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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109화 (109/150)

# < 108. 대답 >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

새하야면서 신성한 빛줄기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차원의 방벽을 통과해 연옥 전체를 휘감았다.

김우진을 감쌌다.

철컹-

실제로 그런 소리가 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우진은 그렇게 느꼈다. 그를 속박하던 제약이 끊어졌다.

“아.”

신 둘을 죽이고 주신 베리안과 처음 만난 그날.

빛으로 이루어진 계약서에 서명하던 그 순간.

그때부터 김우진의 심장과 영혼을 옥죄던 계약이 사라졌다.

“···계약이 사라졌다.”

정식으로 서로 조건을 완수해서 종결된 것도, 누군가 어겨서 파기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사라졌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성공했구나. 베리안.”

연옥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리는 없다. 마물들이 진격하고 있다는 것도.

연옥이 당도하기까지 계산이 섰을 텐데 그럼에도 하필 이 타이밍에 계약을 없애버렸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한다.

“모두 전투 준비!”

김우진이 소리쳤다. 그의 고함이 갑작스러운 빛줄기에 당황하던 연옥의 구성원들을 일깨웠다.

“릴리! 나르! 그만! 더 이상 의미가 없어.”

- 없어?

- 낑?

“소장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방금의 빛과 관련이 있니? 신의 힘 같았는데.”

“신들이 계약을 지워버렸습니다.”

“···간섭한다고 했던 그거구나.”

“네.”

“그러니까 그말은···.”

“우리를 먼저 치겠다는 거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벌어진 한 방이었지만 차라리 잘 됐다. 이렇게 되면 굳이 연옥을 움직일 필요가 없다. 저들이 직접 이곳에 발을 들일 테니.

- 전투 준비?

“그래, 릴리, 나르. 신들이 공격해올 거야. 대비해줘.”

- 응!

- 낑!

두 엘프 신들을 감쌌던 세계수의 가지들이 회수되었다. 김우진의 뜻을 알아들은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움직여라! 마력포를 언제든 쏠 수 있도록 준비해 놔!”

“특제탄은 조심해서 다뤄라! 자칫 잘못해서 터지면 네 목숨이 날아가!”

“신들이 온다!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도록!”

“성전! 마침내 성전의 순간입니다! 소장주신님을 따라 악마들을 토벌합시다!”

마력포를 장전하고 각자의 무기와 갑옷을 챙겼다. 세계수의 뿌리들이 연옥 전체를 휘감으며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다.

그러길 잠시.

쩌저저저저적-

균열이 일어났다. 아니, 방벽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맙소사.”

“세상이 무너진다···!”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거대한 재앙은 마치 세상의 종말과 같았다.

- 적···!

- 끼이이이잉!

방벽 자체를 무너트리는 거대한 힘 앞에, 두 세계수의 경계심이 올라갔다. 차원의 핵을 넘어 아카식 레코드에까지 뿌리가 닿은 두 세계수에게 있어 연옥은 완벽한 자신들의 영역이었다. 그게 너무도 쉽게 침범 당했다.

그리고 붕괴한 균열들 사이로.

적들이 나타났다.

수천 명의 집행자들.

수십의 신들.

그리고 그 너머.

두 명의 주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역자 김우진과 그를 따르는 반역자 무리에게 전한다!”

신 하나가 권능을 담아 소리쳤다. 연옥의 일원들 중 나약한 이들이 귀를 잡고 비틀거렸다.

“백신전은 여러 번의 기회를 주었음에도 너희들은 그 자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을 능멸하고, 신을 죽이며, 백신전의 위엄을 깎아내렸다.”

“멸해야 할 악과 손을 잡고 우주의 균형을 어그러트렸다.”

“이에, 백신전은 김우진과 그 무리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선고한다!

집행자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었다. 동시다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신의 힘은 거대한 장벽과 같았다.

그 모습은 각오를 다지고 신들에게 복수하겠다며 모인 용사들마저도 주춤하게 만들었다.

“데르카인님. 화답 부탁드립니다.”

“아주 거하게 해주지.”

데르카인이 직접 움직였다. 신력을 담아 가장 거대한 마력포를 발포했다.

