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111화 (111/150)

# < 110. 청출어람 >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베리안은 태초에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았다.

그는 최초의 초월자였고 최초의 신이었으며 주신이자 절대신이다.

세 명의 주신 아래 이루어진 백신전의 체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관리자라고 불림에도 마음한구석으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가 싫었다.

아카식 레코드.

우주의 의지가 그를 선택해준 것은 감사한 일이었으나 목줄을 찬 개와 같다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임에도 하위 차원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신임에도 다른 자들의 눈치를 봐야한다.

신임에도 인간과 다를 바 없는 군상들을 봐야 한다.

신임에도, 신임에도, 신임에도!

그게 어떻게 신인가.

그게 어떻게 절대자인가.

신이란 지고한 존재다.

신이란 위대한 존재다.

신이란 유일무이한 존재다.

한 단계 아래라고 한들 신이라 불리는 이들이 97명이 존재하며, 같은 선상의 주신이 2명이나 더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신 위에 아카식 레코드라는 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김우진 같은 피조물이 관리자라고 불러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완전히 의혹을 떨쳐버리지 못함이다.

그래서 김우진을 이용했다.

백신전에 혼란을 주고, 그 틈에 아카식 레코드를 흡수해 진정한 절대신으로 거듭날 생각으로.

“네 역할은 거기서 끝이다! 여기까지야. 이 앞은 네가 설 자리가 없단 말이다!”

생각 이상으로 날뛰어 칼카르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이 당했으나 소기의 목적은 이루었다.

완벽하지는 않으나 아카식 레코드의 일부를 취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명확했다.

백신전의 반역자, 김우진을 참살하고 그 무리를 소탕한다. 그리고 신들의 떠받듬을 받으며 절대신으로 군림하고, 동시에 아카식 레코드를 완전히 그의 것으로 만든다.

그러면 된다. 그래, 그러면 되었을 텐데···

어째서.

“네까짓 놈이 끝까지 내 앞으로 가로 막으려 하냔 말이다!”

빛이 폭발한다.

아카식 레코드와의 연결이 끊어진 빛은 한층 바래져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을 소멸시킬 정도로 거대하다.

문제는 빛에 대응하는 염화는 바래진 빛으로는 잡기 힘들다는 거다.

화륵-

불꽃이 빛마저 불태운다. 빛을 재물 삼아 더더욱 화려하게 불꽃을 피워낸다.

“나는 절대신이다! 모두가 내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해! 너도 예외는 아니다, 김우진!”

“세상에 다시 없을 정도로 초라한 절대신이군. 그럼 나는 아카식 레코드쯤 되려나?”

여유가 있을 때는 듣기 좋았던 김우진의 입담이 지금은 더 없이 그의 분노를 자극했다.

“이 쓰레기 같은 놈이···!”

입술을 짓이기며 김우진을 노려보았다, 그의 어깨 위에 앉은 세계수의 정령이 보였다.

“···그래. 세계수.”

모든 원흉이 저것이었다. 저것만, 저놈만 죽여 버린다면 모든 게 원래의 순리대로 돌아온다.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다시 사용할 수 있으며, 김우진은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니 나무를 불태우면 된다. 나무를.

이를 악문다. 눈에 핏발이 선다. 바닥까지 긁어낸 신의 힘이 토해진다.

────!

신이 만들어낸 마지막 섬광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김우진을 넘어 간신히 열기에 저항하고 있는 거대한 나무로 향한다.

“감히 신에게 대항한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죽어라! 멍청한 나뭇가지여!”

“멍청한 건 네가 아닐까?”

하지만 빛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불꽃이 나무와 빛 사이를 가로 막는다.

“내가 눈앞에 있는데 그걸 지금 가만히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했어?”

- 했어?

“신이라는 새끼가 참 멍청하네.”

- 멍청이.

릴리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따라온다.

불꽃이 빛을 따라 번져온다.

빠르게, 하지만 확실하게. 빛을 좀 먹으며 전진한다.

“이건 말도 안 돼···!”

어째서 저런 버러지 따위에게?

어째서 고작 이따위 불꽃에 그의 빛이?

