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4. 이미 다 >
조용하다.
주신을 죽이려 했음에도 백신전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무기를 개발해야지.”
데르카인은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신이 되었기 때문일까, 요즘 들어 회춘한 것 마냥 몸 상태가 최고였다. 망치질에는 힘이 있고 머리가 팽팽 돌아가 설계나 조립이 훨씬 빠르고 능숙해졌다. 움직임 자체가 빨라진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신격 그 자체였다.
신격은 모두 동일하지 않다. 신이 된 자의 인생과 특성을 고려해 합당한 힘으로 발전한다.
율리아의 신의 힘이 폭풍인 것처럼, 시에나의 신의 힘이 활과 관련된 것처럼.
그의 신격은 대장장이였다. 그가 만든 모든 장비에 자연스럽게 우주의 힘을 깃들게 할 수 있으며 강화할 수 있다.
그가 만든 모든 물건들이 흔히들 말하는 성유물이 되는 것이다.
대장장이라서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무엇보다 그가 만든 무기가 이제는 확실하게 신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없이 만족스러웠다.
비록 직접적인 전투는 다른 신들에 비해서 한 발자국 뒤떨어지게 되었지만 세상일이란 게 본래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것 아니겠나.
무엇보다 부족한 힘은 다른 것으로 보충할 수 있었다.
“릴리.”
- 왜.
“여기에 신력을 좀 부여해주겠나.”
- 응.
순수하게 정제하여 깎아낸 마력석에 세계수의 정기가 깃들었다.
여러 신의 기운을 흡수했음에도 기운은 더 없이 정순했으니 이는 세계수의 권능 중 하나였다.
맑고 투명하던 마력석이 은은한 에메랄드빛을 띠었다.
데르카인이 가공을 시작했다.
- 뭐?
“이걸로 포탄을 만들 거네. 지난 번 전투에서 느낀 게 많아.”
좋은 무기, 좋은 방어구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신들을 위한 무기와 방어구는 이미 전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그가 직접 사용할 무기.
그가 선택하는 무기는 당연히 하나다. 마력포. 자고로 마력포하면 드워프, 드워프하면 마력포 아니겠나.
그리고 마력포는 단순히 주변의 힘을 빨아들여 방출하는 방식은 안 된다. 그런 수준에서는 결코 신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없다.
“몸체 자체는 이미 확실하게 보강했네.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절대 깨지지 않겠지.”
첫 실전에서 폭발하던 그 충격은 그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두 번의 실수는 없다.
“몸체가 버틸 수 있다면 그 한계까지 포탄을 강화하는 거네.”
마력포의 파괴력은 결국 포탄이 결정한다. 포탄에 얼마나 강대한 술식과 마력을 담았는지에 따라서. 어떻게 가공했는지에 따라서.
“조무래기들을 쓸어버리는 수십, 수백 발보다는 신의 숨통을 끊어버릴 확실한 한 방.”
방향성이 정해졌다.
“다시 불어넣어주게.”
데르카인이 한참동안 매만지던 마력석을 다시 내밀었다.
- 줄었어?
“압축시켰네. 버틸 수 있는 한계까지 최대한 해볼 생각이네.”
- 안전?
“나도 처음해보는 거라 정확히 모르네만.”
- 터지면?
“위험하겠지.”
- ······.
“걱정 말게. 원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거네. 그때도 마력포가 터졌지만 결국 더 발전시키지 않았나!”
콕콕콕-
릴리가 데르카인의 머리를 쪼기 시작했다. 그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지금 뭐하는 짓인가!”
- 여기. 내 본체 앞.
- 양심, 어디?
“···그야 자네에게 정수를 받으려면 최대한 가까이서···.”
- 가.
- 저 앞. 괜찮.
- 낑낑! 낑!
릴리의 날개 끝이 가리키는 곳은 나르의 본체 앞이었다. 가만히 있다 봉변을 맞은 나르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 * *
“맨날 저러시네.”
난리를 치는 세계수들과 데르카인을 보며, 율리아는 절레 절레 고개를 저었다.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제가 왜요?”
“어머니 나무들과 가장 많이 문제를 일으키는 게 너라는 자각이 없니?”
“저는 언제나 하이엘프답게 맑고 깨끗하죠.”
“···케이룸에 하이엘프가 있었다면 비교할 수 있었을 텐데.”
“의심하지 마세요. 저는 하이엘프입니다.”
율리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더욱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와 등은 세계수와 맞닿아 있었고 접촉부를 통해 정기가 순환했다.
신이 되었다고 한들, 엘프는 엘프다.
더 없이 숲에 친숙한 종족. 숲의 정기를 받아들이고 기운을 복돋는 종족.