─!

고막을 찢어발기는 굉음이 모든 소음을 잡아 먹는다.

거대한 섬광이 공간을 일그러트린다.

권능에 가까운 그 힘은 순식간에 목표물의 코앞에 당도한다.

그 순간, 신 하나가 권능을 발현한다. 신성한 방패가 백신전과 섬광의 사이를 가로 막는다.

그 직후, 섬광이 폭발을 일으킨다.

─────!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세상의 모든 기운이 일순간 증발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소멸한 집행자들이었던 가루의 잔재가, 중상을 입고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신들의 무리가, 예상 못한 파괴력에 당황한 또 다른 신들의 무리가 있었다.

“이게.”

반역자, 김우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직한 중얼거림에도 모두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먼 거리였으나 김우진은 정확히 베리안을 찾았다. 베리안도 김우진을 마주보았다.

“내 대답이다. 씨발놈아.”

* * *

대답은, 대화는 한 번이면 족하다.

전쟁을 하는데 사족이 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언어의 대화가 아니라면 그만둘 이유도 없다.

“쏴라!”

모든 마력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는다.

“멍청한 놈들! 그러고도 네놈들이 이 우주를 다스리는 백신전이냐!”

“다 같이 모여서 오면 ‘맞춰주세요!’하고 비는 것 밖에 더 돼?”

“다 죽여 버려!”

“신이고 나발이고 위대한 마력포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줘라!”

“마력포의 신, 데르카인 만세!”

드워프들에게는 전쟁의 승패보다 자신들이 만든 마력포의 위력을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마력포의 파괴력을, 그 마력포가 신들에게도 통한다는 사실이 그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광분에 휩싸이게 했다.

설명은 길었으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예상치 못한 한 방에 신들의 대응은 늦었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이미 수백의 집행자들이 쓸려나간 뒤였다.

“저 반역자들을 죽여라!”

“감히 백신전에 대응하는 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줘라!”

와아아아아!

함성과 함께 집행자들이 진격을 시작했다. 그들 사이로 마력포들이 다시 한 번 불을 뿜었으나 여전히 수천이 남아 있었다.

그들의 뒤로 신들 또한 움직였다.

- 적! 죽여!

- 어흥!

세계수의 권능이 적들을 공격했다. 나뭇잎은 하나하나가 신조차 베어 넘기는 칼날이 되어 쏟아지고 수천 줄기의 가지와 뿌리들은 집행자들을 유린한다.

그 뒤로 죄수들이, 용사들이 적들을 맞이한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모두들 가시죠.”

“네. 드디어···!”

“정말 많긴 많구나.”

“소장주신이시여, 당신의 검이 되어 저 간악한 자들을 주살하겠나이다.”

“내 장기는 요리인데, 쓰읍.”

“내 독이 통할까? 그래도 같은 신이니까 통하겠죠?”

“모조리 찢어버리겠습니다!”

신들이 움직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두리쉬마랑 함께 있는 건데.”

차원룡도 움직인다.

하지만 김우진은 본래의 자리를 그대로 지켰다.

그의 시선이 알비츠에게, 그 너머 베리안에게 닿았다.

움직이지 않고 있으나 그들은 서로를 향해 무형의 기운을 쏟아내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라.’

베리안의 웃음이 그리 속삭인다. 한쪽이 움직이면 다른 쪽도 움직인다. 하지만 둘 다 움직이지 않으면 일단은 지금의 상태가 계속된다.

무언의 협의가 오고 간다.

그리고 그 협의는.

───!

새하얀 백염이 주신들을 직격하면서 끝이 났다.

주신 둘이 있으니 불리하긴 하다. 하지만 불리한 건 김우진뿐 아니라 휘하 병력들도 마찬가지다.

백신전의 신들은 주신을 제외하면 누구도 김우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결국 대장만 잡으면 끝난다. 대장을 잡아야 끝난다.

시간을 끌면 두리쉬마가 당도하겠지만 그 전에 아군이 전멸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니 싸워야 한다.

물론 불안감은 있다.

