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107화 (107/150)

# < 106. 시작 >

“안 돼?”

- 안 돼! 못 해!

- 낑낑! 깡깡!

깡깡은 또 뭐야.

“세계수인데 안 돼?”

“소장님? 어머니 나무가 만능은 아니거든요?”

“신을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

“물론 다른 어머니 나무들보다 두 분이서 대단하게 성장한 건 맞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완전 달라요.”

“어···. 그건 좀 제가 봐도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김우진의 파괴적인 의견은 디아네마저도 아주 잠깐이지만, 광신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신들을 섬겨왔기에 알고 있습니다만, 신들은 은연중에 두 파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파벌?”

“아카식 레코드를 신성시 여기는 신들, 그리고 아카식 레코드마저도 간섭하여 그 위에 서야한다는 자들.”

“전자는 칼카르와 알비츠고 후자는 베리안이겠군.”

“예, 맞습니다. 역시 소장주신님이십니다. 모르는 게···.”

“이야기나 계속해.”

“물론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은 입장에서 아카식 레코드를 신성시 여기는 자들이 훨씬 많았습니다만, 아무튼 그럼에도 신들은 그 누구도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하지 못했습니다.”

“해보지 않은 건 아니고?”

“오래 전, 베리안이 시도했었다고 실패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다른 주신들과 크게 싸운 적이 있었고요.”

“지금 다시 하고 있다던데.”

“···정말입니까?”

“그래.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면 우리는 져.”

김우진이 릴리를 쳐다보았다. 천천히 눈을 맞췄다.

“릴리. 똑바로 대답해. 할 수 있어, 없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어?”

- ······.

릴리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릴리가 입을 열었다.

- 뭐 줘?

“···맙소사. 어머니 나무님.”

율리아가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김우진은 오히려 웃었다.

“그건 가능은 하다는 뜻?”

- 몰라. 근데.

- 이미. 내렸어. 뿌리.

“언제?”

- 한 달.

- 근데. 안 돼. 혼자는.

“그럼 나르하고 하면 되겠네?”

- 확실. 아니.

확실하지는 않다지만 릴리가 이렇게 말했다면 가능성이 0은 아니라는 뜻이다.

“말도 안 돼. 어머니 나무님, 그런 게 정말로 가능해요?”

“···세계수가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을 한다고? 단순히 겉을 읽는 게 아니라?”

“···역시 소장주신님의 세계수는 다릅니다. 저는 처음부터 믿고 있었습니다!”

붕괴되는 상식에 신들이 패닉에 빠졌다.

하지만 김우진도 아무 생각 없이 물은 건 아니었다.

릴리도, 나르도 결코 평범한 세계수가 아니었다. 그들이 잡아먹었고 잡아먹고 있는 신들이 한둘이 아니다.

신의 힘이란 결국 아카식 레코드가 부여한 것. 근원을 따지면 아카식 레코드라는 거다. 아카식 레코드의 힘으로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하는 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랬다면 베리안은 시도조차 못했을 테니.

“뭘 원해?”

- 아니. 됐어.

탐욕스럽던 릴리의 눈이 장난스러운 호선을 그렸다.

- 농담.

“농담?”

- 나. 이렇게. 덕분. 소장.

- 보답.

- 낑낑!

“···애들아!”

전혀 예상치 못한 감격스러운 말이었다.

김우진이 릴리와 나르를 격하게 끌어 안았다.

이 맛에 사람들이 자식을 키우는 건가.

잘 키운 세계수 열 신 부럽지 않다더니. 과연 그렇다.

* * *

“새로운 사실을 알았어요.”

“뭐니?”

“어머니 나무에게 다수의 신을 봉인시키면 차원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거?”

대체 수많은 엘프들은 왜 지금까지 이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는지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엘프들은 다 무능해요. 그 오랜 시간동안 그런 간단한 사실조차 알아내지 못하다니. 그렇죠?”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나도 허탈해서 말이 나오질 않네.”

시에나가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엘프들은 지금까지 세계수의 진면목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근데 그게 우리 잘못은 아니잖니?”

세상에 그 누가 막대한 수의 신들을 세계수의 뿌리에 봉인시키느냔 말이다. 한 차원에 두 개의 세계수를 심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발상이다.

“그건 그렇죠. 연옥에 온 뒤로 정말 놀라기만 하네요.”

“정확히는 소장을 만난 뒤지.”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격하게 동의했다.

“근데 정말 가능하세요?”

