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1. 날 잊어? >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신들이 죽었다.
‘주’신들이 죽었다.
그 어떠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완벽한 소멸.
주신들의 승리를 자신하던 신들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주신들이 졌다. 정말로?
백번 양보해서 알비츠는 패배할 수 있다. 그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니까. 저 어둠의 사도는 칼카르를 죽인 전례가 있으니까.
하지만 베리안은, 김우진은 아니었다.
아무리 김우진이 여러 신들을 죽인 괴물이라고 해도, 신들인 그들조차 함부로 할 수 없다고 해도.
베리안은 주신이었다. 아카식 레코드의 힘과 권능을 얻어 주신을 초월한 자였다.
그들의 상식선으로 베리안이 진다는 것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벌어졌다.
“···이제 어떻게 하지?”
“······.”
“···정말로 베리안님이 졌다고?”
“······.”
머릿속이 새하얗게 된 그들은 어떤 대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현실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말을 버벅이며 눈을 깜빡였고 쉴 새 없이 현실을 부정했다.
그러길 한참, 뒤늦게나마 현실을 자각한 신들이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도망치자.”
“베리안도 이기지 못한 놈을 우리가 무슨 수로 이겨?”
“하지만 어디로? 백신전에는 마물들이 오고 있다.”
“어디로든! 그렇다고 이대로 김우진에게 죽을 수는···!”
하지만 너무 늦었다.
───!
번개가 내리쳤다.
“가짜들이 모여서 작당모의를 하는 모습을 보니 귀가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한때는 백신전을 섬기는 집행자였으나 진짜 신을 목도하고 개종한, 종국에는 본인조차 신이 된 광신도가 신들의 진로를 가로 막았다.
“이적을 목도했다면 당연히 무릎을 꿇고 신께 참배를 올려야 마땅합니다. 헌데 도망칠 궁리를 하다니. 아직도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습니까?”
“디아네!”
“이 배신자가!”
“배신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신을 영접하고 제대로 된 분을 섬기기 시작한 것이지요.”
소장주신께서는 제 믿음에 보답해주셨습니다.
“당신들이 가짜고 저분이 진짜라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주셨죠.”
신은 전지전능하다. 그렇기에 패배를 모른다. 패배한 신은 신이 아니다. 겁을 먹고 꼬리를 마는 자들도 신이 아니다.
“그럼에도 늦지 않았습니다. 신께서는 자비가 넘치시니 지금이라도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십시오.”
“닥쳐라! 집행자 따위가 신이 되었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구나. 감히 주제도 모르···!”
발끈하여 소리치던 신의 얼굴에 주먹이 떨어졌다.
콰앙, 소리와 함께 그의 신형이 사방으로 굴렀다.
신들이 경악했다. 반응을 하지 못했기에, 주먹이 날아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주제도 모르는 건 네놈들이지.”
주먹의 주인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드네르바···? 어째서?”
“드네르바?”
“···설마.”
“표정 볼만하네. 그 특유의 오만한 얼굴을 유지해야지. 그게 신으로서의 위엄이잖아?”
아군이라 여겼던 백신전의 신, 드네르바가 그 주인이었다.
그녀는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로 손을 탁탁 털었다.
“드네르바! 네 년, 설마 백신전을 배신한 거냐!”
“이쪽의 말을 빌리자면 진정한 신앙을 찾은 거지.”
“백신전에도 진실된 눈을 가진 분이 계셨군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오래 전부터 김우진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그 종을 자처한 자!”
“네 년! 신으로서의 자각이 없는 거냐!”
“자각은 지랄. 그 잘난 위엄 가지고 뒤지시던가. 알비츠는 고사하고 베리안까지 뒤졌는데 정말 아직까지도 상황 파악이 안 돼?”
“이익···!”
“오냐, 널 먼저···!”
신들이 살기를 드러냈으나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아직까지도 싸울 의지가 있으신 분들이 많네요.”
어느샌가 다가온 여섯의 신들이 그들을 포위했다. 고작 여섯이고 이쪽은 수십이었다. 뚫으려면 얼마든지 뚫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베리안이 아주 좋아하겠군.”
시선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는 남자의 존재감이 모두를 압도하기 때문에.
신들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먼저 간 자기를 따라가겠다는 충직한 놈들이 이렇게 많으니.”
“···그건.”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꿇어, 이 새끼들아!”
빠악, 드네르바의 거친 손길이 한 신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엎어졌고 그게 시작이었다.
신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알비츠가 죽고, 스스로를 절대신이라 칭하던 베리안이 신들조차 범접할 수 없는 전투 끝에 죽은 시점에서 그들에게 저항 의지라는 것은 아주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정한 신을 배알합니다.”
