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7. 직전 >
마물은 본능적으로 차원을 넘어 다닌다.
한 차원에 어둠의 사도가 선택되고 멸망이 어느 궤도에 올라 차원에 마기가 흩뿌려지기 시작하면 마물들은 그곳으로 자연스레 이끌린다.
차원의 방벽을 갉아 먹으며 균열을 일으키고 차원을 침범해 멸망을 부른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섭리다.
허나, 세상은 언제나 섭리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멸망이 진행 중인 세계가 꿀벌을 유혹하는 꽃처럼, 마물들을 유혹하지만 초월적인 존재가 존재한다면 그 모든 과정을 무시할 수 있다.
“가자.”
크르르르-
크워어어어어!
마물들이 포효했다. 갈라진 균열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거인이 권능을 발휘하자 차원과 차원을 잇는 길이 펼쳐졌다.
그 끝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카식 레코드와 더 없이 가까운 백신전이었다.
마물의 파도가 백신전을 향해 빠르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 * *
두리쉬마를 움직인 김우진은 다시 연옥으로 돌아왔다.
알베니우스, 그리고 백 여명의 용사들이 함께였다.
“···내가 살아생전 여길 다시 오게 될 줄이···여기가 연옥이라고? 내가 알던 연옥과는 너무 다른데?”
“맙소사, 세계수가 두 개나?”
“신! 신들이다!”
그들은 연옥의 모든 부분에서 경악했다.
그들중에는 김우진 이전의 소장 시대에 연옥에 갇혔던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은퇴 용사라는 게 그렇다. 집행자가 되거나, 그냥 힘을 포기하거나, 연옥에 갇혔다가 포기하거나. 세 가지 선택지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현재의 연옥은 그들이 알던 연옥과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두 그루의 세계수와 일곱의 신들, 넘쳐나는 마력포들과 분주하게 움직이는 죄수와 집행자들까지.
연옥보다는 차라리 백신전이라고 해도 믿을 수준이었다.
“신들이 백신전을 배신한 겁니까?”
“아니, 저들도 본래는 죄수였다. 하지만 내가 직접 가르치고, 신들을 죽여 새로운 신으로 만들었지.”
“그런 게 가능···하군요.”
테론이 헛웃음을 지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증거가 눈앞에 있으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따르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테론을 시작으로 용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환영한다. 교도관들이 널 안내해줄 거다. 따라가도록. 백신전과의 전쟁이 그리 멀지 않았으니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놓고.”
“예!”
집행자들에게 용사들을 맡긴 김우진이 세계수들을 찾았다.
두 세계수는 차원을 움직일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두 그루의 세계수 사이에 가지와 뿌리에 묶여 얼굴만 내밀고 있는 두 엘프신들은 꽤나 우스웠다.
“···웃지 마세요!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세이드를 구하기 위해서 그러고 있지.”
“···비겁하게 팩트로 승부하다니! 정정당당하게 선동과 날조로 가시죠!”
“릴리한테 소장을 닮으면 안 된다고 할 게 아니라 너부터 조심해야 할 것 같지 않니?”
“네? 제가 왜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시점에서 너도 이미 글러먹은 것 같구나.”
“그게 무슨 뜻이에요!”
김우진은 발끈하는 율리아와 시에나를 내버려두고 양손을 뻗었다. 한 손에는 릴리가 날아와 앉았고 다른 손에는 나르가 얼굴을 부볐다.
“될 것 같아?”
- 응.
- 낑!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에 성공한거야?”
- 응.
“수고했어. 릴리, 나르. 정말 자랑스러워.”
- 헤헤. 느려. 근데.
- 어흥!
“상관없어.”
갈 수 있다는 게, 세계수들의 힘과 권능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백신전에 당도하면 차원의 방벽을 해제하고 두 차원을 섞어야 해.”
이미 전례가 있다.
알베니우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종말 차원들은 변방으로 밀려나는 과정에서 서로 부딪혀 합쳐지기도 한다고 했다.
- 가능. 아마도?
“그거면 됐어.”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출발하면 백신전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 같아?”
- 일주일 정도.
“딱 좋네.”
마물의 군단도 아마 그쯤 걸릴 거다. 주신을 초월한 김우진이 혼자 움직이는 것과 수백만의 마물들이 움직이는 건 다르니까.
비슷한 시기에 백신전을 합공할 수 있다.
“출발하자, 릴리, 나르.”
- 응!
- 끼잉!
────!
차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마물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마물은 필연적으로 마기를 방출한다. 그들의 대규모 준동은 우주를 관장하는 신들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대규모 군단이 차원과 차원을 이동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종말 차원에 그치고 있습니다만, 이대로는 종말 차원이 아닌 하위 차원에 발을 들이는 것도 순식간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경로를 예상해 보건데···.”
백신전 중앙에 떠 있는 홀로그램이 가상의 선을 하나 그었다.
마물들이 발호하기 시작한 이름 모를 종말 차원에서부터 일직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경로. 그것의 끝은 신들에게 있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곳이었다.
“백신전이구나.”
“그자가 분명합니다. 김우진을 돕던 어둠의 사도.”
“어둠에게 영혼을 판 타이탄입니다.”
어둠의 사도가 연옥에 숨어 김우진과 함께 알비츠를 죽이려 했다. 그리고 몇 달 전에 포위망을 뚫고 변방으로 도망쳤다.
그때부터 지금의 일은 어느 정도 예정되어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연옥 쪽은?”
그리고 어둠의 사도가 단독으로 움직일 리도 만무했다.
“포위망을 완전히 걷어 열 명의 신들을 붙잡은 이후,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습니다만···.”
