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113화 (113/150)

# < 112. 이렇게까지 >

차원, 글라크.

수많은 차원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최악의 종말을 맞이한 차원이자, 김우진이 용사로 있던 차원.

수백의 용사들이 종말을 막기 위해 스러져 갔고 종말 이후에는 신들의 수작에까지 말려 대륙 대부분이 죽음의 땅이 되어버린 곳.

“역시 아직 멀었군.”

대륙의 90%이상이 마기로 침식되어 인류가 살아갈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었다. 차차 정화해 나간다고 한들 40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김우진과 율리아가 떨어진 곳은 그런 곳이었다.

대지가 마기로 물들어 죽어버린 땅. 어떤 생명체도 살아가지 않는 볼모지.

딱-

김우진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백염이 대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뭐하시는 거예요?”

“마기를 태워버리는 거야.”

흔히들 정화라고 한다.

“그런 것도 가능하세요?”

“쉬운 일이다.”

불꽃을 통하지는 않지만 율리아도 신인 이상 가능은 하다. 다만, 김우진처럼 손쉽게 전 대륙을 정화할 수는 없겠지.

“그런데 이상해요. 마물도 한 마리도 느껴지지 않아요.”

“전부 처리했을 테니까.”

신들이 권능까지 써가며 차원 자체를 봉쇄했기에 추가적인 마물의 유입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마물들은 본능적으로 생명에 이끌린다.

40년이라는 세월은 대륙에 남아 있던 모든 마물들이 마지막 인류의 생존자들에게 이끌려 토벌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는 거다.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마물이 없다는 건 그들을 토벌한 이들이 있다는 거고 그건 그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니.

“방향은···저쪽이네.”

예상대로 모든 게 죽어버린 세상에서 유일하게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 있었다.

“꽤 머네요.”

“네가 평범한 엘프라면 멀겠지.”

하지만 차원과 차원을 넘나드는 신에게 있어 한 차원의 거리는 아주 작은 편린과 다를 바가 없었다.

김우진과 율리아가 한 걸음 걸었다.

공간이 뒤틀렸다. 시커멓게 죽어버린 대지는 사라지고 저 아래 인류의 흔적이 보였다.

번성한 도시와 가득한 사람들.

“잘 살아있네.”

적어도 글라크에 관해서는 백신전은 약속을 지켰다.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인지라 당연히 지킬 수밖에 없었겠지만 단순히 계약서를 믿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또 다르니까.

대륙은 평화로웠다.

마물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인류를 공격하는 다른 위협도 없다.

생명력이 남아 있는 땅의 절반가량이 인간의 손에 정복되지 않은 몬스터들의 대지이긴 하지만 글라크라는 차원이 몬스터들과 공생하는 차원이다 보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세이드는 어디 있을까요?”

“글쎄.”

김우진과 율리아는 단순히 도시 하나가 아니라 살아남은 모든 인류의 모습을 확인했다.

네 개의 인간 왕국과 하나의 엘프 왕국.

“여전히 종말이 진행 중이라면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겠지만 보다 시피 종말은 끝난 지 오래라.”

“익숙한 엘프 왕국에 있지 않을까요?”

“그거야 물어보면 그만이지.”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널리고 널렸어.”

수십년 간 인류의 희망으로 활약해왔던 김우진이다.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지금 있는 왕국의 왕만 찾아가도 김우진을 알아볼 거다.

“하긴, 그래 보이긴 해요. 저렇게 사방에 얼굴이 있으니 못 알아보면 그게 더 이상하겠네요.”

율리아가 킥킥 거리며 웃었다.

“글라크의 영웅! 좀 크다 싶은 도시마다 황금 동상이 하나씩 세워져 있으니 좋으시겠···아악! 아파요!”

“아프라고 때린 거니까 당연하지.”

김우진이 혀를 찼다. 솔직히 저 동상은 좀 낯부끄럽긴 했다.

어쨌든 지금의 위치가 좋았다.

“비엔데르크라. 그리운 이름이군.”

비엔데르크의 국왕도.

비엔데레크의 젊은 왕은 꽤나 괜찮은 사람이었다. 김우진과 용사들의 희생과 활약을 인정하고 최대한 대우를 해주려고 했었지.

인간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자기 동생을 김우진과 어떻게든 엮으려 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물론 이해는 한다. 상황이 워낙 암울하니 어떻게든 잡고 싶었겠지. 그에 대한 악감정은 딱히 없다.

“따라와.”

“네. 그런데 왕궁 안에도 소장님의 조각상이 있겠죠? 황금? 아니죠. 왕궁이니까 다이아로 만들어놓지 않았을까요?”

“매를 버는 주둥이군.”

김우진과 율리아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정오가 지났다.

하늘은 청명하니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딸각-

바이른은 씁쓸한 커피를 음미했다. 달달한 다과와 함께 하니 제법 잘 어울렸다.

“오늘 날씨가 좋네요, 폐하.”

