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103화 (103/150)

# < 102. 용사 김우진(11) >

“···정말로 신들을 죽였군.”

“이제 알베니우스님 정도는 눈 감고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신을 둘이나 잡아먹었으니 당연하지. 포식. 정말 미친 권능이야.”

알베니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김우진은 무려 두 명의 신을 포식한 막대한 기운에 또 다시 소화불량에 걸린 것처럼 트림을 해댔다.

하지만 성장한 만큼 그릇도 넓어졌는지 신을 먹었음에도 이전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긴, 튀어야지.”

“튀어요?”

“고작 신 둘 죽였다고 백신전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물론 신을 죽였다는 것 자체가 놀랍긴 하지만 놈들은 말 그대로 백신전이야. 단순히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아직 98명의 신들이 남아 있다는 뜻이지.”

“튈 수는 있습니까? 여기 사람들 다 데리고.”

“······.”

“충분한 대답이 됐네요.”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비루하게 김우진과 알베니우스의 손에 죽어버리긴 했지만 신들은 기본적으로 세계를 다스리는 정점이었다.

그들의 감시망을 피해 도망 다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예 불가능까지는 아니야. 일단은 내가 명색이 차원룡이거든.”

“혼자서만 가능하면 지금 상황에서는 딱히 의미가 없습니다만.”

“···정말로 저들 전부를 살리겠다고?”

“딱히 동정심이나 연민 같은 건 아닙니다.”

김우진은 그렇게 대인배도, 선한 사람도 아니었다.

이건 그냥 자기만족이다.

“내 인생을 바쳐서, 내 손으로, 내가 구한 사람들이 고작 그 개새끼들의 농간에 죽어나가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거든요.”

그건 김우진의 지난 수십년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것과 같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이곳이 멸망해버린다면, 이곳의 사람들이 다 죽어버린다면 이 세상을 살리기 위해 죽어간 용사들의 희생은? 그의 노력은?

신들에게는 우습겠지만 그에게는, 이 차원을 위해 애쓴 모든 용사에게는 아니었다.

“잠깐만. 전제가 너무 신들이 이 차원을 멸망시킨다 쪽으로 기운 거 아니야?”

“그럼 멸망 안 시킵니까? 제 입장에서는 고맙지만 여기 인류는 신들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크흠. 확실히 신들의 옹졸함이라면 그럴 만 하긴 해.”

애초에 김우진과 알베니우스를 끝장내기 위해 간신히 종말을 막은 차원에 수백만의 마물들을 풀어놓는 시점에서 이야기는 끝났다.

저 새끼들은 버러지고, 자신들이 최우선으로 여기는 애새끼다. 자기들을 거역하면 때를 쓰는 게 아니라 그냥 다 멸망시켜버리는 권력을 쥐어서는 안 되는 유형이 권력을 쥔 자들.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방법이 있을 리가.”

“그냥 버티고 버티다보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신들을 너무 무능하게 생각하는 것 아니야? 이미 신들이 두 명이나 죽었는데 멍청하게 지금까지처럼 대응하지는 않겠지.”

“그렇겠죠?”

“그렇지.”

썩어도 오랜 시간 이 우주를 관장하던, 지금도 관장하고 있는 자들이다. 오만할지언정 아둔하지는 않을 거다.

“···정 그렇다면 일단은 준비를 해보긴 하지. 넌 흡수한 신들의 힘을 다스리는데 최선을 다해.”

그래야 그나마 도망칠 가능성이라도 생길 테니까.

“예.”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김우진은 반역자입니다. 모든 신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신탁이 내려왔어요!”

“그는 신이 공인한 반역자입니다. 그를 감싸줄 필요가 없습니다!”

“헛소리! 그는 세계를 구한 영웅입니다. 두 번이나! 그가 아니었으면 당신들이 여기 멀쩡히 살아서 그딴 헛소리를 내뱉을 수 있을 줄 압니까?”

“그리고 신? 인간은 도구로 여기고 마음대로 죽이는 것들이 신입니까? 신이라는 것들이 왜 김우진 용사에게 죽었습니까?”

