 놈들이···!”
“어디냐. 내가 직접 잡으러 가겠다!”
“누구의 집행자냐!”
신들이 분노를 드러내며 질문을 쏟아냈다. 하지만 집행자들의 대답은 그들의 상상 이상이었다.
“그게···.”
“빨리 말해라!”
“2천명 정도가 전부 도주했습니다.”
“······.”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몇 명이 도망쳐?”
잠시 숨을 고른 집행자가 쐐기를 박았다.
“2천이 넘는 집행자들이 진정한 신에게 귀의하겠다며 모두 연옥으로 향했습니다!”
“······!”
“······!”
* * *
“아주 깔끔하게 해결됐어.”
“깔끔하게 해결 된 것 맞죠?”
“굳이 나를 만나지 않아도 결과는 좋잖아?”
차원 봉인은 허물어졌고 마기로 오염된 대지들은 모두 정화되었다. 용사들도 원하는 대로 해줬으니 글라크는 다시 발전할 것이다.
“앞으로 네가 원할 때마다 가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연옥으로 향했다.
“벌써 다 복구했네요?”
“릴리와 나르는 평범한 세계수가 아니니까.”
단순히 두 그루만 있어도 대단한 세계수가 잡아먹은 신만 수십이다. 그 권능은 능히 차원 안에서는 주신에 필적하니 소멸해버린 차원의 방벽을 다시 복구하는 건 조금 성가신 일에 불과했다.
“저 정도면 세계수가 아니라 우주수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
“······.”
“왜요?”
“아니, 다시는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면 해서.”
“···소장님도 그렇게 작명 센스가 대단하지는 않거든요?”
“그렇다고 해두지.”
“그렇다고 해두는 게 아니라···어?”
버럭, 소리치던 율리아가 멈칫했다. 김우진 또한 걸음이 멈췄다.
“···저건 뭐죠?”
“집행자 같은데.”
일단은.
단단하게 연옥을 감싼 차원의 방벽 앞. 거기에 상당한 인파가 몰려 있었다.
“저것들이 왜 여기 있지?”
신들과 함께 백신전으로 돌아갔을 텐데?
“설마 다시 전쟁을?”
“그런 것치고는 신이 한 놈도 없군.”
신들이 바보도 아니고 불의의 기습으로 반전을 꾀했다면 절대 집행자들만 보내지는 않았을 거다.
“미끼일 수도 있잖아요? 집행자들을 정면에 세우고 뒤에서 치는.”
“그런 것치고 신의 기척이 아예 없다.”
“그럼 뭐죠?”
“글쎄.”
“릴리랑 나르 어머니 나무도 있네요?”
율리아의 말대로 릴리와 나르가 차원의 문을 열고 나와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입장. 한 줄로. 차례 차례.
- 낑낑!
“자, 모두 어머니 나무님들의 말씀에 따르세요. 절대신님은 그 위용에 걸맞게 관대하고 품이 넓으신 분입니다. 오는 신도를 거부하지 않으니···.”
“···디아네님도 있네요?”
“···불길한데.”
한 줄로 입장? 관대하고 품이 넓어? 거부하지 않아?
불길한 촉이 딱 왔다.
그 순간, 릴리의 고개가 팍 돌아갔다. 시선이 정확히 김우진에게 꽂혔다.
- 왔어!
릴리가 소리쳤고.
“여러분! 저기 이 우주의 유일무이한 신! 더 없이 찬란하고 고귀하시며 아름답고 우월하신 절대신께서 오셨습니다!”
디아네가 김우진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집행자들의 이목이 일제히 쏠림과 동시에.
“오셨다!”
“진정한 절대신이시여!”
“불쌍한 저희들을 받아주십시오소서!”
“저희는 가짜들에게 속고 있었습니다!”
“방황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절대신이시여!”
이천의 광신도들이 돌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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