겨우 세계수가 조금 도와줬다고?

어째서, 어째서···!

“말이 안 된단 말이다!”

핏발이 선 베리안이 발악하듯 외쳤다. 일시적을 빛이 더욱 밝아졌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불꽃이 그의 주변을 완전히 잠식했다. 남은 것이라고는 본신을 보호하는 아주 미약한 일부.

한 때는 주신이었고 스스로를 절대 신이라 자부하는 자의 권능치고는 더 없이 초라했다.

“말이 안 되긴.”

권능은 더 큰 권능에 먹힌다.

그게 상식이다. 그게.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순리잖아?”

그러니 릴리로 인해 아카식 레코드와의 연결이 잠시 끊어진 베리안이.

그로 인해 열 명의 신을 먹은 김우진보다 권능의 힘이 약한 베리안의 빛이.

김우진의 불꽃에 잡아먹히는 것은.

더 없이 당연한 상식이다.

- 상식. 순리!

- 뜨거, 안 순리.

- 안 뜨거, 순리!

릴리가 날개를 퍼덕였다.

“그러니 곱게 가. 네가 좋아하는 순리대로.”

패배자에게는 죽음을.

그것보다 확실하고 명확한 순리가 어디 있어?

불꽃이 베리안을 집어 삼켰다.

* * *

불꽃이 사그라든다.

열기가 식는다.

눈을 멀게 할 정도의 강렬한 빛이 함께 사라지고, 가려져 있던 두 개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낸다.

“말도 안 된다···!”

반쯤 녹아내린 육신.

“말도 안 된다고···!”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졌고 나머지 부위가 모두 불타 오직 상반신의 일부만이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베리안은 죽지 않았다.

스스로를 절대 신이라 칭할 만큼의 힘을 가졌기에 그랬다.

“나는, 나는 신이다! 아카식 레코드마저 내 발아래 둔 절대적인 신!”

그럼에도 이 꼴은 무엇인가. 온 몸이 불타는 듯한 이 끔찍한 고통은 무엇인가.

어째서 그가 이런 상태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신이었고 신은 당연히 승리해야만 한다.

비록 일부긴 하나 아카식 레코드까지 얻었으니 더욱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어째서, 대체 어째서 자신은 추레한 꼴로 바닥을 기고, 저 놈은 저리 오만하게 자신을 내려다 볼 수 있는가.

“신이 약골이군.”

“감히, 감히 너 따위가 나를 내려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너 따위가 아니지.”

콰득-

김우진이 베리안의 가슴을 짓밟았다. 그가 거친 비명을 토해냈다.

“너의 그 신념자체는 인정하지. 그 상태가 돼서도 절대 신이라고? 물론, 작명 센스는 거지같지만.”

- 거지!

릴리의 부리가 베리안의 이마를 쪼았다.

“하찮은 나뭇가지 따위가 감히···!”

“그러면 그 나뭇가지 때문에 패배한 너는 하찮은 수준도 못 되는 거 아닌가?”

“김우···!”

커헉, 목이 밟힌 베리안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다 끝났다, 베리안. 그 상태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으면 내가 무릎이라도 꿇어주지.”

“김우진!”

“내가 김우진이라는 거 여기에 모르는 사람도 있나?”

“김우진!”

“너도 알고 있잖아.”

발의 힘이 더욱 강해진다. 가해지는 압력이 증가하자 베리안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진다.

“네가 졌어.”

“닥쳐라!”

“칼카르도, 알비츠도, 너도. 전부 끝났다고.”

“나는 패배하지 않는다! 나는 아카식 레코드를 손에 넣은 지고지순한 절대 신이다!”

“그럼 나는.”

화륵-

불꽃이 다시금 열기를 발했다.

천천히 베리안의 몸에 달라붙었다.

“그 위인가 보지.”

절대 신을 죽일 테니까.

“···넌 결코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거다!”

“내가 원하는 게 뭔데?”

없다.

“나는 너처럼 세상을 다스리는 걸 원하지도, 아카식 레코드를 먹길 바라지도, 절대 신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아.”

그냥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차원을 구하고 지구로 돌아가고 싶은 나를 막은 게 누구였지?”

