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3. 아무것도 >
“···그리고 지금이 되었지.”
이야기가 끝났다.
김우진은 이야기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율리아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최면에서 풀리듯, 그녀가 움찔 몸을 떨었다.
“···되게 많은 일이 있으셨네요.”
“많은 일이 있었지.”
“신들을 싫어하실만 해요.”
“뭐, 자비를 받은 것도 사실이긴 해.”
목적이야 어찌되었든 그 알량한 자비가 없었다면 김우진은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그런데 잠깐만요.”
“왜?”
“이야기가 뭔가 이상하게 끝났는데요?”
“이상하다고? 이 다음 이야기는 그냥 20년 동안 고문 당하다가 연옥의 소장으로 부임한 게 끝인데?”
“아뇨, 소장님 이야기 말고요.”
뭐가 부족하지? 잠시 고민하던 율리아가 곧 해답을 찾아냈다.
“세이드! 그래서 세이드는 어떻게 된 건데요! 아크 리치 드래곤한테 씹혀 먹혔다면서요!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아크 리치 드래곤이 토벌되고 신들과 싸울 때까지도 세이드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에는 나오지 않았다.
“아, 그거···.”
“그거?”
“뻥이야.”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요?”
“거기서 나는 끌려갔고 여기까지 왔지. 그 이후의 이야기는 글쎄.”
“그렇게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요! 다 알려주신다면서요!”
“내가 알고 있는 건 다 알려줬잖아.”
“아니, 그건 맞지만···.”
“알베니우스가 알 텐데. 말 안 했어?”
“자세한 사항은 소장님이 알고 있으니까 소장님한테 들으라고 했어요. 그냥 유품을 주면서요!”
“유품이라면 그 목걸이? 오랜만이네. 그거.”
유품을 건네받은 김우진이 목걸이를 열었다. 해맑게 웃고 있는 율리아의 어릴 적 사진이 있었다.
“근데 계약을 맺고 나는 곧장 붙잡혔는데 세이드가 어떻게 됐는지 어떻게 알아?”
“···사기 당했어요.”
“그래도 아마 살아는 있을 거야. 앞으로 평생 만나지는 못하겠지만. 아, 상황이 이렇게 돼서 그건 아닌가.”
“그게 무슨 소리에요?”
“계약 조건 중 하나거든.”
베리안이 용인하고 김우진이 추가한 여러 조항들 중 글라크와 글라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안위도 있었다.
하지만 그 조건은 신들의 입장에서 절대 무조건적으로 들어줄 수 없었다.
“자신들의 추악한 모습을 봐버린 자들이 한둘이 아니거든.”
그들은 신이 일개 피조물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보았다. 반드시 잊혀져야 할 진실.
신들은 김우진의 요구에 사족을 달았다.
“건드리지 않는 대신 차원 전체에 권능을 건다고 했었지, 아마.”
차원 자체를 봉인시켜 신들이 아니면 나올 수도, 들어갈 수도 없게 한다고 했다.
“놈들이 약속을 지켰습니까?”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을 맺었으니 지킬 수밖에. 나는 그 직전에 빠져 나왔고.”
어느새 왔는지 알베니우스는 소파에 앉아 태연히 다리를 꼬고 있었다.
“이 사기꾼 도마뱀!”
그를 발견한 율리아가 냅다 소리쳤다.
하이엘프가 드래곤한테 도마뱀이라고 부르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김우진이 교도관을 시켜 팝콘을 주문했다.
“왜 살아 있다고 말 안 해줬어요?”
“죽었다고도 안했잖아.”
“죽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죠!”
“그 부분은 인정해.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세이드가 안부를 전해달라면서 절대로 자기가 처한 상황은 말하지 말라고 했거든. 걱정할 거라고. 그래서 그냥 김우진에게 떠넘겼지.”
“평생 갇혀 있는 걸 알리기 싫어서 죽은 것처럼 느끼게 했다고요? 그게 말이에요?”
“예나 지금이나 무책임한 건 여전하네요.”
김우진이 혀를 찼다.
“저를 연옥에 투입시키려고 속인 건 아니고요?”
“물론 네가 적임자이긴 했지. 하지만 네가 오기 전부터 원래 갈 사람이 있었어. 너도 알잖아?”
“···알죠.”
지금은 데이드람의 세계수를 모시고 있는 하이엘프가 있다. 본래 연옥으로 갈 당사자는 그였다.
율리아는 그 대신 연옥으로 가겠다고 스스로 자청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때는 세이드가 죽은 줄 알았으니까.
