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9. 세계수는 신이고 김우진은 무적이다 >
신들의 전투란, 권능의 싸움이다.
권능.
단순히 마나를 끌어 올려 힘을 표출하는 것과는 다른, 한 차원 이상의 이적.
평범하지 않기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기에 권능이라 불린다.
빛이 형태를 가지고, 불꽃이 얼음을 태우며, 차원과 공간을 찢고 세상을 무너트리는 힘.
그 힘의 정도가 주신마저도 아득히 뛰어넘으니 전투는 일반적인 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아카식 레코드의 권능을 일부 손에 넣은 베리안도.
수백의 용사들의 유지를 잇고, 수십의 집행자들을 삼켰으며, 열의 신들을 먹은 김우진도.
서로를 마주보고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의지대로 권능을 발현시켰다.
콰콰콰콰-
신성한 섬광이 불꽃을 소멸시킨다.
극한의 열기가 빛마저 녹인다.
콰콰콰콰!
범람하는 불꽃이 공기마저 불태우며 전진한다. 주신을 뒤덮기 직전, 새하얀 빛의 구가 주인을 지켜낸다.
들끓는 불꽃은 모든 것을 부순다. 빛은 수호한다.
폭발하듯 쏟아지는 빛줄기가 세상을 하얗게 물들인다. 김우진의 의지에 이끌린 백염이 빛마저도 삼키며 전진한다.
김우진이 한 수를 두면, 베리안이 받아친다. 빛과 불꽃이 뒤엉키며 주변을 집어 삼킨다.
붕괴한 하늘의 조각들이 떨어져 내린다.
- 뜨거···!
- 끼이이이잉!
다급히 본체를 보호하는 방어막을 형성한 릴리와 나르가 비명을 질렀다.
주신마저 초월한 신들의 싸움은 단순히 대단하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권능과 권능이 부딪히니 대지가 무너지고 공간이 일그러진다. 그 여파는 그대로 차원을 직격하며 차원의 온도를 올렸다.
그 여파로 인해 전투는 이미 소강 상태가 된지 오래였다.
연옥의 중심에서 싸우는 두 신들의 전투는, 그 여파는 같은 신이라고 할 지라도 쉽게 견디어 낼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으며 그 휘하의 집행자나 용사들은 더욱 그랬다.
불꽃과 섬광은 점점 범위를 늘려나갔고 신들은 무의미한 죽음이 아닌 생존을 택했다.
“모두 물러나라!”
“연옥을 벗어난다!”
집행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이 정도 수준이라니.”
“아카식 레코드에 정말로 간섭을 성공하셨구나.”
“아니,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얻은 주신께서 강한 것은 당연히 알겠소. 헌데 거기에 밀리지 않는 김우진은 대체 뭐란 말이오!”
그제야 조금이나마 여유를 되찾은 신들이 경악했다. 연옥을 지키는 차원의 방벽은 이미 소멸했기에 경계는 흐릿해져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태양과도 같은 열기는 신조차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능이었다.
단순히 베리안이 그것을 만들어 냈다면 이해했을 거다.
하지만 저 태양은 베리안과 김우진이 만들어내는 권능의 충돌이었다. 차원 전체를 뒤덮고 차원을 삼켜버리는 진짜 이적이었다.
“···대체 김우진이 왜 저렇게까지 강한 거냔 말이오!”
“그걸 왜 나한테 묻습니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차라리 베리안님이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해 힘을 부여 받은 게 다행입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 시체가 되어 있는 건 우리였을 테니.”
“······.”
“···다 지난 일이다. 지금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다.”
“알비츠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김우진은 절대 내버려둬서는 안 되는 놈이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김우진을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알비츠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어?”
신들이 그제야 잊어버린 주신을 찾았다.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타이탄?”
“어둠의 사도···!”
“어느 틈에?”
태양의 여파가 흠씬 미치는 곳에서 타이탄과 격전을 벌이는 알비츠를.
* * *
─!
──!
─!
쉴 새 없이 충격파가 터진다. 망치가 휘둘러질 때마다 마기와 얼음들이 바스라진다.
알비츠는 속절 없이 밀려났다.
“명색이 주신이라는 놈이 고작 이 정도인가?”
“닥쳐라···!”
“칼카르놈에 비하면 우습기 그지 없구나!”
“반역자 따위가 감히!”
최악이다.
알비츠가 이를 악물었다.
패배의 그림자가 그를 뒤덮었다.
평소라면 이럴 이유가 없었다. 두리쉬마는 단순히 마기를 몸에 두르고 휘두를 뿐이다. 그 강맹함은 능히 권능이라 불릴 만큼 파괴적이지만 그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베리안과 김우진의 권능이 뒤엉키면서 만들어낸 여파가 그를 방해하고 있었다.
신들과 차원마저 녹여버리는 가공할 열기가 그의 권능을 방해했다. 주신이기에 그 여파속에서도 버텨내며 권능을 발현시킬 수 있었지만 그게 한계였다.