“만?”
“무언가 이상합니다.”
“그건 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감각과 관련된 권능을 가져 주신을 제외하고 그 어떤 신보다 예민한 신, 파라트가 보고를 올리던 집행자 대신 앞으로 나섰다.
“연옥의 차원 전체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이한 파동을 흩뿌리며 조금씩 움직이고 있습니다.”
“···움직인다니? 무엇이 말이냐?”
“차원입니다.”
“······!”
“······!”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오!”
“옳은 소리! 차원이 움직인다니. 차원의 이동은 오직 아카식 레코드의 의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차원이 움직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종말을 막지 못한 차원은 자연스레 변방으로 밀려난다. 그것은 태초부터 내려온 우주의 순리다.
하지만 연옥은 종말 차원이 아니었고 움직일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
“조용.”
알비츠의 말에 신들이 입을 다물었다.
“파라트, 네가 허언을 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 미세하긴 하나 틀림없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로는 이곳 백신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가능한 것인지, 나 또한 의문이 든다.”
감히 신조차 상상하지 못한 일. 차원을 움직인다는 건 그런 일이다.
하물며 본래의 순리대로 변방이 아닌, 오히려 차원의 중심으로 온다니.
“직접 확인해보겠다.”
자포자기하여 몇 달 동안 침거하던 알비츠가 마침내 무거운 엉덩이를 때었다.
“모시겠습니다.”
수십의 신들이 그 뒤를 따랐다.
백신전을 벗어나 연옥이 보이는 차원의 경계까지 다다른 알비츠는 파라트의 말이 맞다는 것을 느꼈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감히 신조차, 나조차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을 실현하다니···.”
너무 엄청난 일인지라 분노가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저 경외가 일었다.
그는 백신전의 최고라는 주신임에도, 일개 피조물인 김우진 따위에게.
동시에 잃어버렸던 투지가 되살아났다.
“···김우진을. 김우진을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아니, 그건 투지가 아니었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인해 생겨나는 반발심이었다.
그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해내고 있는 김우진에 대한 두려움. 이대로 두면 정말로 백신전의 세상이 끝날 수도 있는 공포.
그들처럼 신으로 오랫동안 군림한 것도 아니다. 아카식 레코드와 직접적으로 접촉한 것도, 살핀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데 대체 어떻게.
“집행자들을 모두 소집해라.”
죽여야만 한다. 더 커지기 전에.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기 전에.
알비츠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더 이상 확신할 수가 없었다.
‘···베리안이 김우진을 이길 수 있을까?’
일개 인간 대 주신임에도.
최초로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을 성공한 신임에도.
‘···대체 어떻게.’
그 또한 짐작할 수 없다. 그렇기에 더욱 두렵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마물과 함께 연옥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은 김우진이 전쟁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연옥을 굳이 끌고 오는 것은 아마 세계수라는 이점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일 거다. 생각을 할수록 기가 찬다. 세계수를 이용하기 위해 차원을 움직이다니.
“믿기지 않지만 연옥을 움직일 정도라면 충분히 우리를 짓뭉갤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는 거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알비츠가 반발하는 신의 멱살을 잡고 으르렁거렸다.
“눈앞의 저걸 보고도 아직도 김우진이 하찮은 피조물로 보이느냐?”
“···아, 아닙니다.”
“우리조차 차원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헌데 놈은 하고 있지. 놈은 충분히 백신전과 대등한 수준으로 성장했다.”
고작, 고작 40년 남짓이었다. 정체되어 있는 신들의 아성을 다시금 일깨우기 위해 주었던 한 번의 기회가 지금의 사태까지 왔다.
‘베리안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안 됐다···!’
뒤늦은 후회고 베리안을 탓할 것도 없다. 그때는 그도, 칼카르도 그게 옳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둠의 사도는 능히 주신과 맘먹는 강자다. 어둠의 사도와 김우진이 동시에 우리를 공격한다면 큰 문제다.”
“허면···.”
“그러니 그전에 우리가 연옥을 친다.”
마물들이 당도하기 전에.
“어둠의 사도보다는 김우진 쪽이 더욱 난적이다. 그러니 그나마 가능성이 있을 때 김우진을 끝장내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김우진이 연옥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공격할 수가 없습니다.”
외부에서 연옥의 차원의 방벽을 찢어도 문제다. 방벽을 부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안 되겠지만 방벽을 부순다고 차원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러면.”
“상관없다.”
불쑥, 목소리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
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향했다.
언제부터일까, 그곳엔 베리안이 서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자연스럽게.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알비츠가 경악했다. 주신인 그조차 베리안의 기척을 아예 감지하지 못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베리안이 동등한 상대였던 알비츠를 아득히 뛰어넘었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을 성공했다는 것.
간섭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주신은 그조차 베리안에게서 무엇 하나 읽어낼 수 없는 시점에서 감히 그가 평가할 수준이 아니었다.
“···상관이 없다고?”
“그래.”
베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시는 바를 이루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주신이시여!”
신들 또한 베리안의 각성을 눈치 채고 무릎을 꿇었다. 베리안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경배를 받으며 기운을 끌어 모았다.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그 순간.
세상이 요동쳤다.
번쩍!
저 멀리, 세상의 중심부에서 거대한 빛줄기가 솟구쳤다. 빛들은 신들을 감쌌다. 연옥을 감쌌다.
알비츠는 심장 언저리에 머물고 있던 구속이 풀려나가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신들이 같은 걸 느꼈다. 계약이 파기되는 순간이었다.
“김우진. 아주 재미난 짓을 하고 있구나.”
그조차도 대체 어떻게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하던 이미 늦었다.
베리안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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