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99화 (99/150)

# < 098. 용사 김우진(7) >

─!

열기가 독기를 밀어낸다.

──!

염화가 마기를 집어 삼킨다.

─!

화염의 검이 사룡의 뼈를 자른다.

김우진은 사룡, 티타니아드와 오늘로서 두 번 만났고, 두 번 싸웠다.

그리고 그 두 번의 전투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압도. 누군가 상대를 압도한다. 첫 전투에서 티타니아드가 김우진을 비롯한 용사들을 압도했으며 지금은 그 반대로 김우진이 티타니아드를 압도 하고 있다.

고작 2년 남짓한 시간이 돌이킬 수 없는 차이를 만들어버렸다.

- 참담하기 그지없구나.

사룡의 날개가 찢겼다.

- 그 하이엘프 때문에 너희에게 시간을 준게 문제였다.

갈비가 부러지고 다리가 끊어졌다.

“말은 똑바로 해. 네가 준게 아니라 그분이 만들어주신 거지.”

- 그때 네놈들의 전부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다.

- 인간은 감히 이 땅위에 살아 숨 쉬어서는 안 될 생물이거늘.

- 세상을 좀 먹는 해충 같은 놈들.

“네 사정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 해츨링이 죽은 건 안타까운 일이야. 그런데 이미 씨발 그 인간들 다 네 손에 뒤졌다며? 그 왕국도 그 주변 왕국도 전부 멸망했다며. 아직도 성이 안 풀려?”

- 그래서? 그런다고 죽은 내 아이가 살아 돌아오느냐?

“그럼 이런다고 다시 살아 돌아와?”

- 적어도 그 아이의 넋을 기릴 수는 있겠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해충을 박멸함으로서.

“그래, 대화가 안 통할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모든 면에서 논리적이었다면 사룡은 사룡이 되지 않았을 거다. 아이를 죽인 왕국을 멸망시켰을 때, 만족하고 더 나아가지 않았겠지.

김우진은 그녀를 감정적으로는 동정했으나 그 이상으로 이해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분노로 인해 죽은 이들이 수억이다. 차원은 멸망 직전까지 갔고 김우진이 알베니우스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번 습격으로 멸망했을 거다.

“할 말은 그게 끝이지?”

- 내 아이의 복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

패배를 직감한 사룡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게 순순히 패배를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었다.

콰콰콰콰-

막대한 마기가 응집하기 시작했다.

- 갈 때 가더라도 하나라도 더 죽이고 가겠다.

- 이 몸을 불살라서라도.

사룡의 마나 핵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자는 없었다.

자폭. 흔한 클리셰다. 마지막까지 지저분하게 가는, 그래서 희생자를 양산하고 신파를 찍는 전형적인 고구마 클리셰.

“웃기지 마.”

김우진은 그 클리셰를 용납할 마음이 없었다.

그의 불꽃이 사룡의 마기를 불태웠다.

그의 검날이 핵을 지키는 방어 마법진을 갈랐으며 종국에는 그 끝이 핵이 닿았다.

콰직-

검날이 핵을 관통했다.

- 베니실르···. 이제 널 볼 수 있···.

사룡의 아련한 유언과 함께 충격을 받은 핵이 폭발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김우진이 한 발 빨랐다. 그의 손이 사룡의 핵에 닿았다. 박동하는 그것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권능, 포식.

폭주하여 폭발하는 것 이상으로 빠르게 김우진의 몸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러길 한참.

파스스, 거대한 괴물의 동체가 먼지로 화해 바람에 흩날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사룡이 죽자 사룡의 힘으로 말미암아 유지되는 죽음의 군단 또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나 둘 쓰러져가는 시체들에 칼을 맞대던 기사와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 이겼다!”

“언데드들이 모두 소멸하고 있다!”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사룡의 존재감은 너무도 거대했기에 그 소멸을 왕도의 모두가 목격했으니까.

“사룡이 쓰러졌다!”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용사, 김우진이 사룡을 쓰러트렸다!”

“김우진 만세!”

와아아아아!

“···정말로 이긴 거야?”

“종말이 끝났다고?”

믿기지 않는 현실에 힘이 풀린 사람들이 하나 둘 주저앉았다.

종말이 끝났다.

김우진에 의해서.