상대는 두 명의 주신이다. 그 중 한 명은 무려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하겠다고 몇 달 동안 칩거를 했던 놈이다.

무려 차원의 방벽 자체를 허문 것으로 보아 그 칩거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 놈이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얼마나 흡수했고 그 권능을 얼마나 사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자신 있게 나온 것을 보면 결코 만만하지 않을 터.

물론 김우진 또한 믿는 게 있다.

어째서인지 외팔이가 되어버린 알비츠.

그리고 일곱 신을 만들기 위해 죽은 신들이다. 그들은 두리쉬마의 업이 되었으나 그 힘은 김우진의 권능에 포식되었다.

무려 일곱의 신. 주신 칼카르와 이전에 흡수한 두 명을 합하면 딱 열이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열 명의 신을 흡수하지 못했다. 그 중 한 명이 주신인 건 더욱 말도 안 된다.

주신이 두 명이라고?

한 명은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해 그 권능의 일부를 얻었다고?

그럼에도.

자신이 없었다.

질 자신이.

김우진이 포효했다. 불꽃이 터져 나왔다. 알비츠의 얼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베리안의 눈에 이체가 떠올랐다.

섬광이 불꽃과 충돌했다.

* * *

칼카르의 불꽃은 알비츠의 얼음을 완전히 녹이지 못했다.

둘은 거의 동등한 수준의 신이었고 누구도 쉽게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허나, 김우진의 불꽃은 달랐다. 기존의 적염보다도, 칼카르의 홍염보다도 뜨겁고 신성한 백염은 모든 것을 불태웠다.

얼음을 녹이고 증기마저도 완전히 말살한다.

알비츠는 깨달았다.

주신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음을.

그는 김우진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대체 언제부터 이랬던 걸까. 베른이 잡혔을 때부터? 칼카르가 죽었을 때부터?

모르겠다. 중요한 건 주신인 알비츠마저도 감히 저 싸움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새하얀 백염과 더 새하얀 백광이 부딪히는 전장터에.

허탈함이 밀려왔다.

아무리 김우진이 칼카르를 먹었어도.

아무리 김우진이 수많은 신들을 삼켰어도.

아무리 베리안이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했어도.

그 또한 주신이었다. 저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서야만 했다.

“감히 백신전에 대항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굴욕과 무능함, 그리고 수치는 분노가 되어 또 다른 적들을 향해 쏟아졌다.

쩌저저적-

냉기가 공간마저 얼리며 용사들을 휩쓸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스라지는 모습은 신에게 대항한 반역자들에게 마땅히 펼쳐져야 할 모습이다.

그래, 이거다. 이게 신으로서 천벌을 내리는 바른 모습.

“···세계수.”

그의 시야에 거대한 가지를 휘두르며 신들을 공격하는 세계수들이 보였다. 단숨에 밀어버릴 것 같은 압도적인 수차이에도 생각보다 시간이 끌리는 것은 저들 때문이었다.

연옥 자체가 저들의 권역이기에.

“저걸 뽑으면 끝···.”

───!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무언가 떨어졌고 급하게 만든 얼음의 방패는 그것을 완벽하게 방어해내지 못했다.

그의 신형이 튕겨져 나갔다. 무거운 충격에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

그건 망치였다. 본래는 산과 같으나 임의대로 크기를 줄인 거인이었다.

마물들을 이끌고 있어야 할 그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걸까.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의문은 놈이 뒤에서 기습을 하기 직전까지, 기척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주신인 그가.

“명령을 내려놓으면 굳이 내가 직접 있을 필요 없지. 혹시나 해서 와봤더니 역시나군.”

“그걸 묻는 게 아니다!”

“어떻게 네놈의 감각을 속였느냐, 이 말인가?”

두리쉬마가 웃었다.

“네 덕분이다. 알비츠. 네 덕분에 힘을 완전히 잃고 다시 얻는 과정에서 기척을 더욱 완벽하게 숨길 수 있게 되었거든.”

“무슨 말도 안 되는···!”

“네가 납득하든, 하지 않든 그건 딱히 중요치 않다.”

어차피 네놈은.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을 테니까.”

두리쉬마가 망치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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