그녀의 시선이 코앞에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릴리와 나르에게 향했다.

정확히 두 세계수의 중심에서, 두 엘프는 가지에 둘러싸여 있었다.

- 아마도?

“···아마도? 뭐예요, 그 무책임한 의문문은. 점점 소장님 닮아가시면 안 돼요!”

- 귀쟁이. 잔소리.

“또 귀쟁이! 그거 고치시기로 했잖아요!”

- 내가?

- 증거?

“제가 지난 번에···.”

- 응, 아니야.

- 집중.

릴리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가지들이 더욱 촘촘하게 두 엘프를 옭아매었다.

차원을 임의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나마 릴리와 나르가 신들을 잔뜩 집어 삼킨 특별한 세계수이기에, 한 차원에 같이 심어졌고 협동할 수 있기에 그나마 미약한 가능성이라도 생기는 거다.

그나마도 아주 작아 릴리와 나르는 두 엘프 신들을 이용해 가능성을 높이고자 했다.

신이란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다. 신들과 권속들이 이어져 있듯이, 신들 또한 아카식 레코드와 이어져 있다.

아카식 레코드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세계수가 차원이라는 배를 움직이는 엔진과 네비게이션이 되고, 아카식 레코드와 이어진 신들이 선장이 되어 전체적인 총괄을 더한다면.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무엇보다 엘프와 세계수는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 그게 아니더라도 신인 엘프가 옆에서 보좌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효율이 올라간다.

- 시작.

“네.”

“나도 준비 됐단다.”

────!

세계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막대한 신력이 차원 전체를 뒤흔들었다.

* * *

세계수들에게 대업을 맡긴 김우진은 연옥을 빠져나왔다.

차원을 움직여 백신전을 치는 건 치는 거고 한 가지 방법만으로는 신들의 아성을 무너트리기 쉽지 않았다.

첫 번째가 연옥이라면 두 번째가 어둠이다. 어둠의 사도 두리쉬마가 이끄는 마물의 군단.

이미 붕괴한 포위망은 의미가 없었고 두리쉬마를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미 김우진에게는 그를 찾을 매개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멀긴 멀어.”

연옥은 하위차원과 상위차원의 중간쯤 걸쳐있다. 그건 그만큼 아카식 레코드, 우주의 중심에 가깝다는 이야기이며 반대로 종말 차원은 우주의 가장 변두리니 거의 극과 극의 거리였다.

얼마나 멀리 갔는지 백 개가 넘는 차원을 넘었다. 그런데 도착한 곳에는 두리쉬마가 없었다. 대신 알베니우스와 용사들이 있었다.

“두리쉬마님은요?”

“다른 곳으로 갔어. 여기는 저것들이 마물을 대부분 쓸어버렸거든.”

백 여 명의 용사들이 마물의 무리와 격돌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충 훑어 봐도 전황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이백명이 넘는다고 알고 있는데 역시 종말 차원이 저들에게 견디기 힘든 곳이긴 한가 보군요.”

“···그렇지. 다 싸우다 죽은 거야. 종말 차원은 용사들에게 최악의 환경이잖아?”

“두리쉬마님이 적당히 상황을···아. 함께 연옥에 있었죠.”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눈에 독기가 가득하네요? 느껴지는 기운도 어지간한 용사들 이상이고. 저 정도라면 집행자들과 싸워도 크게 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집행자에 준하는 백 명의 용사들. 무척이나 큰 전력이다.

“전부 연옥으로 데리고 가죠.”

“벌써?”

“벌써가 아닙니다. 베리안이 미친 짓을 계획하고 있어서 생각보다 여유가 없거든요.”

“미친 짓? 뭐,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을 하기라도 하나?”

“네.”

“···미친 새끼군.”

“모두 집합!”

전투가 끝나고, 김우진은 용사들을 소집했다. 그들은 처음 보는 김우진에 의아함을 품었으나 은은히 흘러나오는 위압감에 얌전히 모여들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만나서 반갑다. 나는 너희들을 이끌고 백신전을 들이 받을 사람이다. 이 양반을 통해서 내가 너희들을 모았다고 보면 된다.”

“···저건 내가 알아서 모은 거거든?”

“가슴에 손을 얹고 저한테 다 맡기려고 모은 게 아니라고 말씀해보시죠.”

“······.”

알베니우스가 얌전히 쭈그러졌다.

“신에게 대적한 강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당신입니까?”

회색 머리의 중후한 용사가 손을 들었다.