* * *

비엔데르크의 왕도는 처참함 그 자체였다.

성벽은 죄다 무너지고 멀쩡한 건물보다 그렇지 않은 건물을 찾는 게 더 쉬웠다.

사방에 넘쳐나는 시체는 시산혈해를 이루었으며 잃어버린 자식과 부모를 찾는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의 얼굴에는 희망이 있었다.

사룡이 죽었기에, 내일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승전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 수는 없었다.

인류를 수십년 간 괴롭히던 종말이 끝난 것은 분명 거국적인 일이었으나 왕도의 피해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미안하네. 마음 같아서는 성대하게 축제라도 열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닙니다, 폐하.”

승전을 선언한 국왕은 그나마 멀쩡한 별궁으로 거주지를 옮긴 김우진을 따로 만나 술 한 잔을 내렸다.

“그대는 영웅이네. 이 나라를, 이 대륙을, 나아가 인류를 지켰네. 그대가 아니었다면 사룡이 쳐들어 온 어제가 내 마지막 날이었겠지.”

국왕이 스스로의 목을 어루만졌다.

“혼란이 수습되면 반드시 더 큰 보상을 하겠네.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것이니 잘 생각해보게.”

김우진의 어깨를 토닥여준 국왕이 나갔다. 밖에 나가있던 세이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말해라.”

“뭐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지?”

“별 일 없었다.”

“별 일이 없었는데 전력을 다해도 뼈에 기스를 내는 게 전부였던 네가 놈을 압도했다고?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역시 안 믿기겠지?”

“스스로 자각은 있어서 다행이군.”

확실히 개도 안 믿을 개소리기는 했다.

“하지만 나한테도 다 사정이···.”

“김우진!”

그 순간, 창문이 와장창 깨져 나갔다. 공간이 뒤틀리고 누군가 나타났다.

“알베니우스님?”

“쿨럭···제기랄!”

상처투성이의 알베니우스가 김우진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창백한 안색은 누가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뭐지? 아는 사이인가?”

세이드가 알베니우스를 경계했다. 비록 상처투성이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결코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 치워, 세이드. 아군이야.”

“아군?”

“네가 물었지?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말하지 않기로 했으나 이 상황을 납득시키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이 자가···.”

“나중에 다 이야기 할테니까 일단은 치유 마법사 좀 불러줘.”

“알겠다.”

세이드가 나갔다. 김우진이 다급히 알베니우스의 상세를 살폈다.

“뭡니까? 왜 또 이 꼴이 됐어요? 설마?”

“그 설마가 맞다.”

하하, 알베니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제기랄, 내가 신들의 집념을 얕봤어. 너와 헤어진 후, 이곳저곳 거처를 옮겨 다녔지. 그런데도 기어코 찾아내더군.”

알베니우스가 글라크에 있다는 확신이 생긴 신들은 무려 열 명의 집행자들을 투입했다.

평소라면 알베니우스의 상대가 되지 않았을 이들이지만 신들에게 입은 부상을 회복중인 현재의 알베니우스는 그들을 감당해낼 여력이 없었다.

“도망치고 또 도망쳤어. 이 몸 상태로 차원 이동은 무리이다 보니 생각나는 게 너밖에 없더군.”

“차원 이동도 가능하십니까?”

“말했잖아. 나는 이 차원의 존재가 아니라고. 용사도 아닌 내가 어떻게 왔을 것 같아?”

“···그렇게 말씀하시니 신 후보라는 말이 쏙 와 닿기는 하네요.”

“가르침은 다 받아 놓고 이제야?”

알베니우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를 좀 도와다오.”

“쫓기고 있는 겁니까?”

“그래. 집행자가 무려 열 명이야. 지금의 나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

“집행자라면 그때 그 수준이라는 건데.”

“더 강해. 더 상위의 집행자들을 보냈어.”

그보다 더 위라.

그렇다면 어쩌면 사룡급일 수도 있다. 그런 수준의 강자들이 열 명이라.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나를 도와줄 테냐?”

“말했잖습니까. 은혜도 원수도 모두 갚는 주의라고.”

알베니우스 덕분에 사룡을 죽이고 살아남았다. 신들과 대적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는 않지만 알베니우스가 아니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그리고 신들에 대한 불신도 쌓여가고 있었고.