“둘이 있을 때는 오라버니라 불러도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왕실의 법도가 있는데 어찌 그러겠어요.”

“평화롭구나.”

산들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간지럽혔다. 이렇게 여유로운 티타임이라니. 40년 전만 해도 꿈도 못 꾸는 일이었다.

“다 그분 덕분이죠.”

“그래.”

동생의 말에 바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밥을 먹을 때도, 편안하게 잠을 잘 때도, 단순히 살아서 숨을 쉬는 것에도 언제나 감사함을 느낀다.

그날 차원을 침공한 수백만의 마물의 파도는, 그리고 그 마물들을 홀로 막아내는 영웅의 모습은 평생이 가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깊이 각인되었다.

지금의 인류는 그의 희생 위에 만들어졌으니 평생이 가도 갚지 못할 빚을 졌다.

“···살아계시겠죠?”

“모르겠구나.”

신과의 거래를 한 간이 큰 인간이었다. 바이른은 김우진에게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으나 설마 그가 그렇게까지 자신들을 지켜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하지만 감사함과는 별개로 당시 신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김우진 하나를 잡기 위해 마물들을 이용할 정도였으니까.

아마 살아 있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군요.”

동생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늙으셨군요.”

그때, 불연 듯 끼어드는 목소리에 바이른의 심장이 덜컥 가라앉았다.

늙긴 했으나 종말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그도 수준급의 검술을 익힌 기사였다. 바로 옆에 누군가 다가오는데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눈이 크게 뜨여졌다.

‘암살자?’

대체 누가?

설마 종말이 끝났다고 다시 패권 전쟁을 벌이고자 하는 쓰레기가 있었나?

아니, 지금의 왕들은 그렇게 아둔하지 않았다. 결코 그럴 만한 인간은 없을 터인데.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거늘, 누가 감히···.”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김우진?”

검은 머리, 검은 눈. 특유의 익살스러운 눈매와 분위기까지.

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는 김우진이었다. 글라크를 구원하고 신들에게 잡혀간 인류의 영웅.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사약 같은 구정물을 왜 먹냐고 하시더니 이제는 커피를 즐기시는 것 같군요.”

“···누구 덕분에 먹기 시작했는데 향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진짜인가? 아니면 환상인가?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의 마법인가?

“아이닌 전하도 오랜만입니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대체 어떻게?”

쨍그랑, 아이닌이 들고 있던 찻잔이 바닥과 찐한 만남을 가지고 본래의 형태를 잃어버렸다.

따악-

김우진이 손가락을 튕겼다. 마치 시간이 되돌아가듯, 부서진 조각과 차들이 다시 떠올라 온전히 아이닌의 손에 들렸다.

“···맙소사.”

“···재주가 늘었군. 자네, 진짜인가?”

“그 누구도 저를 흉내 낼 수는 없습니다.”

“···확실히 이 글라크에 그런 간 큰 놈은 없긴 하다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신들에게 잡혀간 것이 아니었나?”

“잡혀갔었습니다만, 다 때려 눕혀주고 왔습니다.”

“신들을 말인가?”

“신들을 말이죠.”

“···말투로는 김우진이 맞는 것 같은데.”

“맞습니다. 의심하지 마세요. 믿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미치겠군.”

바이른이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혼란스러워 터질 것만 같았다. 확실한 건 진짜든 가짜든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그와 아이닌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솔직히 무슨 짓을 해도 못 믿기 힘드네. 자네 같으면 신에게 잡혀갔던 인간이 40여년 만에 돌아와서 신들을 다 때려눕히고 왔다는 말을 하면 믿겠나?”

“폐하와 저의 첫 만남을 이야기해도 말입니까? 보름달이 뜬 밤이었습니다. 그때 폐하께서는 왕실의 정원에서···.”

“믿겠네!”

“더 말할 수 있습니다만.”

“그 사실을 자네와 나 말고 누가 알고 있단 말인가!”

김우진이 능글맞게 웃었다.

“그럼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네. 자네가 살아 돌아온 걸 알면 대륙의 뒤집어지겠군.”

“고작 저의 생환으로 뒤집어지면 큰일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일을 가지고 왔으니.”

“···자네가 큰일이라고 하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니 제발 그런 농담은 말게.”

“그런데 정말 자네 맞나?”

“아직도 믿음이 부족하시니 증명할 수밖에 없군요. 그날 폐하께서는 탈로스 후작가의 여식이던···.”

“난 이미 믿음이 충만하네!”

황급히 김우진의 입을 막은 바이른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저 엘프는 누군가? 혹시 자네의 연인인가?”

“신입니다.”

“···뭐라고?”

“저도 신이 됐고요.”

정확히 신은 아니지만 비슷하다.

김우진이 감추고 있던 힘을 드러냈다.

“어떻게, 믿음에 조금 더 확신이 가십니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위압감과 신성함, 경외감에 왕과 왕녀가 경악했다.