얼음은 반쯤 녹아 흐물흐물했고 냉기는 아주 잠깐 반짝이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남은 것은 결국 육체적인 능력이었으나 타이탄이라는 족속들은 애초에 육체적 능력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는 족속들이었다.
“···이런 말도 안 돼는!”
약해서, 혹은 팔이 뜯겨서도 아니었다. 베리안이 그를 구속해서도 아니었다.
단순히 베리안과 김우진의 전투 여파로 인해, 알비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꼴이 우습구나.”
도망치고 싶었다. 적어도 이 거지 같은 곳에서 조금만 멀어진다면, 그래서 권능을 좀 더 원활하게 사용할 수만 있다면.
그럼 저 멍청한 거인놈에게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의 위기에 놓이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거인은 조금 둔해보일지언정 둔하지 않았다. 멍청해보임에도 멍청하지 않았다.
온 몸으로 열기를 받아내며 피부가 벌겋게 익고 살갗이 벗겨지고 있음에도 놈은 그것을 감내했다.
알비츠가 도망치는 것을 막으며 어떻게는 열기의 중앙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놈에게도 열기는 해악지만 알비츠만큼은 아니기에.
“너는 모를 거다.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는지!”
───!
거대한 망치가 알비츠를 강타했다. 반쯤 녹아내린 얼음의 방패는 재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숨이 턱 막히는 충격과 함께 그의 신형이 흐물거리는 대지 깊숙이 처박혔다.
“매일 같이 악몽을 꿨다.”
“번개에 잿더미가 된 내 동생의 모습을.”
“사지가 찢겨나간 아버지의 모습을.”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소멸한 어머니의 모습을.”
“네놈들이 쌓아올린, 동족들의 시체로 이루어진 산을!”
마기가 폭주했다. 적을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네놈들은 죽어 마땅했다! 감히 백신전의 질서에 따르지 않고 저항하던 반역자들! 먼저 백신전에 반기를 든 건 네놈들이었다!”
“가만히 있던 우리가 일어나게 만든 것이 누구냐! 가루다들을, 포이닉스들을 멸종시킨 게 누구냐!”
“그들은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다. 신들의 칼날이 너희에게 향했느냐? 지레 겁먹고 반기를 든 것을 우리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반기를 들었다는 것 자체가 네놈들의 오만이다! 이 세상은 모두의 것이다! 네놈들의 것이 아니라!”
“그건 백신전을 인정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반역도들의 망상이지. 이 세상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다.”
설사 백신전의 패권을 인정하지 못한다고 해도.
“세력 간의 충돌로 인한 자연스러운 도태다. 패배자는 죽고 멸망한다. 그것이 섭리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네놈들이 멸망할 차례군.”
“아니, 베리안은 승리할 거다.”
두리쉬마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김우진이 강한 것은 인정하지만 저 전투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가 있다.
“놈의 승패를 떠나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내 손에. 내 손으로!”
두리쉬마가 망치를 들어올렸다.
“네놈들에 의해 고향이 불탔고!”
“모든 동족을 잃었다!”
“나는 피눈물을 삼키며 벌레처럼 도망쳐야만 했다!”
고작 네놈들이 만들어 놓은 그 잘난 판을 어지럽힐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매일 같이 곱씹었다.
“네놈들의 사지를 찢고!”
“목을 꺾고!”
“짓밟는!”
“백신전을 무너트리는 그 순간을!”
매일 같이 기다렸다.
“지금 이 순간을!”
“아깝구나. 저 빌어먹을 열기만 아니었다면 우리의 입장은 완전히 뒤바뀌었을 텐데.”
망치가 떨어졌다.
* * *
“모두 도망쳐라!”
“세계수의 곁으로!”
부소장 또한 교도관과 용사들을 이끌고 세계수의 본체로 달렸다. 그들의 품 안으로 들어가자 몸을 녹일 것 같았던 열기가 그나마 줄어들었다.
“세상에, 이게 대체 뭐예요?”
율리아가 혀를 내둘렀다. 같은 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
“역시 소장주신님이십니다. 이 뜨거운 열기가 저 악적들을 모두 정화할지니···!”
“제기랄, 싸우고 싶은데 털이 탈까봐 나가지를 못한다니···.”
“독이 모두 타버려서 쓸모가 없습니다.”
“마력포가 열기에 잡아먹히는군. 지금까지 많은 신들을 보았지만 처음으로 진짜 신을 보는 기분이네.”
“저 열기로 요리를 하면 고기도 0.0000000001초만에 익지 않을까요?”
“익는 게 아니라 소멸할 것 같은데요.”
헛웃음을 짓던 율리아의 시선이 식은 땀을 흘리고 있는 릴리에게 닿았다.
“어머니 나무님, 괜찮으세요?”
- 아니.
- 끼이이이잉···.
릴리와 나르가 고개를 저었다. 모든 힘을 끌어 모아 방어막을 만들었으나 열기는 그마저도 녹여버리고 있었다.
파괴와 재생의 반복.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불안감에 모두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마저도 신들을 흡수한 릴리와 나르라는 특별한 세계수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불타 사라졌을 거다.