“고맙다. 이 은혜는 꼭 갚지.”

“제가 지금 은혜 갚는 중입니다만.”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해. 여기서 놈들을 맞이하는 건···.”

“안타깝게도 그건 이미 그른 것 같습니다.”

김우진의 시선이 한 곳으로 돌아갔다. 알베니우스가 다급히 김우진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그곳에는 언제부터 자리하고 있었는지 모를 열 명의 존재들이 있었다.

용사 그 이상의 강자들.

“용사, 김우진?”

“김우진과 알베니우스가 붙어먹은 건가.”

“어쩐지, 전혀 가망이 없어 보이던 김우진이 사룡을 쓰러트린 게 이상하다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신들의 명을 지켜야지. 우리의 목표는 알베니우스를 죽이는 것. 그것을 방해하는 자들은 모두 적이다.”

“차원의 종말을 막은 뒤니 거리낄 것도 없겠군.”

열 개의 시선이 김우진을 훑는다. 김우진이 눈에 힘을 주고 그것들을 받아 쳤다.

“명색이 신의 사자라는 양반들이 우르르 몰려와 양아치처럼 한 명을 줘 패는 건 좀 추하지 않습니까?”

“입담 하나는 쓸만하다더니 정말이구나.”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다. 그냥 죽여라.”

“감히 신을 모욕한 반역자와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크나 큰 죄인지 깨닫게 해주어라.”

집행자들이 무기를 뽑아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김우진이 더 빨랐다.

─!

주먹이 집행자 하나의 머리를 강타했다.

콰앙, 집행자의 신형이 별궁의 벽을 부수고 튕겨져 나갔다. 김우진이 따라붙었다. 당황한 집행자들이 달려들었다.

“···뭐지?”

“막아라!”

“김우진의 수준이 상상 이상이다. 방심하지 말도록!”

“이 빌어먹을 놈이···!”

김우진에게 얻어맞은 집행자가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무기를 치켜드는 그가 마주해야 할 것은 불의 검이었다.

──!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충격에 집행자가 비틀거렸다.

“어떻게?!”

의문을 해소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동료 집행자들보다 김우진의 다음 수가 더 빨랐다. 불길이 그의 바닥을 녹였다. 균형을 잃은 육신이 비틀거리는 사이 칼날이 틈새를 노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콰득, 거친 손아귀가 집행자의 목을 움켜쥐고 바닥에 내리 꽂았다.

“크윽···!”

그가 신음을 삼켰다. 목이 잡히자 모든 기운이 김우진에게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런 힘도 낼 수 없었다.

“멈춰라, 김우진!”

뒤늦게 당도한 집행자들이 김우진을 둘러 쌌다.

“멈추라고? 내가 왜?”

“감히 신들을 적대하겠다는 뜻이냐?”

“내가 여기서 이놈을 그냥 풀어주면 살려줄 생각은 있고? 너희들, 이미 나를 반역자라며?”

“놈···!”

“살려주마.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사족이 붙은 약속은 절대 좋은 약속이 아니야. 왜, 목숨은 살려주고 사지라도 자르게?”

“······.”

“정곡을 찔렸나 보네.”

“후회할 짓 하지 마라. 그 녀석을 죽이면 네놈이 무사할 것 같으냐? 비록 네 수준이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이라 당황하긴 했지만 우리는 집행자다. 결국 넌 파멸할 수밖에 없어.”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싶으면 당장 녀석을 놓아주고 무릎을 꿇어라.

“개소리하고 있네.”

김우진이 픽 웃었다.

“그거 알아?”

불꽃이 집행자 하나를 집어 삼킨다.

“열 명이든, 백 명이든.”

정령왕의 정수와 두 집행자를 집어삼키고 완전히 체득하여 새로운 경지로 나아간 김우진은.

사룡, 티타니아드라는 최악의 어둠의 사도마저 참살하여 업을 쌓고 그 정수를 취했으니.

“나는 질 것 같지가 않아.”

신들의 권속이 된 대가로 하위 차원에서 힘을 제약 당하는 집행자들 따위에게 질 자신이 없었다.

우득-

집행자의 목이 꺾였다.

“이 개자식이!”

“노오오오옴!”

전투가 재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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