“나를 연옥에 가두어 둔 건?”

“그리고 이제 와서 날 죽이려고 한 건?”

이 모든 일의 원흉은 결국 신이다.

“네놈들이 나를 용사로 소환했기에 싸웠고.”

“네놈들이 글라크를 버리려고 했기에 난 살기 위해 발악했고.”

“네놈들이 내 노력과 삶을 없던 것으로 만들려고 했기에 거부했으며.”

“네놈들이 날 이곳에 가두어두고 결국에는 죽이려고 했기에 맞서 싸웠다.”

세 주신이 죽고 백신전이 붕괴한 시점에서 김우진의 목표는 이루어졌다.

“이제 난 자유야.”

“고작, 고작 그런 것 때문에···!”

“그 고작을 지켜주지 않은 게 네놈들이었어.”

“네놈 때문에 백신전이 붕괴했다! 이 우주의 균형이 어그러졌단 말이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네놈이 날 죽이려고 그 지랄을 해서 그런 거 아니야.”

“저주하겠다! 죽어서도 너를···!”

“그래, 열심히 해봐.”

“아카식 레코드와의 연결이 흐릿해지지만 않았어도···! 저 세계수만 아니었어도!”

절규와 함께 백염이 베리안을 완전히 뒤덮었다.

불꽃은 한참이나 타올랐다.

한참이나.

* * *

“···정말로 이겼군.”

두리쉬마가 반쯤 녹아내린 연옥의 대지에 몸을 누였다.

열기를 견뎌내며 주신과 싸웠던 탓에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숨을 쉬고 있는 건 타이탄의 끈질긴 생명력과 어둠으로부터 받은 힘 덕분이었다.

“···정말로 이겼다.”

복수에 성공했다. 두 주신을 그의 손으로 직접 죽였으며 하나는 그러지 못했지만 결국 소멸했다.

타이탄을 멸족시킨 주체들이 모두 사라졌다.

“후련하나?”

“후련하지. 후련하고 말고.”

알베니우스의 물음에 두리쉬마가 대소했다.

흔히들 말한다. 복수는 허무한 것이라고. 적어도 복수를 이룬 지금의 두리쉬마는 그것이 개소리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이 후련함을, 오랜 시간 동안 쌓여왔던 분노가 일거에 해소되는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는 않았지만 허무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는 네놈도 입꼬리가 비실비실하군.”

“그야 당연하지. 나도 후련하니까.”

알베니우스가 팔짱을 낀 채 잔해 위에 걸터앉았다.

“네가 복수를 꿈꿔왔던 시간만큼 나도 신들을 죽이고 싶었거든.”

차원용은 개인주의가 강하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그다지 큰 유대감이 없다. 때문에 알베니우스와 복수는 처음부터 거리가 멀었다.

“드디어.”

그가 신들을 저주하고 그들에게 분노한 것은 보다 현실적인 문제였다.

“드디어 도망치지 않아도 되게 됐어···!”

자유. 그리고 평화.

더 이상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진한 해방감이 그의 머리를 지배했다.

“나는 자유다! 이 빌어먹을 신 새끼들아!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내가 승자라고!”

그가 포효했다.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 감사해야 해.”

“무슨 소리지?”

“43년쯤 전에 내가 김우진에게 투자를 안했으면 오늘 이 순간은 오지 않았을 거거든.”

“투자?”

“저놈이 처음부터 강했었는지 알아? 다 내가 가르친 거야. 내가 김우진이랑 같이 밥 먹고, 훈련도 같이 하고, 다 했어! 내가 키운 거라고!”

“그런 것치고는 스승이 너무 볼품없는데.”

“···원래 청출어람이라는 건 그런 거야. 반드시 스승이 제자보다 뛰어나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청출어람을 한 만 번은 했나 보군.”

두리쉬마가 코웃음치며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렸다. 진한 탈력감과 수마가 그를 잡아 끌었다.

“아니, 그 정도까지로 나약하지는 않지 않나? 백 번 양보해서 한 열 번, 아니 백 번 정도!”

알베니우스의 헛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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