물론 죽지 않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국 신들을 어떻게 하지 않는 이상, 만나지 못하는 건 똑같으니.
“···이길 수 있겠죠?”
“이겨야지.”
이길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생존의 문제이며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전쟁이다.
“···어쨌든 속은 기분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낫네요. 이겨야만 하는 이유가 또 생겼어요.”
율리아가 의기를 다졌다.
“제가 말씀드렸나요? 세이드가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그래. 세이드는 너보고 딸 같다고 했고.”
“처음부터 절 알고 계셨으면서 왜 모르는 척하셨어요?”
“긴가민가하기도 했고 굳이 아는 척 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하긴. 아무튼. 어렸을 때부터 세이드가 절 키워줬어요. 부모님은 차원 종말 전쟁 때 돌아가셨거든요. 한 2백년 쯤 됐나?”
원래는 그 부분은 아무 생각 없었거든요?
“근데 소장님 이야기를 들으니 이것도 신들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그건 조금 억측이 아닐까 싶은데.
김우진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 * *
알베니우스도, 율리아도 나갔다. 김우진은 창밖을 보며 커피를 기울였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지.”
여기까지오는데 율리아의 공이 컸다. 이 정도의 과거 이야기를 해주는 것 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것 말고 말입니다. 주신을 놓친 것 말입니다.”
“그건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고 말고.”
모든 패를 깠음에도 놓쳐다는 건 꽤나 쓰디쓴 실책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계약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쪽에는 주신들을 상대할 적절한 상대들이 있다는 것.
하지만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
저들은 오만하지만 바보가 아니며, 그 오만함도 김우진으로 인해 많이 사라졌으니까.
“만약 네가 신이라면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 같지?”
“제가 신이라면 말입니까?”
“그래. 거만해진 새끼들의 교육용 인강을 결제했는데 그 인강이 알고 보니 랜섬웨어였다면?”
“그거 바이러스 아닙니까?”
“비슷한 악성 프로그램이지. 심지어 방화벽이 랜섬웨어를 오히려 백신으로 인식해서 지워지지도 않아.”
“그럼 포맷해야죠.”
“포맷이라···.”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컴퓨터에 대입해 보았을 경우고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다.
랜섬웨어는 김우진, 방화벽은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이다. 그것을 포맷해 없던 일로 하겠다는 걸 결국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을 해 계약을 무효화시킨다는 건데 그런 게 말처럼 쉽다면 신들은 진즉에 그렇게 했을 거다.
정말 만약에 그 방법을 쓴다고 해도 이렇다 할 대처 방법이 없다. 그저 지금처럼 전력을 모으고 무기를 개발해 전쟁에 대비하는 것 외에는.
“차라리 이곳도 하위차원이면 좋겠는데.”
하위 차원이 된다면 율리아를 비롯한 여러 신들도 힘이 제약되겠지만 적어도 두리쉬마와 김우진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옥은 하위 차원 따위가 아니었다. 당연히 신들은 힘을 투사하는데 어떠한 제약도 없다. 계약만 아니라면.
“그래도 일단 최대한 할 수 있는 걸 해야겠지.”
세계수들에게 성장촉진제를 놓고, 데르카인을 닦달해 신에게도 통하는 무기를 만들고, 신이 된 이들이 보다 원활하고 능숙하게 신력을 다룰 수 있도록 조율하고.
그리고···
“···두리쉬마를 내보내자.”
“가능하겠습니까?”
“주신이 그 고초를 겪었으니 저놈들도 혼란스럽기 그지없을 거야. 포위망이 멀쩡할 리가 없어 무조건.”
두리쉬마는 이곳에 있는 것보다 종말 차원으로 돌아가 마물들을 모으는 게 베스트다. 더불어 알베니우스도 함께 보내 숨겨 두었다는 용사들까지 끌고 온다면 더 좋고.
“일단 확인해보겠습니다.”
“확실하게 내가 직접 확인하지.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겠어.”
그의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신들과의 마지막 결전이 그리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리고 베리안의 그 제안도 뒤가 구린 냄새가 나고.”
애초부터 단순히 신들을 교육하기 위해서라는 건 믿지 않았다. 물론 그런 의도도 있긴 하겠지만 분명 다른 게 있겠지.
그게 뭔지 이제 곧 밝혀질 거다. 좋든, 싫든.
* * *
- 커.
릴리는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 줄여. 다시.
함께 다니던 그 즐거운 나날들을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달라진 모습으로 다닌다니.
- 어흥!
나르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지 짧은 투정을 부렸다.