“···항복하겠습니다.”
김우진은 말 없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아.”
김우진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고 보니 너가 있었지.”
“···날 잊었어?”
명색이 신인데?
“내가 안에서 줄 수 있는 정보는 다 줬는데?”
다리에 힘이 풀린 드네르바가 털썩, 주저앉았다.
* * *
“···이겼나?”
내가? 정말로?
그 오만한 신들이 무릎을 꿇고 항복한다.
- 승리!
- 끼잉!
릴리와 나르가 양 옆에서 승리를 외치며 기뻐하고.
“소장주신이시여, 마침내 가짜들을 토벌하고 진짜 주신의 위엄을 바로 세우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진짜로 이겼어요!”
“진짜로 주신을···!”
그가 직접 신으로 만든 이들이 그가 진정으로 승리했음을 알려준다.
“···정말로 이겼다.”
“자유다!”
복수에 성공한 거인이 환희에 젖고 더 이상 도망자 신세가 아니게 된 도마뱀이 기쁘게 포효했다.
무엇보다.
김우진이 눈을 감았다. 그에게 패배를 선사하기 직전까지 갔던 베리안의 잔재가 그의 심장 속에서 꿈틀 거린다.
지금까지 흡수했던 어떤 신과도 비교가 불가능한 거대한 힘은 막대한 충만감을 준다.
모든 사실들이 그가 승리했음을 알려준다.
여전히 실감하지 못하는 김우진에게 현실로 자각시킨다.
이겼다. 정말로 이겼다.
- 괜찮?
“그래, 고마워, 릴리.”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 했으나 눈치 빠른 릴리가 가지를 뻗어 의자를 만들어주었다.
“···하하.”
모든 요소들이 승리를 확신해주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현실감이 없다.
40년이다. 무려 40년.
그때부터 신들에게 복수할 기회만을 꿈꾸며 살아왔다. 그것이 한 순간에 끝났다는 것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소장님. 무슨 말씀이라도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율리아의 속삭임에 김우진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던 수십의 신 뒤에는 어느새 천 단위의 집행자들이 늘어져 있었다. 그들이 일제히 김우진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은 꽤나 장관이었다.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해야 잘 처분했다고 소문이 날까.”
김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신과 집행자들이 바르르 몸을 떨었다.
“어떻게, 아직도 내가 하찮은 피조물로 보이나?”
“···아닙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건 네놈들이 그렇게 낮잡아 보단 피조물들과 똑같고.”
“······.”
“네놈들에게 원한을 가진 놈들이 한 둘이 아니야. 사실 여기까지오는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지.”
데이드람의 세계수가 신들의 행태에 반발감을 가지지 않았다면.
알베니우스가 살기 위해 그들에게 저항하지 않았다면.
두리쉬마가 저들을 백신전에 복수하고자 하지 않았다면.
율리아와 릴리는 김우진의 품으로 오지 못했다.
신들을 봉인하여 연옥의 힘 자체를 강화하지도.
두리쉬마와 함께 칼카르를 죽이지도 못했다.
“이런 게 업보지.”
결국 백신전의 멸망은 전부 백신전이 뿌려놓은 똥들이 역류한 꼴이었다.
본인들은 납득하지 못하겠지만 이미 결판이 난 상황에서 저들의 납득 같은 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김우진이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 그래서 독단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해서도 안 되고.
“모두 얌전히 백신전으로 돌아가 처분을 기다려라. 조만간 직접 가서 네놈들을 어떻게 할지 알려줄 테니.”
“···예.”
“아, 나 같은 놈에게 고개를 숙이기 싫은 놈은 도망쳐도 좋다. 우주 끝까지 쫓아가서 잡아낼 테니. 변방의 종말 차원도 결코 안전한 도피처가 되지 못할 거다.”
“···그런 무모한 자는 없을 겁니다.”
반발은 없었다. 모든 신과 집행자들이 추레하게 물러났다.
패배자다운 모습이었다.
* * *
“나는 이제 저놈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가장 거지같았던 주신 놈들은 싹 다 뒤졌고 나는 더 이상 쫓기는 몸이 아니게 됐으니까.”
만족한 알베니우스의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꽤 긴 시간을 쫓겨 다녔음에도 초탈한 신선 같았다.
그냥 단순한 건가.
“저도 크게 상관없어요. 사실 세이드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살아 있고 복수도 할 만큼 했으니까요.”
율리아는 복수의 의미가 퇴색 됐고.
“소장주신께서 소장주신이 아니라 진정한 주신으로 우뚝 서셨으니 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따르겠습니다.”