“네 이름은?”

“테론입니다. 부족하지만 일단은 이들의 대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김우진이다.”

김우진이 전직 용사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내가 아는 얼굴이 없군. 하지만 연옥을 모르는 이들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연옥?”

“용사들의 감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나는 22년 전 새로 부임한 연옥의 소장이다.”

“···신들의 개?”

“예전이었으면 틀린 말은 아니니 한 번은 봐주겠다. 하지만 두 번은 없다.”

─!

“크윽···!”

“커헉···!”

김우진이 기운을 폭사시켰다. 거대한 압박과 마주한 용사들이 신음을 흘렸다. 약한 일부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테론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신들이 임명한 연옥의 소장이 어째서 신들과 적대하려는 겁니까?”

“연옥은 내 감옥이기도 하니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간단하다. 나는 이미 수십의 신들을 죽였고 그로 인해 신들과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수십의 신들을 이미 죽였다고요?”

“그게 가능한 건가?”

“말도 안 돼···!”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너희들한테 그럴 이유도 없고. 나를 따라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다.”

“우리를 함정에 빠트리지 않는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굳이?”

김우진이 픽 웃었다. 그 자신감에 용사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도 깨닫고 있었다. 눈앞의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그들이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라는 것을.

“그 정도의 강자면서 왜 저희가 필요로 한 겁니까?”

“전쟁은 장수만으로 할 수 없으니까.”

따라와라.

“그러면 너희들이 그토록 바라던 신의 몰락을 보여주마.”

“···한 가지만 더.”

“말해라.”

“···밥은 잘 줍니까?”

“밥?”

김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베니우스가 움찔, 몸을 떨었다. 이 양반 갑자기 왜 이래?

“자고로 사람은 밥심이라고 했다.”

“굶기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당연한 소리를. 내 수중에는 꽤나 뛰어난 요리사가 있다. 너희가 먹어본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는 밥을 해준다고 자부할 수 있지.”

“···정말입니까?”

“심지어 그놈은 마물도 요리할 줄 안다. 별미인지라 꽤나 마음에 들 거다.”

“마물?”

“마물이라고?”

“마물을 먹인다고?”

용사들이 경악하여 웅성거렸다.

“물론 마물을 먹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줄은 알지만 다르다. 독을 전부 빼고 어지간한 음식보다 맛있게 조리하는 실력자지.”

“아무리 그래도 마물은 싫습니다!”

“맞습니다! 마물은 이미 배터지게 먹었습니다!”

“마물은 지겨워요!”

마물이 지겹다고?

“꼭 마물을 먹어본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먹었습니다. 배 터지도록.”

“먹어? 마물은 독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먹기 힘들 텐데?”

하물며 종말 차원의 마물들이다. 아무리 용사들이라고 해도 내성을 기르긴 쉽지 않을 거다.

“예. 그래서 이 정도만 살아남았습니다.”

“···응?”

싸워서 죽은 게 아니라?

“누구 덕분에 말입니다.”

그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김우진이 상황을 이해하는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알베니우스님이 하는 게 다 그렇죠, 뭐.”

“이게 왜 내 탓이야! 신들이 갑자기 공격해서 그런 것 아니야!”

“예, 예.”

“난 억울해!”

“저들 앞에서도 똑같이 말씀해보시죠.”

“······.”

* * *

번쩍-

새로운 차원이 김우진의 눈앞에 펼쳐졌다.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낸 산이 보였다. 김우진은 그 앞에 섰다. 숨어 있던 수만의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리쉬마님.”

산이 눈을 떴다.

“만족할만큼 모으셨습니까?”

“몇 달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어둠의 사도가 된 이후, 이렇게까지 바쁘게 움직인 건 처음인 것 같군.”

거인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래도 여러 차원의 마물들을 무작정 쓸어왔으니 질은 몰라도 양은 쓸만하다.”

“그거 좋군요.”

“이렇게 왔다는 것은···.”

“예.”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되었습니다.”

“아직 부족하다. 수만 급하게 부풀렸지 질적으로는 이전과 차원이 다르다.”

“시간이 없습니다. 베리안이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을 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절대 신인지 뭔지가 되겠다고.”

“아주 돌아버렸구나.”

쿠그그그그-

세상이 떨리기 시작했다. 산이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가야겠군.”

거대한 망치가 휘둘러졌다. 긴 궤적에 따라 거대한 균열이 발생했다.

“가자.”

수백만 마물의 군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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