* * *

김우진은 그들과 회포를 풀었다. 호화로운 만찬과 술이 함께였고 오직 네 명만이 참가한 작은 연회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포식으로 신들의 힘을 흡수해서 다른 신들을 힘으로 찍어 눌렀다는 건가?”

“네.”

“우주의 운명을 건 대전쟁이 있었고 자네가 그 승자가 되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상대가 자네가 아니었다면 감히 왕을 능멸한다고 벌을 줬을 거네.”

“이해합니다. 저도 사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거든요.”

“···신이라니. 경어를 해야 하나.”

“아닙니다. 신이라고 제가 달라진 건 아니니까요. 그냥 예전처럼이면 족합니다.”

“영광이군. 아마 나 같은 인간은 또 없겠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평생 없을 겁니다.”

“크흐흐흐, 이게 인맥의 힘인가.”

바이른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이야기는 점점 더 풍성해졌다. 김우진이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하기도.

“프하하하, 그러니까 그때 나를 협박하고 자네를 끌고 갔던 그자가 그렇게 추하게 죽었단 말인가?”

“신이라고 해봐야 결국 좀 강한 지성체일 뿐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죠.”

“신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건 자네 뿐일 거네.”

“뭐, 그만큼 많이 겪어봤으니까요.”

“결국 그놈이 우리를 절망을 밀어 넣은 주체라는 건데 그 꼴을 내가 직접 보지 못한 게 아쉽군. 마물들로 죽은 자들 또한 통쾌해 할 거네.”

바이른이 글라크의 지난 40여년을 풀기도 했다.

“여기는 별 다른 일이 없었네. 그냥 일상을 되찾고 살아가고 있었지. 인구가 워낙 줄어들고 활동 반경도 턱 없이 적어졌지만 살아남았음에 다들 감사하고 있었네. 황금 동상? 그야 당연히 자네를 기리기 위한 것이지. 영웅 아닌가, 영웅!”

“아무리 제가 낯짝이 두꺼워도 도시마다 하나씩 세워놓으면 무슨 독재자 같잖습니까.”

“뭐, 이곳 비엔데르크 왕국에 비엔데르크 역대 왕과 영웅들을 다 합친 것보다 자네 동상이 더 많긴 하네. 근데 다 자발적으로 세운 거네. 자네 덕에 살아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으니까. 우리에겐 자네가 신이거든. 근데 진짜 신이 되었다니 신앙을 퍼트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제발 그것만은···.”

연옥에 있는 광신도가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질색하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김우진이군!”

김우진과 바이른이 회포를 풀고 있을 때, 율리아는 아이닌 왕녀와 함께였다.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절 아시나요?”

“알다마다요. 세이드 공이 절대 몸에서 떨어트리지 않는 목걸이 사진의 주인공이잖아요?”

“···그걸 계속 착용하고 다녔어요?”

“물론이에요. 반드시 돌아가서 돌봐줘야한다고 얼마나 아끼던지. 아, 김우진 용사님이 그 사진을 보고 예쁘냐고 물어보기도 했어요.”

“네?”

“뭐, 그냥 두 분이서 매일 주고받는 장난 같은 느낌이었지만요. 어쨌든 설마 그분이 직접 이곳으로 올 줄은 몰랐네요. 세이드님이 보면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사실 그것 때문에 이곳에 먼저 왔어요. 세이드는 어디 있나요? 살아있는 거 맞죠?”

“걱정 마세요. 아주 건강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 세이드님은···.”

* * *

해가 떴다.

“일어났어요?”

눈을 뜨자 보석과도 같은 녹빛의 눈동자가 코앞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글거리는 입가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언제 일어나셨습니까?”

“한참 전에?”

“왜 깨우시지 않고.”

“곤히 자는 사람을 어떻게 깨워요. 매일 같이 고생하는 걸 아는데.”

“몇 시입니까?”

“왕국의 기사단장이 곧 출근할 시간이죠.”

여인이 기지개를 피며 일어났다. 밍기적 거리는 세이드의 이마와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어서 일어나요. 곧 시종들이 올 테니.”

“···한 번만 더.”

“이럴 때 보면 애랑 다를 바가 없네요.”

“전하 앞에서만 그렇습니다. 사랑합니다. 오늘은 더 사랑스럽군요. 그 어떤 꽃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어머.”

세이드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시종들이 곧 오는데.”

“그럼 오기 직전까지만 이대로 있죠.”

세이드가 침대에서 일어나기까지 5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아니에요!”

율리아가 부정했다.

“세이드가 죽지 않기를 바랐고 세이드가 괜찮기를 바랐지만···!”

결코.

“이렇게까지 행복하기를 바란 건 아니라고요!”

“뭐냐, 그 놀부 심보는? 가족이라며?”

“가족이니까 이러죠! 가족의 연애를 지켜보는 제 입장도 생각해주세요! 그 무뚝뚝한 세이드가 저런 애교라니! 못 볼꼴을 봤어요!”

“···그건 동감이다.”

우엑, 김우진과 율리아가 헛구역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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