광신도는 김우진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크흠, 복수? 그것보다는 그러면 이제 마력포는 더 못 만드는 건가?”
“만들어서 쓸 곳도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준비하라.”
“그냥 전쟁 준비가 하고 싶은 건 아닙니까?”
“날 뭘로 보고!”
난쟁이는 더 달콤한 꿀단지에 관심을 빼앗겼으며.
“아직 신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습니다!”
“싸우게 해줄게.”
“그럼 좋습니다!”
짐승은 싸울 수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았고.
“···뭐, 내가 살인귀도 아니고. 학살을 주도한 케이룸 아니, 베른도 그 위의 주신들도 모두 죽었으니 이 정도면 만족해.”
“다행이네요.”
엘프는 엘프답게 적당한 선에서 타협했다.
“···제가 필요 했었는지 솔직히 의문입니다만, 일단은 싸웠으니 평생 전 차원의 식재료들을 주셔야 합니다.”
“노력해보지.”
“그리고 강민식도 제 조수로 주십시오.”
“갑자기 저를요?”
“왜지?”
“강민식의 독은 아주 귀중한 식재료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제 독은 신조차 죽이는 극독! 감히 음식 따위로 쓸만한 물건이 아닙니다!”
“내 손에 걸리면 극독이고 나발이고 다 식재료야!”
“제 독이면 당신이라도 죽습니다!”
“어디 해볼까?”
“얼마든지요!”
“···너희 둘의 문제는 너희 둘이 알아서 해결해라.”
두 인간은 복수고 나발이고 서로 투닥거리기 시작했고.
“마음 같아서는 전부 죽이고 싶다만, 주신놈들을 죽이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거인은 드래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우진 다음으로 큰 역할을 했던 두리쉬마는 복수의 화신 그 자체였다. 때문에 백신전의 모든 신들을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할 거라 여겼는데 의외였다.
“정말로요?”
“아니.”
아니었다.
“그놈들이 내 동족들에게 했던 짓을 생각해보면 당연히 다 죽여 버리고 싶다. 그런데 네가 그걸 원치 않지. 그렇지 않나?”
“제 마음은 또 어떻게 아시고?”
“뻔하지 않느냐. 너는 패권이나 우주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자기 하나의 일신에만 신경이 가 있지. 저 도마뱀처럼.”
“비교 대상이 알베니우스님이면 좀 심한데요.”
“사과하지.”
“···저기? 나 앞에 있는데?”
“아무튼 내가 널 오래보지는 않았지만 확실한 건 넌 귀찮은 걸 싫어한다. 당연히 백신전이 무너지고 무주공산이 되는 세상은 원치 않을 테지. 만행은 만행이나 백신전이 우주를 지탱하는 한 축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으니.”
정확했다. 막나가기는 했지만 백신전은 빛으로 대변되는 아카식 레코드의 한 축이다.
그들이 없으면 어둠은 끊임없이 증식하며 세상을 물들여 갈 것이다. 좆같은 놈들이지만 필요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이 이 우주의 법칙이자 균형이니까.
“나도 마찬가지다. 어둠의 사도인 이상, 나는 군단을 이끌고 차원들을 침공해야만 한다. 힘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지게 된 숙명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와 싸울 바에는 반쯤 부스러진 백신전과 싸우는 게 백 번 낫단 말이지.”
“감사합니다.”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니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두리쉬마의 말대로였다.
백신전을 멸망시키면 거대한 공백이 생긴다. 필연적으로 혼란이 일어나는데 그 혼란을 수습할만한 사람은 결국 김우진뿐이다.
그리고 김우진은 그런 귀찮은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백신전의 세 기둥이 죽었고 제외하고도 30가량이 죽었다. 백신전은 거의 재기가 불가능한 수준의 피해를 입었으니 충분하고도 남는 전과였다.
“···그러면 다 동의한걸로 알고 백신전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네.”
- 나는?
- 낑?
두 세계수가 테이블 위에 올라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김우진을 바라보았다.
김우진은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너희는 뭘 어떻게 하고 싶은데?”
- 차원. 더 크게!
- 끼이이이!
“차원을 합치고 싶다고?”
- 응!
- 낑!
“좋아. 그렇지 않아도 딱 적당한 차원이 하나 있거든.”
곧 공석이 될 아주 마나가 풍부한 백신전이라는 차원이.
신들이야 뭐, 살고 싶으면 방이라도 빼야지.
“아, 그리고 율리아. 넌 나랑 갈 곳이 있어.”
“어디요?”
“세이드.”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이 사라졌다. 당연히 글라크를 감싸던 방벽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세이드 보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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