“심지어 두 번째 종말은 그 잘난 신이라는 것들이 유도한 거라는 이야기도 못 들었습니까? 저게 악마지, 신입니까!”

인류는 매일 같이 뜨거운 열전을 벌였다.

신들이 공인한 반역자 김우진을 신에게 제물로 바쳐야 하는가, 그러지 말아야 하는가.

신이라는 이름값에 일부는 지레 겁을 먹었지만 대다수의 인류는 그렇지 않았다.

김우진이 그들에게 준 것이 너무 크기도 했으며, 신들이 행한 행동과 종말을 유도했다는 것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한 신들을 과연 신으로 섬겨야 하는가.

글라크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인류는 그렇지 않았다. 없는 곳에선 왕도 욕하는 게 사람이라고, 자신들을 죽이려한 신들이라고 욕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우리는 합의 했네. 신들이 다시 한 번 자네를 죽이려 한다면 연합은 자네의 편에서 끝까지 싸우기로.”

“괜찮은 겁니까? 신들인데?”

“자네가 말을 듣지 않았다고 글라크를 멸망시키려고 한 자들이네. 이미 한 번 명령을 거부한 우리를 과연 멀쩡히 살려두겠는가?”

“···부정할 수가 없네요. 제 편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대가 우리에게 해준 것에 비하면 보잘 것 없네.”

비엔데르크의 왕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신들의 오만함과 태도를 보았다. 뿌리 깊게 박힌 불신과 혐오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김우진이 어느 정도 의도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나와 주니 제법 감동적이었다.

그때였다.

────!

하늘이 열렸다.

“이건···!”

익숙한, 하지만 이전보다 더 진한 느낌에 왕과 김우진이 신음을 삼켰다.

또 다른 신이 강림했다.

“김우진. 숨어 있어라. 내가 먼저 신들을 맞이하겠다.”

“하지만···.”

왕은 대꾸하지 않고 채비를 마쳤다. 곧장 병력을 이끌고 신이 강림한 곳으로 갔다. 하늘을 꿰뚫는 새하얀 빛의 기둥 덕분에 헤매는 일은 없었다.

‘저기 있다.’

그렇게 신과 마주한 순간,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만나기만 하면 김우진과 함께 저항하리라 생각했던 비엔데르크의 왕은 자신도 모르게 의지를 굽히고 무릎을 꿇었다.

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본능이었다.

신이 무릎을 꿇은 인류는 천천히 내려 보았다.

입이 열린다.

“용사, 김우진을 데리고 오라.”

그 명령에 왕은 거부할 수 없었다.

“···예.”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직감했다. 차원이 다른 진짜 신이 강림했다고.

감히 저항할 생각 따위는 들지도 않았다.

‘김우진, 미안하다···!’

왕이 신음을 삼켰다.

* * *

비엔데르크의 왕이 머물던 화려한 궁전의 대전. 그곳을 불청객들이 차지하고 앉았다.

끼익-

김우진의 대전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황금 옥좌에 앉은 남자와 그를 수행하듯 나란히 선 자들이 수십이다.

김우진은 그들 모두가 신이라는 것들을 깨달았다. 일개 수행원조차도.

“네가 김우진이구나.”

남자는 눈처럼 새하얀 백발을 가지고 있었다. 탁한 은빛의 눈은 조금 공허해 보였다.

지금까지 봐온 신이 단 둘이지만 그들과 눈앞의 남자를 비교하면 태양과 반딧불이의 차이였다.

마른 침을 삼켰다.

이길 수 있을까? 없다. 필패다. 같은 신임에도 격이 다르다. 그럼에도 굽히긴 싫었다. 어차피 뒤질 것, 굽힐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다.

탐색하듯, 김우진을 훑던 남자가 태연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놀랐다.”

“놀라?”

“천박하구나. 신을 상대로 할 언행에는 조금 더 예의가 깃들어 있어야 하거늘.”

“헛소리하고 있네.”

남자의 눈에 깃든 경멸을 김우진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 넘겼다.

