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99. 용사 김우진(8) >
제약이라는 건 꽤나 골치 아프다.
제약을 당하는 당사자에게만. 제약된 자와 싸우는 상대에게 있어 적의 제약은 꽤나 즐거운 이점이다.
김우진과 싸우는 열명의 집행자들이 그러했고, 김우진이 그랬다.
“말도 안 돼! 일개 용사가 어떻게 이 정도의 격을···!”
“용사 수백을 잡아먹은 미친 괴물을 잡았는데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
종말을 집행하는 종말의 사도들은 무척이나 다양하지만 사룡, 티타니아드는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드래곤이라는 종족은 타고난 강함을.
로드라는 직함은 그녀가 그 중에서도 압도적이었음을.
처절한 복수심으로 단순한 리치 드래곤이 아닌 아크 리치 드래곤이 되었음은 그녀가 어둠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마기를 부여받았는지 증명했다.
그렇기에 사룡은 수백 명의 용사들을 잡아먹으며 차원 글라크를 종말의 벼락 끝까지 밀어 붙이던 최악의 광룡이 되었다.
그런 그녀를 죽이는 자가 평범할까?
그런 그녀를 죽이고 그 정수를 취한 자가 평범할까?
아니다. 김우진은 사룡이라는 괴물을 죽이기 위해 일반적인 용사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고생을 했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그 이상의 업을 쌓았다.
김우진은 이미 어지간한 용사는 물론 집행자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다만, 집행자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들은 글라크의 담당이 아니었다. 그저 알베니우스를 쫓는 추격대였으며, 우연히 글라크에 알베니우스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명령에 따라 온 것일 뿐이었다.
그게 그들의 불행이었다.
“커헉···!”
첫 번째 집행자가 죽었을 때부터, 아니 첫 충돌부터 전투는 시종일관 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도저히 열 명의 집행자와 한 명의 용사가 싸운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일방적인 전투.
“대체 어떻게 되먹은 거냐!”
“어떻게 용사 따위가!”
“도망쳐라!”
“제약만 없었어도!”
뒤늦은 후회해였고 뒤늦은 후퇴였다.
이미 다섯 명의 집행자들이 김우진의 손에 목이 꺾였다. 그들이 간신히 등을 돌리고 도망치려고 할 때 쯤, 그들은 잊고 있었던 본래 목적의 존재를 깨달았다.
“큭···?”
“이건···!”
“알베니우스!”
공간이 뒤틀리며 도망치는 자들의 육신을 낚아챘다. 단순히 움직임을 구속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들의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봉쇄했다.
“김우진!”
“말 안 해도 압니다!”
“이 빌어먹을 놈들!”
“신께서 결코 용서치 않으실 것이다!”
“신이시여! 이들에게 천벌을!”
그날, 알베니우스를 잡으러 왔던 열 명의 집행자들이 모두 실종되었다.
그리고 김우진은 또 다시 소화불량에 걸렸다.
* * *
백신전. 신들의 머무는 신성한 곳에 비보가 전해졌다.
“글라크에 보냈던 모든 집행자들이 죽었습니다!”
“알베니우스에게 그 정도의 힘이 남아 있었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
위대한 주신, 알비츠가 고개를 저었다.
한둘이라면 모를까, 열 명의 집행자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은 믿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더 큰 문제는 그들에게 부여한 신의 힘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건 정말 믿을 수가 없군.”
“하지만 정말입니다. 집행자들을 보냈던 신들이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말하고 있습니다. 연결이 끊어졌다고.”
알비츠의 표정이 굳었다.
권속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다. 죽었거나, 신을 속일 정도로 강대한 적이 수작을 부렸거나.
허나, 이 우주에 후자가 가능할리는 없으니 전자다.
“···믿을 수가 없군. 칼카르. 알베니우스가 중상을 입은 게 확실한 건가?”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냐? 내 손속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하지만 살아서 도망쳤군.”
“뭐냐, 베리안. 한 번 해보자고?”
“그만.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다.”
알비츠가 이마를 짚었다.
“알베니우스의 흔적이 발견된 곳이 글라크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글라크라니.
유례없을 정도로 막대한 마기를 품어 신들조차 희망을 버려버렸던 곳이다. 세계수가 자라나던 대지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 결정은 훨씬 더 빨랐을 거다.
“그런데 버리기로 결정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룡이 죽어버렸지.”
용사 김우진이 사룡을 죽였다. 의아한 구석이 많았다. 그들이 판단하기에 김우진은 죽었다 깨어나도 사룡을 죽일 수 없었으니까.
포식이라는 권능은 분명 무척이나 좋은 게 사실이지만 사룡은 그저 좋은 정도로는 상대할 수 없는 자였다.
신들이 직접 개입하지 않고서는 막는 게 불가능하며 신들은 굳이 차원 하나 때문에 업의 손해를 감수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렇게 버렸는데.
“알베니우스의 흔적이 발견된 차원에서 집행자 열둘이 죽고 용사 김우진은 불가능할거라고 판단했던 종말을 막아냈다. 이게 과연 우연인가?”