신이 되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평범한 엘프가 평범한 숲과 나무로부터 순환시키던 정수가 신과 신을 여럿 삼킨 세계수로 변했을 뿐이다.
주변에는 그녀들 뿐 아니라 다른 엘프들도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세이드가 살아 있데요.”
“죽었다면서?”
“죽은 것처럼 이야기했었는데 사실은 살아 있다네요.”
“그럼 기뻐해야지, 표정이 왜 그렇게 복잡하니?”
“복잡해서요.”
살아 있다고 좋아해야 하나, 아니며 속았다고 화를 내야 하나.
물론 어쨌든 살아 있는 거니 기쁘고 그게 더 좋다. 다만, 더욱 무거운 책임감이 생겼다.
“결국 백신전을 무너트리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고 했거든요.”
“왜?”
“계약에 묶여 있데요. 자세한 건 소장님의 개인 사정이라 말씀을 못 드릴 것 같아요.”
“됐어. 나중에 한 번 물어보면 되겠지.”
시에나가 픽 웃었다.
“그럼 너도 반드시 백신전에게 복수할 이유가 생겼네.”
“이걸 복수라고 해야 할지···.”
“지인이 감금당해서 인생을 허비하고 있으니 복수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면 또 맞네요?”
보다 명쾌해진 해답에 율리아가 쾌활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저 짐승들은 하루를 빼먹지를 않네.”
쾅쾅쾅, 저 멀리서 연달아 들려오는 폭음에 시에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투기장으로 변형된 축사장에서 수인들이 서로 싸우며 만들어내는 소음이었다.
“그게 수인들의 방법이니까요.”
“근데 오늘은 좀 더 소리가 큰데?”
“타르칸님이 화풀이 중이거든요.”
“갑자기?”
“두리쉬마님하고 싸워보질 못했다고 성질이 나서···.”
“···진짜 단순한 놈이구나.”
시에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세계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집행자였으나 교도관이 된 자들은 정기 예배를 드렸다.
“오늘 하루도 저희를 보듬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우진이 머물고 있는 집무실을 향해 기도를 드리고 고개를 숙인다.
“짐승들에게 격의 차이라는 것을 알려주러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몬스터와 마물들, 그리고 수인들이 뒤섞인 투기장에 난입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광신도들아!”
“마땅히 섬겨야할 신을 섬기는 것을 광신으로 매도하는 걸 보니 역시 천박한 짐승의 본성은 어디가지 않는군요. 오늘 제가 그대에게 예의와 신앙이라는 것을 새겨드리겠습니다.”
“난 나보다 약한 놈의 말을 듣지 않는다! 나보다 강하다면 얼마든지!”
“신의 자비가 가득한 개 목줄을 채워드리죠. 당신은 잠시 후에 소장주신님의 집무실 앞에서 예배를 드리게 될 겁니다!”
타르칸과 디아네가 충돌했다.
집행자와 수인들이 서로를 물어 뜯기 시작했다.
전원이 김우진의 권속인 집행자들에게 필요한 건 신의 힘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과 보다 잘 활용할 수 있게 만드는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기르는데는 동등한 상대와의 전투만큼 효율적인 것이 없었다.
“망할 놈들, 상태 좀 멀쩡하게 보존 좀 해달라니까 아주 난도질을 해놨네.”
“진짜 그걸 먹는 겁니까?”
“뭘 놀랍니까. 수도 없이 먹어 놓고. 심지어 마물의 독기까지 다루는 인간이.”
“아니, 독을 다루는 것과 마물을 먹는 건 아무 관계가···.”
“이미 당신 뱃속으로 들어가서 소화된 양만 톤이 넘는 다니까요?”
투기장의 구석, 걸레짝이 된 마물의 시체를 수습하며 각자 요리 재료와 독기를 얻고 있는 두 명의 신들까지.
감옥의 모든 구성원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백신전에 대비했다.
* * *
“이거다. 간만에 정말로 상쾌하군.”
“···제기랄, 내가 이런 기분 나쁜 곳을 다시 오게 되다니.”
새카맣게 죽어버린 하늘, 정상적인 생명체라고 느껴지지 않는 어둠의 땅.
이미 멸망을 맞이하고 아카식 레코드로부터 서서히 멀어지는 종말 차원에 두 명의 인영이 발을 들였다.
서로 극과 극의 반응을 보여주며 들어왔던 흔적을 지웠다.
“그만 투덜거려라. 도마뱀이라는 놈이 위엄이 눈꼽만큼도 없어서야.”
“위엄이 밥 먹여 주냐? 난 너랑 달리 어둠의 사도가 아니라고.”