“살기를 집어넣어라. 나는 너와 드잡이질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니.”

“뭐라고?”

“거래. 그래, 거래를 하러 왔다.”

“거래라고? 갑자기 왜?”

“행운이 오면 의심하지 말고 그저 받아라. 위대한 신이 네게 베푸는 자비이니.”

“너무 자비로워서 마물들을 보냈나 보지?”

“그건 작은 사고일뿐이다. 모든 일에는 만약이라는 게 존재하지.”

“신이라는 작자에게 만약이 존재한다면 그건 신이 아니지 않을까?”

“이 건방진 놈이 어디서!”

“감히!”

“멈춰라.”

수행원들이 발끈했지만 남자가 손을 들자 조용해졌다. 그가 웃었다.

“재미있는 놈이구나. 하긴, 그러니 우리의 예상을 깨트리고 여기까지 왔지. 왜냐고 물었느냐?”

질문이 아니었다. 그냥 원하는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과정이었다.

“백신전의 신이 누군가의 손에 죽은 것은 우주가 생겨난 이래로 처음이다.”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다.

“넌 처음으로 백신전의 명예에 흠집을 냈으며, 최초로 신을 죽인 인간이 되었다.”

“영광으로 알아야 하나?”

“당연하다. 앞으로 두 번 다시없을 행운이니.”

남자가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수행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고급스러운 와인글라스에 술을 따라주었다.

“해서 나는 네게 한 번의 기회를 주어볼까 한다.”

“기회?”

“살고 싶으냐?”

“죽고 싶은 사람도 있나?”

“본래라면 넌 죽어야 한다. 감히 신에게 반기를 든 것으로도 모자라 신을 둘이나 죽였으니. 아, 알베니우스는 잘 있나?”

“본론만 이야기 해.”

“재미없는 놈이었군.”

남자가 술을 음미했다.

“이 세상에는 너 같은 놈들이 많다.”

“무슨 뜻이지?”

“신에게 부여 받은 힘을 자신의 것이라 착각해 마땅히 돌아가야 할 자리로 돌리지 않으려는 자들이 많다는 뜻이다.”

토사구팽을 순순히 당해주지 않는 자들이라는 뜻이었다.

“허나, 우리는 자비롭기에 주제를 망각한 그러한 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지.”

“기회?”

“스스로 주제를 알고 부여 받은 것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겠다 할때까지 자유를 잠시 억압한다.”

“···감옥이잖아?”

“감옥이라. 너희 인간들은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

“나도 거기 가두겠다고?”

“아니, 그럴 리가. 어떻게 일개 피조물들과 신을 죽인 자를 같은 선상에 둘 수 있겠느냐.”

얼마 후면 그곳의 책임자 자리가 공석이다.

“어떻게, 책임자가 되어볼 생각이 있느냐?”

“감옥의 소장이 되라고?”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우리는 그곳을 연옥이라 부른다.”

“대체 왜?”

“말했잖느냐. 신이 죽은 건 최초다. 그리고 신 또한 미지의 것에는 두려움을 가지지.”

명색이 신이라는 자들이 너와 싸우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충분한가?”

“그러니까 신이라는 놈들이 나한테 겁을 먹었다, 이건가?”

“그래.”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나는 조금 다르다. 일개 신 따위가 아니거든.”

“뭐, 주신이라도 되나?”

남자는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그게 대답이 되었다.

“···씨발이네, 진짜.”

“그들에게는 위기감이 없었다. 그저 누리기만 해서 신으로서의 자각도, 위엄도 부족하지.”

“그러니까 나를 신들에게 경각심을 새기고 위엄을 만들 도구로 쓰겠다고?”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신 둘을 죽였는데 이런 취급이라니. 우스운 건 눈앞의 상대에게 차마 반박할 수가 없다는 거다.

“거절하면?”

“죽는다. 나를 네가 죽인 떨거지들과 같다 생각하지 말거라.”

“···빌어먹을.”