“두 개를 함께 섞어놓으면 그럴듯하지. 알베니우스가 용사 김우진과 붙어먹었다.”
알베니우스가 종말을 막는 김우진을 도왔다면 사룡 티타니아드가 쓰러진 것도 납득이 간다.
알베니우스는 비록 신도 집행자도 용사도 아니지만 신의 힘을 타고난 차원용이니까.
“그렇다면 김우진도 반역자군.”
“제 딴에는 종말을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랬겠지만 감히 신의 뜻에 반기를 든 자를 살려둘 수는 없지.”
“그러면 죽이는 걸로.”
“기다려라.”
얌전히 듣고 있던 베리안이 제재를 걸었다.
“반대한다는 건가?”
“아니, 그런 뜻이 아니다. 반역자는 죽어야지. 다만, 쉬운 길을 두고 어렵게 갈 필요가 없잖느냐.”
베리안이 손가락 세 개를 폈다.
“놈은 용사고 세상을 구했다. 그리고 세상을 구한 용사에게는 새로운 길이 주어지지.”
“그렇군.”
“나쁘지 않은 방법인데.”
주신들이 동의했다. 신들 또한 그의 계책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글라크를 담당하는 신이 누구냐.”
* * *
사룡을 죽인지 삼주가, 알베니우스를 구한지 삼주 하고도 하루가 더 지났다.
그 사이 무너진 비엔데르크의 왕도는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고 인류는 마침내 더 이상 마물의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삼주간의 평화,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이어질 평화.
“22일 전인 5월 22일을 전 인류의 승전기념일로 선포하겠다!”
“비엔데르크 국왕 폐하 만세!”
“헬카르스 왕국 만세!”
“인류 연합 만세!”
“김우진 용사님 만세!”
“우리가 승리했다!”
비엔데르크 왕국은 왕도를 옮겼고 그곳에서 연합의 모든 수장들이 모여 공식적인 승전과 종말의 종말을 고했다.
그리고 인류는 전 연합적인 축제를 열었다.
“가보지 않아도 돼? 모두 널 찾고 있는데.”
“원래 그런 놈입니다.”
“조용한 게 좋습니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졌지만 인간의 기쁨을 온전히 막지는 못했다. 도시마다 존재하는 모든 마법 전등이 빛을 발했고 닿지 않는 곳에 화롯불이 지펴졌다.
술과 음식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졌고 인류는 먹고 마시며 생존의 기쁨을 누렸다.
김우진은 그 모든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임시 왕궁의 지붕에서 알베니우스, 세이드와 함께 대작했다.
“뭐, 알아서 해라.”
꺼억, 알베니우스의 입속에서 진한 알콜향이 났다.
“이렇게 여유로운 게 얼마만인지.”
“헌데 괜찮은 것 맞습니까? 집행자가 열이나 죽었는데 왜 아직도 아무런 대응도 없는 겁니까?”
“말했잖아. 신과 집행자들은 하위 차원에서 힘을 제약 받는다. 집행자 몇 내려보내는 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다른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뚜렷한 방법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알베니우스는 아마 당분간은 안전할 거라고 어울리지 않게 껄껄 거리며 웃었다.
“그나저나 세이드. 사진 좀 그만 봐라. 닳겠다.”
“죄송합니다.”
“율리아라고 했나?”
“예.”
“아마 곧 신들이 네게 접근할 거다. 그럼 그때 돌아갈 수 있을 거고 만날 수도 있겠지. 신들이 너까지 나와 엮여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저 혼자 가버려도 괜찮은 겁니까?”
“그러면?”
“맞아. 그러면?”
태연한 김우진의 태도에 세이드가 픽 웃었다.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난 절대 돌아갈 수 없었을 거다.”
“널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살려고 막은 거야. 고마워 할 필요 없어. 그리고 애초에 너 혼자라니? 내가 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보장은 없어. 신들이 빡대가리라서 내가 개입했다는 걸 모를 수도 있잖아!”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술잔이 몇 번 더 오고 갔고 밤이 더 깊어졌다. 김우진은 세이드와 함께 자신의 별궁으로 돌아왔다.
“알베니우스님은 어디서 주무십니까?”
“나는 신경 쓰지 마라. 하루 자지 않는다고 죽으면 그게 도마뱀이지, 드래곤이냐?”
“하긴.”
취해 잠이든 세이드를 침대에 눕히고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천장이 보였다. 여전히 기분이 묘했다.
“정말로 막은 거지.”
최근 일어난 일들은 마치 꿈같았다. 알베니우스를 만나 이것저것 배우기 시작하더니 결코 막지 못했을 것 같은 종말을 막아냈다. 신들의 사자라는 집행자들을 죽이게 된 건 옥의 티지만 일단은 좋았다.
살아남았으니 다 된 것 아니겠나.
김우진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때, 자신이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완전 낯선 곳은 아니었다. 이미 한 번, 김우진은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모든 것이 새하얀 공간. 심상세계.
“신이시여.”
우아하게 앉아 티타임을 즐기는 남자가 있었다. 스스로를 바티온이라 칭하던, 김우진을 글라크로 보내버린 신이었다.