“그렇게 질색하면서 잘도 용사들을 종말 차원에 밀어넣었군.”
“크흠, 그건 그놈들의 성장을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겉으로는 틀린 말이 없다만 글쎄.”
두리쉬마는 굳이 더 묻지 않았다.
“그래서 도착한 건가?”
“그래, 여기다.”
연옥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친 알베니우스와 두리쉬마는 여러 변방 차원을 거치며 추격을 방지했다. 거의 50개에 달하는 차원을 지나오고 나서야 본래의 목적지에 당도했다.
성장이라는, 신들의 눈길을 피한다는 명목아래 알베니우스가 용사들을 풀어놓은 곳.
그들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종말 차원에게 있어 용사란 바이러스나 다를 바가 없다. 종말 차원의 주 에너지는 마기고, 살아가는 피조물들은 마물이니까.
바이러스는 언제나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고 티가 나기 마련이다.
굉음과 폭발이, 비명과 괴성, 전투가 일어나는 곳.
알베니우스와 두리쉬마는 수백의 마물에게 둘러싸여 전투를 벌이는 수백의 용사 무리를 발견했다.
“후우, 다행히 잘 살아있네.”
수가 좀 줄긴 했지만 이런 곳에 용사들을 떨어트린 시점에서 어느 정도 예상한 바다. 저들도 각오를 다지고 알면서도 넘어왔고.
“단순히 살아 있을 뿐만 아니다. 느끼지 못했나? 이 차원의 마물들이 극히 희박하다.”
저들의 손에 차원 하나의 마물이 대부분 잡혔다는 것을 뜻했다.
알베니우스가 자세히 살피고는 감탄했다. 이곳에 방목되어 업을 쌓은 그들은 더 이상 단순한 용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개개인의 차이가 있겠지만 상위 10%정도는 집행자들과 싸워도 크게 꿀리지 않을 거다.
“역시 김우진처럼은 안 되나.”
하긴, 혼자 여러 차원을 멸망시킬만큼의 무리를 쓸어버린 것과 수백명이서 고작 차원 하나의 마물들을 쓸어버린 건 격이 다르지.
“차원 하나의 마물은 결코 고작이 아니다만, 이번만큼은 도마뱀 네 의견에 동의하지.”
두리쉬마가 공간의 균열을 열었다.
“네가 저들을 이끌고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라.”
“너는?”
“용사들이 설치는 차원에서 마물들을 모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그건 그렇네.”
“그럼 나중에 보지. 무너진 백신전에서 재회의 인사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군.”
“동감이야.”
두리쉬마가 사라졌다. 알베니우스는 용사들이 전투에서 승리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대략 두 시간에 걸친 전투가 끝나자 그들 앞에 나섰다.
“모두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
“······.”
그리고 퀭한, 앙상하고 피골이 상접한 좀비들과 마주했다.
“알베니우스님?”
“드디어 오셨습니까?”
“···어?”
그들은 마물의 시체를 정리하고 불을 피워 그것들을 구워먹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지?”
“밥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미친, 마물을 먹는다고?”
마물의 육신에는 마기와 함께 지독한 독기가 들어 있어 절대 먹을 수 없다. 연옥의 죄수 중 한 명이 기이할 정도로 특이해 어떻게든 맛있게 만들지만 보통은 그게 일반적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식량을 얼마나 줬더라.
여러 사건이 겹치면서 생각보다 이들을 다시 만나러 오는 게 늦어졌다.
“그런다고 마물을 먹으면서 버텨? 그러다 다 죽으면 어쩌려고···!”
“괜찮습니다.”
우적, 마물의 고기를 한 웅큼 베어 문 용사들의 대장, 테론이 대꾸했다.
“이미 죽을 놈은 다 죽었으니까. 지금 남은 놈들은 모두 적응했습니다. 이제 와서 걱정해주시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뭐라고?”
어쩐지 용사들의 수가 절반 가까이 줄어 있었다. 단순히 마물들과 싸우면서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런데 저희를 이렇게 만드신 당사자가 그런 말씀을 하시니 조금 불편합니다만?”
“옳소.”
“드래곤 고기는 어떤 맛일까 궁금합니다. 조금 때어준다고 닳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적어도 이 시궁창 같은 마물 고기보다는 낫겠죠.”
“······.”
독기 가득한 용사들의 시선에 알베니우스가 뒷걸음질 쳤다.
“···사람은 화가 나면 앞뒤 분간을 못하고 일을 벌이다가 나중에는 결국 후회하게 되지. 너희들에게는 진정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으니 나중에 다시 오겠다.”
“잡아, 저 개새끼!”
“이 씨발, 도마뱀!”
“드래곤 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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