“얼마나 버틸 수 있으실 것 같아요?”
- 조금.
율리아가 신음을 삼켰다. 그렇다고 릴리와 나르를 버리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일단 최대한 힘을 보태드릴게요.”
“나도.”
두 엘프 신들이 세계수의 본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연장되었지만 그뿐이었다.
- 안 돼.
릴리가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대로는 안 된다.
릴리의 시선이 태양의 중앙으로 향했다. 두 신들의 격돌이 이루어지는 곳.
- 도움.
- 낑?
릴리가 나르를 불렀다. 끔찍한 더위에 힘들어하던 나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보여? 저거.
- 낑.
세계수들이 눈을 감았다. 차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밀린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다. 실제로도 큰 차이는 없다.
하지만 작게라도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차이는 꽤나 크게 다가왔다.
“솔직히 말하면 놀랍다.”
여전히 권능과 권능이 부딪힌다. 주변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졌다.
그럼에도 베리안은 태연히 입을 열었다. 땀이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는 김우진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폭발과 충돌이 일어나는 소음 속에서도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얻은 나와 잠시나마 대등한 전투를 펼치다니. 백신전의 신을 얼마나 먹은 거지?”
“알 빠야?”
“허나, 거기까지다.”
베리안이 웃었다.
“넌 결국 신들을 먹어 치운 괴물일 뿐이지. 진정한 신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관리자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집주인을 문 개새끼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쉽구나. 네놈의 그 입담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씩, 빛이 불꽃의 영역을 잠식해 들어갔다.
“김우진. 넌 꽤나 힘겨운 상대였다. 자칫하면 백신전이 사라질 뻔했어. 인정하지. 내가 신으로서 살아온 그 수많은 세월 중 너만큼 나를 애먹인 자는 없었다.”
빛이 강해진 것도 있었지만 불꽃이 약해진 것도 있었다.
“그럼에도 너에게는 조금이지만 감사한다. 내 의도보다 더 골칫덩어리가 되기는 했지만.”
“뭐라고?”
“난 네가 백신전을 혼란스럽게 만들길 바랐다. 그 상황에서 다른 주신들을 정리하고 아카식 레코드를 손에 넣을 생각이었지.”
그런데 설마 네가 칼카르를 죽일 줄이야.
“좀 많이 어그러지긴 했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겠다 싶더라니.”
“고작 신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신을 죽인 죄인을 살려준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덕분에 다른 주신들을 설득하느라 꽤나 애를 먹었었다.”
“그래서 참 좋으시겠네.”
“좋다마다.”
베리안이 대소했다. 그의 감정에 따라 빛의 힘이 더욱 강해졌다. 김우진이 이를 악물었다.
“이제 이 세상은 나의 것이다. 백신전은 내 아래 보다 확실한 지배자로 우뚝 설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진정한 신이 되었다.”
“관리자라는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나? 그러면 주인을 문 개새끼는 어때?”
“마음껏 지껄여라. 오늘로 듣는 것도 마지막이···.”
그 순간이었다.
─────!
불꽃이 강해졌다. 빛을 녹이며 전진했다. 빛이 바래졌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베리안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 내가!
동시에 릴리가 김우진의 어깨에 앉았다.
- 했어.
“릴리?”
“···세계수?”
- 힘. 톡.
릴리의 말은 간단했으나 상황을 파악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간단한 삼단논법이다.
릴리는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할 수 있다.
베리안은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얻었다.
릴리는 베리안에게 간섭할 수 있다.
- 영역! 내!
물론 릴리의 간섭은 결코 절대적인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연옥은 릴리의 영역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뿌리를 내렸고 차원의 핵을 넘어 아카식 레코드에까지 뿌리가 닿았다.
십 단위의 신들을 삼키며 다른 세계수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그녀의 영역에서 만큼은 그녀가 주신이었다.
그래. 모든 것을 그녀의 뜻대로 할 수 있을 만큼 전지전능하거나 엄청나지는 않지만,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한 주신과 아카식 레코드의 연결을 잠시지만 흐릿하게 만들 만큼 대단했다.
비록 그 대가로 다른 곳에 신경을 못 쓰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 전장에서 이탈하고 전체적인 전황이 기울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잘했어, 릴리.”
“···이런 말도 안 되는···!”
김우진에게 ‘승리를 맛볼 기회’로서는 충분했다.
“이까짓 것 따위···!”
베리안이 이를 악물었다. 연결을 다시 잇기 위해 애썼으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잘 안 되나 봐?”
“닥쳐라! 나는 절대신이다! 내가 하지 못하는 건 없어!”
“절대신이라니. 와,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지껄이네.”
풉, 여유를 되찾은 김우진이 웃었다.
“이래서 자식, 자식 하나 봐.”
잘 키운 세계수, 일곱 신 안 부럽다니까.
신이 일곱이나 되는데 왜 가장 도움이 되는 건 세계수지?
김우진이 남아 있던 모든 힘을 쥐어짜냈다.
“판 뒤집혔다, 이 개새끼야.”
불꽃이 신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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