“오랜만이구나, 김우진. 앉겠느냐?”
“예.”
그의 앞에 의자가 생겼다. 김우진이 앉았다.
“차는 카페모카?”
“예.”
달달한 아이스 카페모카가 그의 손에 들렸다.
“네 활약을 지켜보았다.”
“그러셨습니까?”
“놀랍더군. 너의 활약으로 글라크는 종말을 피하게 되었다. 그들의 신으로서, 너를 용사로 만든 당사자로서 감사를 표하마.”
“예.”
김우진은 순순히 그 감사를 받았다. 바리온의 표정이 잠시 묘해졌지만 곧 안색을 되찾았다.
“해서 용사로서 너의 임무는 끝이 났다. 넌 누구보다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했으니 이제는 너의 고향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지구로 갈 수 있다는 겁니까?”
“당연히. 그것이 처음부터 내가 네게 약조한 것이지 않았느냐.”
“예, 그랬지요. 그랬습니다.”
김우진이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니우스의 편에서 집행자를 죽여 최악의 상황에서는 신들이 그를 적대하리라 여겼으나 아닌 모양이었다.
우연일까, 아니만 감싸주기로 한걸까. 아니면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아서 김우진이 개입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걸까.
어떤 것이든 좋았다. 지구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허나,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무엇입니까?”
“네 힘은 너무도 강대해 본래 세계의 균형을 헤친다. 허니, 그 힘을 모두 있어야 할 곳에 되돌려놓고 가거라.”
“···예?”
김우진이 눈을 껌뻑였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다. 그것이 순리다.”
“순리? 왜 제가 십수 년 간 쌓아온 힘을 포기하는 게 순리입니까? 지구의 균형? 걱정 마십시오. 거기서 사고 칠 생각 없습니다. 사고를 친다면 그때 제 힘을 거두어 가셔도 아무 말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분명히 포기하라고 일렀다.”
바리온이 표정의 변화 없이 담담하게 다시 한 번 고지했다. 허나, 그것이 오히려 더욱 김우진을 열 받게 만들었다.
“싫습니다.”
“싫다?”
“이건 제가 쌓은 제 힘입니다. 신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왈가불가 할 자격은 없습니다.”
“역시 반역자란···.”
바리온이 쯧, 혀를 찼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네게 자비를 베풀었으나 너는 그것을 거부하는구나.”
“그게 어떻게 자비입니까? 십수년을 이 거지 같은 곳에서 개처럼 굴렀는데 이제 다 끝났으니 다 내놓고 가라고요?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용사로서 마땅한 마지막이다.”
“거부합니다. 이 힘은 저의 것입니다. 제 피와 땀으로 만들어낸 노력입니다.”
“끝내 악수를 두겠다는 말이군.”
바리온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김우진, 감히 신에게 반역을 들었음에도 자비를 베풀려 했다. 헌데 역시 반역자의 심성은 꼬일대로 꼬여 갱생이 불가능하구나.”
“···역시 처음부터 알고 있었군요? 그러면서 아닌 척 하고 다가온 건 무슨 의도입니까? 내가 순순히 힘을 포기하면 쉽게 죽여 버리려고 했습니까?”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1초의 텀이 있는데 주둥이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 하시죠.”
“놈! 누구 앞이라고 감히 그 따위 망발을 지껄이느냐!”
“누구 앞이긴. 양심이 터질 대로 터진 개새끼 앞이지.”
김우진의 눈을 똑바로 뜨고 으르렁거렸다.
“개새끼? 정녕 죽고 싶으냐!”
“어차피 네놈들, 날 살려둘 생각도 없을 것 아니야. 반역자라며. 이 세상에 반역자를 살려두는 새끼들이 어디 있어.”
“주제도 모르고 정도도 모르는군.”
“하위 차원에 마음대로 개입할 수도 없다며? 집행자인지 심부름꾼이지 또 보내봐. 모조리 씹어 먹어줄게.”
“기가 차는구나. 감히 신에게 반역을 하는 네가 믿는 것이 고작 그 알량한 하위 차원이더냐?”
바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대한 기운이 김우진을 찍어 눌렀다. 누르려 했다.
그러나 김우진은 견뎌냈다. 바리온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아깝구나. 반역자만 아니라면 집행자의 재목인 것을.”
“누가 너 같은 새끼를 섬길 줄 알고?”
“끝까지 건방지구나. 넌 신이 내리는 마지막 자비를 차버렸다. 후회하며 죽거라.”
따악-
바리온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김우진은 잠에서 깨어났다.
“···씨발.”
꿈이었으나 꿈이 아니었다. 신과의 만남. 김우진은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목이 탔다. 테이블에 올려진 물병을 집는 순간, 김우진은 섬뜩함을 느꼈다. 다급하게 밖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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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목격했다.
“···맙소사.”
하늘을 가득 생기고 있는 거대한 갈라짐들을.
차원 곳곳에서 균열이 벌어지고 시커먼 마수들이 몸을 비집고 들어온다.
반역자를 징죄하기 위해 신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마물들의 대규모 침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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