“꺼져라.”
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어둠의 사도, 두리쉬마는 귀찮음에 손을 휘저었다.
그는 신들을 잡아먹은 뒤 그 업으로 대부분의 힘을 되찾았다. 자그마한 인형 같던 체구는 평범한 트롤의 크기가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본모습 형태로 있고 싶었지만 차원에 부담을 주는 일이기에 그것만큼은 자제하고 있었다.
- 친구!
- 낑!
“내가 왜 새파랗게 어린 네놈들이랑 친구냐.”
- 크기?
“어이가 없어서 무어라 대꾸해야할지 감도 안 잡히는군.”
어쨌든 이 꼬맹이들을 상대해야 하는, 이 답답한 생활도 이제 끝이다.
김우진과 합의가 끝났고 이미 외부 또한 확인했다. 주신이 죽을 뻔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저들의 포위망이 훨씬 느슨해졌다.
알베니우스의 능력이라면 빈틈을 노려 은밀하게 빠져나가는 것이, 어렵긴 하겠지만 불가능은 아니다.
“가능하겠지? 도마뱀?”
“···끄응, 불가능은 아니긴 한데. 가다가 걸리면 어떡하지?”
제기랄, 어느새 그의 옆에 자리한 알베니우스가 투덜거렸다.
“안전만 추구해서는 신들을 이길 수 없다.”
“알아, 안다고.”
- 가?
- 끼이?
“그래, 간다.”
“살아서 또 보자, 세계수들아.”
거인과 차원룡이 사라졌다.
* * *
“···어둠의 사도가 연옥을 빠져나갔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은 없다. 차원룡은 스스로를 숨기는데는 성공했지만 두리쉬마가 가진 마기를 온전히 감추는데는 실패했다.
작은 전투가 있었고 집행자 다섯이 죽었다. 그리고 그들을 놓쳤다.
“···추격합니까?”
“······.”
“주신이시여.”
“···추격하지 마라. 그놈들을 잡든, 죽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상석에 앉은 알비츠가 공허한 눈으로 대답했다.
“···하하하.”
허탈한 웃음이 조용한 대전을 울렸다.
“베리안, 베리안, 베리안, 베리안···!”
콰득, 의자의 손잡이가 부서졌다. 새하얀 냉기가 주변의 모든 것을 얼려버렸다. 신들이 황급히 신력을 끌어 올리며 거리를 벌렸다.
“···괜찮으십니까?”
알비츠는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상체의 절반이 뜯겨져 나갔다. 왼 어깨와 가슴은 말 그대로 소멸했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 있었다. 신력의 힘이었다. 주신의 권능이었다.
“괜찮을 리가 있겠느냐.”
알비츠는 베리안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아카식 레코드의 성역에서 권능을 쓸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거부하고 싸웠다.
결과는 당연히 패배. 그럼에도 베리안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어리석은 선택이다만,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는데 널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네 헛된 망상은 우주의 거대한 혼란을 야기할 거다. 그리고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우주를 파멸로 이끌겠지.’
‘아니, 더 안정적으로 변하는 거다. 단순한 의지 덩어리가 아니라 진짜 신이 이 세상을 다스릴 테니까.’
‘죽여라, 내 눈으로 그 꼴은 절대 보고 싶지 않으니.’
‘그럼 안 되지. 넌 주신이고 주신으로서 절대신이 될 나를 보필할 의무가 있다.’
‘절대신? 아주 염병하고 있군.’
베리안은 그의 상체 일부를 뜯어내고 신으로서의 권능을 제약했다.
‘우선은 이 정도로 해두지. 내가 아카식 레코드를 온전히 흡수하면 더 확실하게 해주마.’
‘이 개자식이···!’
그 제약은 알비츠를 죽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허나, 그의 생각까지는 지배하지 못했다.
“아무 것도 하지 마라. 김우진이 무엇을 하든지.”
“하지만···.”
“이런 꼴이 되니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가 보지?”
“아, 아닙니다!”
차가운 한기에 신들이 몸을 떨었다. 아무리 제약을 당했다고 해도 주신은 주신이었다. 일반 신 몇 정도는 가뿐하게 얼려버릴 수 있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살면서 이런 생각이 들 줄은 몰랐지만 차라리 김우진이 베리안을 죽여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만약 베리안이 아카식 레코드를 흡수하는데 성공한다면 김우진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이 없을 테니까.
사나운 눈으로 그들을 흘긴 알비츠가 의자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깔끔하게 뜯겨나간 어깨가 욱신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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