“네게 나쁘기만 한 제안은 아니다. 인간은 보상이 있어야 열의를 보이지. 조건은 간단하다. 50명. 50명의 죄수들을 자발적으로 출소시킨다면 너의 죄도, 너에게 얽매여진 굴레도 모두 풀어주마.”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내 말이 곧 법칙이다.”

“지랄하고 있네.”

김우진이 한 소리가 아니었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알베니우스가 그의 뒤에 있었다.

“김우진, 신들의 말을 믿지 마라.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놈들이 저놈들이다.”

“알베니우스. 신수가 좀 핀 것 같구나.”

“닥쳐라, 베리안. 그 역겨운 낯짝을 보고 있으니 끔찍하기 그지없군.”

“어떻게, 난 너보다는 알베니우스님의 말에 더욱 신뢰가 가는데.”

남자, 베리안이 쯧, 혀를 찼다.

“내 앞에 그 낯짝을 들이밀다니. 간이 커졌구나. 자리가 너를 살렸다, 알베니우스.”

“헛소···!”

따악, 베리안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무형의 힘이 알베니우스의 입을 봉했다.

“허나 자비는 여기까지다.”

“지금 뭐하는 거지?”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믿을 수밖에 없는 제안을 하마.”

신의 권능이 발현되었다. 김우진이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 빛으로 이루어진 종이 하나가 펄럭이고 있었다.

“하찮은 도마뱀아. 아무리 너라고 해도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는 들어보았겠지.”

“···그게 무슨?”

“우주의 절대 법칙이 보장하는, 신조차 결코 어길 수 없는 절대적인 계약이다.”

“맞습니까?”

말을 하지 못하는 알베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스러운 눈에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냐는 듯한 느낌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면 정말로 나를 감옥의 소장으로 만들겠다고?”

“연옥이다.”

“고작 나태한 신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

“고작이 아니다, 김우진. 신들이란 위대한 존재지.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나태해질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경각심을 줄 존재가 다시 나올 수 있을 것 같더냐?”

어둠이라는 적이 존재하나 이미 세를 공고히 하고 있는 신들에게 위기감을 줄만큼 거대하지 않다. 사전에 싹을 미리 다 잘라두었기 때문이다.

신일 될 만한 자들도, 위협이 될 만한 자들도 오래 전에 모두 박멸 당했다.

그래서다. 고작 신 둘 죽었다고 지레 겁먹고 겁쟁이들이 된 것은. 때문에 주신들은 이 상황을 이용하기로 합의했다.

베리안은 아주 조금의 사심이 더 있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묻겠다. 받아들일 테냐?”

“···조건이 있다.”

“끝까지 건방지구나. 좋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일단 들어는 보지.”

“이 차원을 더 이상 건드리지 마.”

“참으로 선량한 용사로군. 자신들이 구원한 이들을 끝까지 책임지려 하다니. 위대한 용사의 표본 아닌가!”

베리안이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한 편의 연극 같은 그 모습이었다. 뚝, 웃음이 한순간에 그쳤다.

“그러도록 하지. 끝인가?”

“계약서를 조율하는데 한 가지로 끝날 턱이 없지. 당분간 알베니우스도 건드리지 마. 그리고···.”

약 한 시간, 김우진은 계약서에 원하는 사항이나 이상한 사항들을 수정했다. 베리안은 턱을 괸 채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좋군. 네가 바라는 것을 다 들어주었으니 그럼 이번에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한 가지 추가하겠다.”

“뭐지?”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연옥의 소장이 되기 전에 넌 감히 신을 죽인 책임을 물어 감금될 것이다. 끔직한 고통을 받으며 매일 매일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겠지.”

시간은 20년이 좋겠군.

“네가 용사로서 활동한 기간과 비슷하지 않느냐.”

“···끝까지 추잡하군.”

“네 요구들을 모두 들어 주었다.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협상은 끝이다.”

“···좋아.”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에 조항이 추가되었고 신과 김우진이 서명했다.

“어떤 수를 써서든 자발적으로 50명만 출소시키면 된다는 거지···.”

그렇게 최초로 신과 인간이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을 맺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